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각자의 생각
“나도 당신의 페로몬이 좋아.”
로이드의 말에 에일린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이 고백처럼 들려온 탓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말도 그에게 그렇게 들린 건 아닐까.
“당신의 페로몬을 맡고 있으면 몸이 나른해져. 아무리 화가 났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풀어져.”
에일린은 그에게 잡힌 제 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에 들어가서 어쩔 줄 모르고 살짝살짝 까딱이고 있었다.
“지금껏 맡았던 그 어떤 오메가보다 당신의 페로몬이 좋아. 아니, 순서가 잘못되었나? 당신이 좋아서 당신의 페로몬도 좋아.”
계속 좋다는 말이 계속되자 에일린은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정말 고백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로이드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로이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에일린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혹시 그거 때문에 이리 말하는 걸까 싶어서.
“그냥, 말하지 않았던 거 같아서. 당신이 사라졌을 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신의 페로몬 좋았다는 말을 안 한 것 같아.”
“그거라면…… 꼭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요.”
에일린이 상기한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가끔 그와 닿았을 때마다 제 페로몬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걸 봐왔다. 산책을 하면서 왜 서로의 페로몬이 좋다는 말로 흘러나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쁘지 않았다. 에일린은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의 페로몬을 항상 달가워했으니까. 그리고 로이드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으니 자꾸 심장이 크게 뛰었다.
산책을 나온 건 잘한 일이었다. 에일린은 아까까지만 해도 로이드를 어떻게 볼지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이미 그와 많이 가까워졌고 저의 의지와 다르게 마음도 그에게 기울었다. 하지만 약속은 지킬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조용히 있다가 떠나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게 로이드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에일린이 한결 후련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로이드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가라앉았다. 그는 에단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에단은 에일린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껏 에일린에게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어떤 핑계를 대서 붙들기보단 보내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로이드가 눈을 내려 에일린의 옆얼굴을 보았다. 간간이 미소를 지으며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었다. 산책에 만족하고 있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로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까부터 잡고 있던 에일린의 손을 제게 당겼다.
“왜요?”
“바람이 찬 거 같아서.”
로이드가 제게 붙어서 가면 어떻겠냐는 듯한 말에 에일린이 조금 어색해하다가 이내 몸의 힘을 풀었다. 아까는 시원하게만 느껴지던 바람이 좀 찬 것 같기도 하고.
에일린이 아까보다 크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눈을 위로 떴다. 앞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표정이 평온하니 못 들었구나, 여기면서도 에일린은 슬쩍 제 심장에 손을 올렸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손끝으로 흘러들어오는지 괜히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산책이 끝나면 차를 마실까?”
“그러는 게 좋겠네요.”
“요즘 마음에 드는 차가 있나?”
“그냥 다 좋아요.”
차는 어떤 걸 마셔도 괜찮았다. 로이드와 닿은 자리가 따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감춘 채 산책을 마쳤다.
***
막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온 케이트 황비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반가운 눈빛을 보냈다.
“에반스 황자.”
“어마마마.”
“수업은 끝났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음 수업을 가야 하는 와중에 어마마마가 여기 계신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잘했습니다.”
케이트 황비는 어리지만 딱 부러지는 에반스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남들이야 첫째 황자만 바라본다지만 에반스가 알파로 발현하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황제에게 칭찬했듯 에반스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고 영특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첫째 황자나 맹하고 해맑기만 한 셋째 황자와는 비교도 안 된다.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우리 에반스 황자가 물어보는 건 뭐든 답해주지요.”
케이트 황비는 평소의 고고한 표정도 에반스와 함께 있을 때면 상냥하게 바뀌곤 했다.
“케알란 제약소의 일로 잡혀온 자들 말입니다.”
에반스 황자는 그들의 이름을 자세히 모르지만 수도에 벌어졌던 큰일이 케일란 제약소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어마마마와 관계 있습니까?”
에반스 황자의 물음에 케이트 황비가 웃는 얼굴 그대로 멈췄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곧바로 그 감정을 감추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전부 어머니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누가 감히 그런답니까?”
“그냥 들었습니다.”
에반스 황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저 지나가다 보면 들린다고.
“절대 아니랍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 말고 수업에 집중하세요. 황자는 장차 크게 될 사람이니까 공부에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에반스 황자가 인사를 건네고 사라지자 케이트 황비의 얼굴에 지었던 미소가 사라지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으로 돌아온 케이트 황비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제자리를 서성거렸다.
황제는 케이트 황비가 연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으며, 에반스 황자까지 내용을 알 정도로 황궁에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케이트 황비는 알란을 죽이는 걸 서두를 생각이었다.
우선 알란을 죽인 후에 패트릭까지 처리하면 더 좋겠다. 그리 생각하는 케이트 황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미 패트릭을 내친 상태에서 그녀의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해줄 자가 없었다. 새롭게 손을 잡을 이가 필요하기에 케이트 황비가 끌어들였던 사람을 하나둘 떠올렸다.
“그자는 돈만 많지 심약하단 말이야.”
좀처럼 마음에 차는 이가 없었다. 패트릭처럼 과감하게 손을 쓰는 이가 드물었다. 더욱이 제 비밀을 지켜줄지가 의문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바칠만한 것을 내어줘야 하는데 가진 게 많은 자일수록 케이트 황비가 부리기 힘들었다.
이럴 때 조금이라도 더 사람을 끌어들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케이트 황비의 고민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에일린이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을 때 클로에가 찾아왔다.
“이제 슬슬 모임에 나가볼까요?”
에일린은 모임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일은 이미 많은 자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무사하다는 걸 보여주려면 모임에 나가는 게 좋았다.
“여기 지금껏 온 초대장입니다.”
제인이 눈치껏 초대장을 가져왔다. 에일린이 클로에와 함께 그것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이젠 익숙한 이름도 있었다.
“이 후작 부인이라면 꾸준히 보내네요.”
클로에가 에일린이 보던 초대장이 익숙한지 고개를 내밀어 같이 보았다.
“여기 거절했던 부인들의 초대장도 제법 되네. 아무래도 새언니의 중화제 때문인 거 같은데요?”
클로에가 몇 개의 초대장을 콕콕 집었다. 에일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클로에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중화제가 얼마나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모임에 들어오라는 제안에 대공비로 지낼 시간이 한정적이라 거절했었는데도 중화제 때문에 다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새언니?”
“아가씨.”
“네.”
“아카데미는 언제 가야 한다고 했죠?”
방학이 끝나고, 클로에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날이 제법 가까이 다가왔다. 에일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클로에는 다음 주에 가죠, 라고 대답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네요.”
“그렇죠. 그런데 왜요?”
“차라리 우리가 초대할까요?”
에일린은 이 모든 초대장을 모았다. 그리고는 클로에의 손에 있는 초대장까지 모아서 가장 위에 올려놨다.
“이 모든 사람에게 반대로 초대장을 보내면 어때요?”
“저번처럼요?”
촉진제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로이드가 연회를 열었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에일린은 그것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동의했다.
“대신 조금 달라요. 모임을 하나 만들어줘요.”
“모임을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아가씨를 중심으로요.”
“네? 새언니가 아니라요?”
클로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모임을 만든다고 한다면 당연히 에일린이 주축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네. 클로에 아가씨를 중심으로요.”
에일린이 생각을 바꾼 게 이것이었다. 에일린은 모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녀가 들어오기를 바랄 테니 차라리 클로에가 만든 모임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제 생각이 어때요?”
클로에는 모임을 계속 입 모양으로 따라 해 보았다. 클로에는 곧 에일린에게 제 생각을 말했다.
“가만히 보면 새언니는 일을 벌이는 성격 같아요.”
그런데 왜 그게 싫지만은 않지?
아카데미를 다닐 때보다 더 피곤한데도 클로에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