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설레는 마음
“황후 마마.”
“어서 와요.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반갑네요.”
에일린은 흔쾌히 시간을 내어준 루사벨라 황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비가 사라진 날 황궁에도 당신의 이야기가 돌았지요. 특히나 제이나 황비는 내게 직접 찾아와 사람을 내어달라고도 했었어요. 브리스 부인은 말도 못 했고요.”
에일린을 단순히 대공비로만 여기는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나 에일린의 생모인 브리스 부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제이나 황비 역시 에일린을 찾아보고자 바쁘게 황궁을 돌아다녔다.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군요.”
루사벨라 황후의 말에 에일린은 미소로 화답했다. 정말로 큰일에 비해 그 여파가 작아서 다행이었다. 모두가 무사했고 특히나 패트릭에게 가졌던 트라우마가 걷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일린은 진정으로 루사벨라 황후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처음부터 제게 호의를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 호의에 조금도 다른 뜻이 들어있지 않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것 때문입니다.”
에일린이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황후의 귀중한 걸음을 대공가로 행차하게 할 마음은 없지만 모임을 만든 것을 알리려는 의도였다.
“이제야 마음을 두기 시작했군요.”
루사벨라 황후는 초대장을 들어 안을 들여다보더니 그리 말했다. 알 듯 말 듯 한 말에 에일린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루사벨라 황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달았다.
결혼부터 이상하다 생각한 조합이었다. 권세 높은 대공가와 특별할 것 없는 백작가의 결합마저도 신기한데 심지어 신부는 우성 오메가가 아닌 베타였다.
그러나 루사벨라 황후는 에일린을 직접 보고 나서야 소문의 진위를 알았다. 에일린을 보지 않은 자들이 호기심에 떠들어댄 말이 태반이었다. 에일린은 누구보다 대공비에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소문이라는 것이 아예 진실만도 아니니 귀를 닫기엔 별의별 내용이 많았다.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문부터 수도를 들썩이던 중화제가 대공비의 것이라는.
에일린의 괴이한 행동은 굳이 들어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흘러들어왔다. 그런데 무엇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게 없었다. 그래서 루사벨라 황후는 언제든 에일린이 괜찮다면 날을 잡아 초대할 생각이었다.
“한때 귀부인들의 모임을 전부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아, 그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정이 지금은 해결되었나요?”
그 사정이란 것은, 대공비로 있을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해결되진 않았지만 다른 대안을 찾았지요.”
에일린의 애매모호한 말에 루사벨라 황후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일린은 더 말하는 대신 초대장을 가리켰다. 루사벨라 황후가 초대장을 읽으며 마지막 하단에 박힌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클로에 리하스트.”
“모임의 주최자는 어디까지나 클로에 아가씨랍니다.”
루사벨라 황후가 알아챈 것을 눈치챈 에일린이 친절하게 클로에를 언급했다.
***
제이나 황비와 로지에 황비까지 무사히 만나고 난 후 에일린은 마지막 케이트 황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실은 그녀가 자신을 반길 거라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준 초대장을 케이트 황비만 건너뛸 순 없는 노릇이라 에일린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패트릭의 먼 친척. 별장의 소유주. 그리고…….’
케이트 황비는 에일린과 척을 지는 사람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니 자세한 건 에일린도 알지 못했다. 로이드는 에일린에게 더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고 에일린도 이후에 패트릭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이제 에일린의 인생에서 패트릭은 완전히 지워진 인연이었다. 홀가분하게 털어냈으니 궁금하지 않다는 게 맞았다.
“마마께서는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시녀의 공손한 대답에 에일린이 초대장과 루사벨라 황후로부터 받았던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루사벨라 황후는 콕 집어 케이트 황비에게 줄 것이 있다며 하나를 내밀었다. 아마 케이트 황비가 에일린과 만나지 않을까 싶어 마련한 배려인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케이트 황비가 있을 때나 통하는 거였다. 케이트 황비가 자리에 없다고 하니 에일린은 금방 황비의 궁을 나왔다. 마주치면 어색할 걸 알기에 그녀의 부재가 아쉽진 않았지만 황후폐하의 물건은 도로 돌려드릴 생각이었다.
막 건물 밖으로 나온 에일린은 문득 은은한 페로몬을 느꼈다.
“오메가…… 페로몬인데?”
페로몬을 따라 에일린이 옆을 돌아볼 때였다.
“대공비가 여긴 무슨 일인가요.”
“케이트 황비마마.”
에일린은 길이 아닌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케이트 황비를 보고 예의를 갖췄다. 동시에 자신이 맡은 오메가 페로몬이 그녀의 것임을 알았다. 일전에도 맡은 적이 있어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일린의 인사를 무시한 케이트 황비가 불쾌한 낯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가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나요?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무례하게 찾아왔음을 말해오자 에일린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초대장을 드리기 위해 황비마마를 찾아왔습니다. 마침 황후폐하께서 보낼 게 있다고 하시어 그것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에일린이 두 손을 내밀어 초대장과 작은 상자를 내보였다. 이유 없이 들이닥친 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니 케이트 황비의 굳은 얼굴이 조금은 풀렸지만 여전히 딱딱했다.
특히나 그녀는 막 외출하고 돌아온 까닭에 에일린의 존재를 상당히 거슬려 하고 있었다.
“두고 가요.”
케이트 황비가 흰 장갑을 벗어 시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녀는 에일린의 존재 자체가 달갑지 않은 걸 숨기지 않았다.
시녀가 물건과 초대장을 들고 물러나면서 케이트 황비와 에일린 둘만 남았다. 에일린은 케이트 황비와 더 나눌 말이 없으니 나갈 생각으로 인사를 건넸다.
“잠깐.”
당장이라도 사라지길 바랄 줄 알았던 케이트 황비가 무슨 생각에선지 에일린을 붙잡았다. 그에 몸을 돌렸던 에일린이 다시금 케이트 황비를 향해 마주 섰다.
“내 사촌 아이가 곤혹을 치르고 있단 걸 아나요?”
패트릭을 언급하는 말에 에일린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으나 좋지만은 않겠지요.”
“그리 알고서도 뻔뻔하게 날 찾아왔네요.”
케이트 황비는 에일린을 얄밉고도 비열한 사람 보듯 했다. 패트릭을 시켜 에일린을 죽이려 했던 과거는 실패한 것과 동시에 묻어버렸다. 케이트 황비의 차가운 눈빛에 에일린은 흔들림 없이 입을 열었다.
“케이트 황비께서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알기에 찾아왔습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전부 패트릭 개인이 벌인 일임을 에일린이 뭉근하게 표현했다. 여기서 케이트 황비가 더 따지고 든다면 그녀가 관계있음을 드러내는 꼴이 되어버린다.
말 한마디로 상황이 뒤바뀌었다. 에일린은 평온하게 케이트 황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케이트 황비는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몇 번이나 침을 삼켜야만 했다.
***
케이트 황비가 사는 궁까지 들르는데 반나절이 넘지 않았다. 제이나 황비와 있을 때 차를 마시면서 꽤 많은 시간을 지체했지만 케이트 황비는 에일린에게 쌀쌀맞은 인사로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에일린이 후련한 마음으로 걸어 나오자 호위 기사와 마부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호위 기사의 물음에 에일린이 황궁을 돌아보았다. 올 때 로이드와 함께 와서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 돌아간다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일린이 돌아가겠단 대답 대신 물음을 던졌다.
“대공님은 언제 나올지 알아?”
“알아보겠습니다.”
호위 기사의 말에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라탔다. 혼자 마차에 앉아 기다리는 에일린은 로이드가 마침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 마주 보고 앉아서 서로의 눈을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아까는 어디에 가고 싶냐는 물음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만약 같이 갈 수 있다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봐도 좋지 않을까?
창밖을 바라보며 누가 올지 살펴보다가 제 옷을 매만지며 기다리는 에일린이 문득 제 행동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맞네.”
에일린은 제 마음을 깨달은 지 얼마 안 됐고 그만큼 로이드와 같이 있고 싶었다. 그가 집무실에 있을 때 문 앞에서 제자리걸음으로 잠시 맴돌기도 했고 일이 많아 새벽 즈음에 돌아오는 로이드를 잠든 척 몰래 지켜보기도 했다.
그의 페로몬을 맡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닿은 자리는 하루 종일 간지러웠다.
특히나 지금처럼 아주 가까이서 눈을 마주친 경우엔…….
“꽃향기를 따라오니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