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지금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알란의 맨발을 찔렀다. 알란은 신발이 주어지지 않은 걸 불만으로 여기면서도 의자에 발을 올리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자긍심에 바른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다. 대신 알란은 방의 한쪽을 메운 쇠창살에 대고 외쳤다.
“대체 이 방은 왜 이리 춥단 말이냐.”
알란의 외침이 고요하리만치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알란이 짜증스러운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예 쇠창살을 잡자 반대편 방에 있던 케일란이 보였다. 침대 위에 앉아 반쯤 넋이 나간 아들의 모습에 알란이 뿌득 이를 갈았다.
“내 말 안 들리나. 당장 이 감옥의 책임자를 부르란 말이야!”
“거 조용히 있으시오.”
드디어 나타난 병사가 건들거리는 말투로 쇠창살을 창대로 탕탕 두드렸다. 배를 긁적이며 하품을 하는 게 근무 중에 자다 나온 모양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누구긴, 이제 성과 작위를 빼앗길 죄인으로 보지.”
병사의 낄낄거리는 웃음에 알란이 발끈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나는 곧 여기서 나갈 것이다. 내가 나가기만 하면 네놈 따위는 당장…… 크윽.”
쇠창살을 쥐고 병사에게 협박하던 알란이 제 손목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휘둘러진 병사의 창대에 맞은 손목이 금세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알란이 손목을 다시 감싼 채 병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병사는 콧방귀를 끼며 창대 끝으로 바닥을 찍어댔다.
“나가기는 개뿔. 이미 다 알아 봤구만.”
귀족을 가두는 감옥에서는 죄인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병사가 알란을 함부로 대하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시끄러우면 지하 감옥으로 옮길 테니까 그리 아쇼. 귀족 나부랭이라고 감옥이 좋아서 그런가 정신을 못 차리네.”
병사는 창살을 제외하면 방과 다름없는 감옥을 두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알란이 조용해지자 병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라졌다.
소리를 질렀다가 손목만 날아갈 뻔한 알란의 얼굴이 분한 듯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아버지.”
케일란이 조용히 알란을 불렀다. 그는 방금까지 알란과 병사의 대화를 다 지켜보았다.
“포기하십시오. 우리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너는 억울하지도 않느냐.”
“억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이제 우리를 구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케일란의 체념에 알란이 이를 뿌득 갈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떻게요? 이미 연구원들이 다 불어서 우리의 책임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때 약을 먹고 쓰러진 자들 중 귀족도 있어서 더욱 상황이 안 좋고요.”
“흥. 좋다고 먹을 땐 언제고.”
알란이 기가 찬 듯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죽을 줄 알고?”
알란의 살기 가득한 눈이 쇠창살을 노려보았다.
“절대 혼자 죽을 수 없지. 죽을 때 죽더라도 꼭 한 놈은 끌고 들어갈 것이다.”
“아버지. 이제 제발 그만 하세요.”
케일란의 안타까운 절규에도 알란의 독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너는 보고만 있거라. 내 모든 게 잘못되어도 너 하나만은 무사히 내보내 줄 것이야.”
알란은 다시 쇠창살을 잡았다.
“케이트 황비를 불러와. 아니면 재판이라도 열어. 내 모든 것을 밝힐 것이다.”
알란의 의미심장한 말이 울리자 아무도 없던 복도에 길쭉한 그림자가 들어섰다.
***
클로에와 머리를 맞대고 모임을 만들어낸 에일린이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있어도 바쁜 와중에 또 일을 벌였다면서?”
머리 위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에일린이 고개를 젖혔다. 에일린을 내려다보는 로이드는 타박하는 듯한 말투와 다르게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이젠 마주할 때마다 그의 입매가 자연스럽게 올라가지만 에일린은 적응하지 못한 듯 부끄러워했다. 젖혔던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것을 매만지고 있자니 그의 청량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에일린이 잠시 눈을 감고 페로몬을 느끼는 사이 로이드가 옆으로 돌아왔다.
“클로에가 신나게 뛰어다니던데.”
“재밌긴 하더라고요.”
모임이라는 거 왜 하나 싶기도 한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지, 만나면 무엇을 할지,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가끔 나보다 더 친해 보이긴 하는데 질투하면 안 되겠지?”
로이드는 팔짱을 끼며 에일린에게 삐진 듯 투덜거렸다.
“그거야 로이드도 바쁜걸요.”
에일린도 로이드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으면 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정말 시간을 쪼개 쓸 정도로 바빴다. 에일린도 일이 많았지만 로이드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느낌이 들 정도로.
“클로에 아가씨와 하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아요. 아가씨가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까지 해야 해서 그런 거죠.”
“뭐, 당신도 좋다면 좋은 거겠지.”
로이드는 클로에와 모임을 만드는 것 자체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에일린이 계속 일을 늘려서 걱정이지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를 가려고?”
로이드의 시선이 에일린의 드레스를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대공가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옷을 입고 다니다가도 밖에 나갈 때면 꼭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
에일린이 뒷짐을 지던 손을 앞으로 가져오며 초대장 뭉치를 내밀었다. 대부분의 초대장은 시종들이 직접 움직였지만 대공가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이에게는 에일린이 직접 갈 참이었다.
“황궁에 들렀다 올게요.”
에일린이 어느새 다가온 마차를 보며 로이드에게 인사했다. 그러고도 좀처럼 마차에 올라타지 않았는데 로이드가 제 손에 들린 초대장을 계속 보고 있어 그랬다.
에일린은 점점 모여드는 시선을 느끼며 이제 그만 마차에 타야 할 걸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다녀오겠다고 다시 한번 말하려던 때에 로이드가 먼저 말했다.
“같이 가지.”
“정말요?”
에일린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로이드의 하루 일정이 늘 빡빡하게 돌아가는 건 에일린이 가장 잘 알았다. 오죽하면 그가 일을 끝내고 들어오는 느지막한 시간에는 피곤할까 말도 걸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 황궁에 가던 길이었어.”
로이드의 태연한 거짓말에 뒤편에 서 있던 제라미 경이 움찔했다. 누가 봐도 황궁은 아니구나 싶은 대조되는 반응을 본 에일린은 모른 척 미소 지었다.
“그럼 그럴까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싫지 않았기에 같이 가자는 동행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요즘 더 바쁜 거 같은데 무슨 일 있나요?”
에일린이 맞은편에 앉은 로이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듯한 눈썹 아래 짙은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평소처럼 잘생겼지만 평소보다 유독 거칠어진 피부가 마음에 쓰였다.
“별로?”
“잠도 잘 못 자는 거 알아요.”
다른 사람보다 에일린이 더 자세히 알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바쁜 걸 알았지만 요즘은 특히나 잠깐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로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로이드는 대수롭지 않게 처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에일린이 어떤 일 때문인지 떠올려보려고 하는 사이 로이드가 화제를 바꿨다.
“안 그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여유가 생길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날이 되면 바로 당신과 시간을 보낼 거야.”
“알았어요. 미리 말해 주면 제 일을 빨리 처리해놓을게요.”
에일린이 신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에일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되나요?”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으니 로이드는 어디든 좋다고 했다.
“그러면… 완전히 문화가 다른 외국에 나가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수도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괜찮네. 또 어디 가고 싶어?”
“저번에 클로에 아가씨와 호수에 갔을 때 잠깐 있어서 아쉬웠어요. 가장 예쁘다고 할 시기라면 호수든 산이든 가고 싶어요.”
에일린이 막 지나치는 풍경을 가리켰다. 다 예쁘네요. 그리고는 잠시 창밖을 확인하던 에일린이 몸을 바르게 했다.
로이드와 눈을 마주친 에일린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마차의 진동이 기분 좋게 다가왔고 그가 짓는 편안한 표정이 보기 좋았다.
로이드의 시선이 제 얼굴을 간지러울 정도로 길게 머물렀다. 에일린은 눈을 감고 싶기도 하고 그와 마주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그를 보고 싱긋 웃었다.
“다 가자.”
로이드는 에일린의 손을 잡았다.
“가고 싶은 곳에 전부 가는 거야.”
에일린은 제 손을 감싸는 커다란 손안에서 아늑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 손을 놓아야만 하는 날이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유수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두고 싶은 마음을 접으며 에일린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속절없는 바람보다는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게 더 나았다. 로이드의 페로몬을 한껏 들이마신 에일린이 대답했다.
“그래요.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