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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05)화 (105/120)

105화. 얼마 남지 않은

기다린 보람이 있게끔 로이드는 창가에 기대 시원한 미소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크게 벌어진 입매와 따스한 시선에 에일린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볼일이 빨리 끝났네.”

“네, 두 분과만 차를 마셔서 빨리 마무리되었어요.”

“어느 분과?”

로이드는 아예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물어왔다.

“루사벨라 황후 마마와 제이나 황비 마마요. 로지에 마마께서는 다른 일정이 있으셔서 잠깐 시간만 내어주셨어요.”

에일린은 아예 로이드에게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에일린이 즐거운 듯 종알거리는 모습만으로도 로이드의 마음도 풀어지고 있었다.

“좋은 시간이었네.”

“아…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재밌었어.”

“당신이야말로 일이 다 끝난 건가요? 그러면 같이 돌아갈래요?…

말로는 일이 끝났냐고 물어보지만 내심 같이 돌아갔으면 하는 말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에일린이 손을 내밀었다. 눈앞까지 다가온 손을 로이드는 맞잡고 싶은 눈으로 보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

로이드는 에일린이 찾는다는 말에 곧장 움직였지만 곧 도로 돌아가야 했다. 황궁에서의 일을 처리하려면 오늘 집에 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의 거절에 에일린이 눈에 띄게 실망했다. 

“혹시 오늘 안으로 끝나면 기다릴 수 있는데…….”

“나도 같이 궁에 남아있으면 이렇게 틈틈이 찾아올 수 있어서 좋은데 내키지 않아.”

로이드도 싫진 않았다. 그러나 에일린에게 황궁에서 기다리라고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황궁이라 할지라도 대공가보다 안전하진 않았다. 에일린은 로이드가 신경 쓰지 않도록 돌아가야 하는 걸 알았다. 

에일린은 창틀에 올라온 로이드의 손을 토닥였다. 그러니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서 요동치던 페로몬이 조금씩 잦아드는 걸 느꼈다. 

그도 나만큼이나 아쉽구나.

그것을 깨닫자 로이드와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이 조금씩 옅어졌다.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이 마주한 상태로 에일린은 제 표정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미소 지었다.

“잘 다녀오세요. 올 때 맛있는 거 사 오시고요.”

에일린의 인사에 로이드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풀어지는 마음 그대로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기대해도 좋아.”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드가 마차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것을 신호로 여긴 마부가 말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에일린이 창문에 가까이 기대서 손을 흔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대공 전하.”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던 제라미 경이었다. 그는 마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로이드를 보며 약간 황당한 듯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오래 떨어지는 줄 알겠습니다.”

사이좋은 건 좋지만 너무 절절한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로이드는 더 붙잡지 못한 게 아쉬운 듯 대답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로이드 역시 에일린과의 시간을 계속 세고 있었다. 이제 남은 날은 지나간 날에 비할 수 없이 짧아졌다. 심지가 전부 탄 초를 보는 것처럼 애가 탔다. 조금 더 전쟁을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조금 더 마음을 빨리 깨달았다면 달랐을까? 하지만 그 모든 건 되돌릴 수 없는 미련이었다. 

“일을 빨리 끝내야겠어.”

전혀 힘이 나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로이드가 천천히 표정을 지워갔다. 무표정한 얼굴의 로이드는 에일린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던 그가 맞는지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를 지켰는지 보여 줘야겠지?”

“하지만 전하.”

그 자리를 지킨 방법이라 하시면…….

제라미 경의 불안한 음성이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

“하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왔을 줄이야.”

케이트 황비가 입술을 짓씹으며 불안한 눈빛을 띠었다. 황궁의 밤은 촘촘하게 경계가 강화된다. 그 사이를 몰래 나간다면 못 나갈 것도 없지만 혹여나 황제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그래서 아예 황제가 대전 회의에 들어간 시간에 맞춰 나갔다 왔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공비가 온 것이고.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모를 것입니다.”

옆에서 달래주는 래즐 부인의 말에도 케이트 황비는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비야.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상대라고.”

케이트 황비는 이제 대공비를 그저 그런 여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시했다가 첫 만남에서 만만치 않은 입담을 느꼈고 패트릭마저 잃었다. 이제 케이트 황비는 대공비를 단순히 대공을 휘두르기 위한 미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분명 알고 온 걸 거야.”

래즐 부인은 아까 만난 대공비의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지만 케이트 황비의 잔뜩 찡그린 미간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자세히 모를 것입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게 신중을 가했으니 긴장 푸세요. 그러려고 황비 마마께서 직접 움직이지 않으셨습니까.”

래즐 부인의 살살거리는 말투에 케이트 황비가 조금씩 흥분을 누르기 시작했다. 래즐 부인의 말이 맞았다. 케이트 황비는 이번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빌리는 대신 직접 움직였다.

독을 구하기 위해 은밀히 만남을 가진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으니 누구도 케이트 황비의 품에 독병이 들어있는지 모를 것이다. 

케이트 황비의 날카로웠던 눈매가 가라앉는 듯하더니 평소의 여유롭고도 도도한 그녀로 돌아왔다.

“그래, 아무리 대공비라 할지라도 나한테 안 되지.”

케이트 황비가 차분해진 얼굴로 말하니 래즐 부인이 은근한 눈빛을 띄웠다. 황비와 자기만 알고 있다는 비밀로 인하여 래즐 부인은 제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제 황비가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가져가기만 한다면 래즐 부인의 가문 또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것이라 확신했다.

“차를 가져올까요?”

“그러지.”

그러나 어렵게 찾은 평화는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못하고 다시 깨져버리고 말았다.

***

“그자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답답합니다.”

“대체 제대로 심문을 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심문이 쉽지 않은 듯합니다. 아무래도 예전에 꽤 귀한 신분이었다고 하니.”

대전 회의가 끝나고 따로 모인 귀족들이 은근한 불만을 터트렸다. 그들은 알란이 벌인 일이 좀처럼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으니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알란이 예전에 몸을 담았던 대공가에게 은근한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그에 가만히 듣고 있던 로이드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려 제게 시선을 모았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움직이죠.”

로이드가 앞장서겠다는 듯 일어나자 귀족들이 엉거주춤 의자에서 반쯤 엉덩이를 뗐다. 보통 죄인을 심문하는 자는 따로 있었고 그들은 앉아서 결과만 기다렸었다. 그런데 직접 가서 물어보자고? 

대공의 신분으로 벌이기엔 다소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기가 막히든 말든 당사자인 로이드는 태연하기만 했다. 

“왜들 그리 앉아 있습니까? 알고 싶다면서요. 폐하께는 제가 미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대공이 선뜻 말을 꺼내자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안 갑니까?”

뻔뻔하게 물어보기까지 하니 귀족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잠시 잠잠했을 뿐 예전의 그 대공으로 돌아왔다고 여겼다.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 때문에 당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었다.

로이드가 나가자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김에 알란의 얼굴을 직접 볼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회의실을 나와 앞장서던 로이드는 우연히 케이트 황비를 마주쳤다.

“어딜 가는 길입니까?”

로이드의 인사를 못 본 듯 넘긴 케이트 황비의 물음이었다. 

“알란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대공이 직접요?”

“대공가에 오래 살았던 자입니다. 지금은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요.”

로이드는 철저하게 알란과 대공가를 갈랐다. 애초에 알란이 저지른 죄를 바로 잡은 것도 대공가였다. 그렇기에 로이드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로이드는 케이트 황비의 얼굴을 보다가 은근하게 말을 걸었다.

“혹시 압니까? 제가 모로는 또 다른 비밀이 있을지.”

케이트 황비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한 채 로이드를 응시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로이드는 예상보다 더 그녀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스치듯 나왔다. 그것도 잠시 로이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의심스러운 게 있으니 가서 들어보는 게 좋겠지요. 이를테면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한 이는 누구였는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짓을 하려고 했는지……. 오늘 별일 없었는지.”

로이드의 의미심장한 말에 케이트 황비는 확신했다. 그가 오늘 대공비를 만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자리를 비웠음을 말하니 대공이 그것을 의심하고 직접 알란 그자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케이트 황비가 아무 말이 없으니 로이드는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그녀를 지나쳤다.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귀족들 역시 로이드를 따라가니 곧 케이트 황비와 그녀의 사람들만 남았다.

“역시 대공비가…….”

케이트 황비가 래즐 부인을 노려보았다. 이래도 대공비가 아무것도 모르겠냐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일을 서둘러야겠다. 섣부른 오해가 케이트 황비의 조바심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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