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한 사람의 페로몬
“대공 전하께서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제인이 에일린이 잘 기댈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하며 집사의 말을 전했다. 에일린은 허리를 받쳐주는 베개의 푹신함을 느끼는 척 로이드의 이야기를 흘렸다. 제인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에일린이 덮은 이불을 살살 쓸었다.
“불편하신 곳은 없나요?”
“없어. 그리고 나 정말 괜찮아. 이제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은데.”
“안 됩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침대에서 푹 쉬라고 하셨어요.”
제인은 절대 에일린이 내려올 수 없게 더욱 살뜰히 챙겼다. 지금도 심심할까 에일린이 반쯤 앉게 도와주고는 주변으로 책과 서류 등을 놔주었다.
“칼릭스 원로님, 클로에 아가씨 그리고 대공 전하까지 전부 마마를 걱정하고 계셔요.”
제인은 에일린이 없는 동안 대공가가 어떤 분위기였는지 말했다.
“마마께서 사라지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어서 간식을 정리하던 제인이 협탁만으로 좁아서 테이블을 하나 더 끌고 왔다.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고 모두가 마마를 기다렸어요. 기사들은 마마께서 내어주신 점심을 잊지 않고 마마를 찾아 뛰어다녔고 연구원들까지 나오려는 걸 대공 전하께서 말렸어요. 마마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답니다.”
에일린은 눈을 떴을 때 제인이 울먹이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더욱 마마께서 무리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에일린은 더욱 일어나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기보다 자신을 더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그저 제인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나았다. 일 년도 지내지 않은 이곳에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마음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 좋았다.
그 기분 그대로 에일린은 어색함을 떨치려 책의 제목을 훑어보다가 옆의 서류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 서류는 뭐야?”
쉬라면서 서류와 펜까지 주니 에일린이 웃으며 그것을 들었다.
“혹시나 걱정하실까 봐서요.”
제인의 조심스러운 말에 에일린이 서류의 내용을 보았다. 그동안 에일린이 처리하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쌓여있던 것들이었다.
“걱정은 안 됐는데 심심하진 않겠네.”
에일린이 흔쾌히 서류를 받아들였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절 불러주세요.”
“알겠어.”
제인이 방해하지 않을 요량으로 밖으로 나가자마자 에일린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놨다. 자신이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것보다 에일린의 머릿속을 꽉 채우는 다른 것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로이드를 어떻게 보지.’
꿈의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바람에 로이드를 본다는 것에 대해 걱정이 앞섰다. 그를 이용할 마음으로 먼저 계약 결혼을 제의했다. 1년 후에 헤어질 걸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련이 돌고 있었다. 어쩌면 꿈에서 나온 에단은 에일린 자신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싶었다.
스스로도 이 계약 결혼을 신경 쓰고 있었다. 특히나 에일린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로이드라는 남자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발현할 때도 패트릭에게 잡혀 위기에 빠졌을 때도 에일린은 로이드를 떠올렸다. 그를 의지하는 마음과 함께 그에게 향하던 마음을 이번에 큰 사건을 겪으며 불현듯 깨달았다.
“이러면 안 돼.”
에일린이 한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처음 그녀가 계약 결혼을 제의했을 때 로이드는 거절했었다. 에일린의 마음이 그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때 에일린은 그럴 일은 절대 없다며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렇기에 에일린은 더욱 로이드를 붙잡을 자격이 없었다.
‘로이드는 모르니까 모른 척 묻어두는 게 낫지.’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로이드가 에일린의 머릿속을 헤집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에일린이 티 내지만 않는다면…….
“에일린?”
에일린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앞에 아무도 없는데 잘못 들었나 싶지만 곧 옆에서 길쭉한 팔이 들어오자 착각이 아닌 걸 알았다.
“로이드.”
“나 때문에 놀랐어?”
“어… 아니요.”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불렀는데.”
“제가 그랬어요? 그랬나? 아, 이걸 보느라 그랬나 봐요.”
에일린이 놀라서 손에 힘이 들어가 구겨진 서류를 어색하게 폈다. 마침 변명거리로 삼기 좋았다.
“딱히 그쪽을 보고 있진 않았는데.”
그러나 로이드의 예리한 질문에 에일린이 남몰래 입 안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뭐라고 하지?
“몸은?”
“좋아요.”
다행히 로이드가 화제를 돌려주면서 에일린이 빠르게 대답했다. 실제로 에일린은 가벼운 생채기나 근육통이 전부였다. 오히려 자신보다 패트릭과 싸운 로이드를 더 걱정해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부 자신만 돌아볼 뿐 로이드를 살피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요?”
생각난 김에 에일린이 로이드의 팔을 잡았다. 패트릭의 단검이 지나간 그의 배를 보았다. 그때처럼 피에 젖어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사라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상처 치료했어요? 쉬어야 하지 않아요? 걸어 다니면 아플 거 같은데.”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침대에 앉으라는 듯 옆으로 물러서면서 그의 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인이 자신을 일어나지 못하게 했는데 지금 로이드를 보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
로이드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에일린의 얼굴을 엄지로 쓱 매만졌다. 나뭇가지에 긁힌 생채기가 있는 곳이었다. 약을 발라두어 그 바로 아래를 매만지는 로이드의 시선이 에일린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감도는 감정은 단순히 걱정이라 여기기엔 모자랐다. 가라앉은 눈동자는 깊은 무저갱과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렇다 보면 저도 모르게 제 마음을 말할 것만 같아서 계속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원래부터 크게 다친 곳도 없는걸요. 잠도 푹 자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힘이 넘쳐요.”
에일린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로이드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괜찮아 보이네.”
웃음 하나에 아까보다 분위기가 가벼워진 것 같아 에일린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계속 침대에 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리 산책할까?”
그와 대화를 나누는 불편한 공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던 에일린이 반색했다. 지금처럼 마주 보지 않는다면 더 좋을 거 같았다.
“가요.”
에일린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드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
방에서도 환기를 자주했지만 직접 정원에 나와서 맡는 공기는 달랐다. 더 청량하고 시원했다. 에일린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속도를 맞추는 로이드는 산책하러 나와서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 혼자 생각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인지 이유를 몰라 에일린은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로이드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그의 페로몬이 좋았다. 온통 푸릇한 나무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과일이 열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그것을 맡고 있으니 어느새 에일린의 페로몬도 조금씩 흘러나와 로이드의 페로몬과 어울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얽히는 페로몬의 감응에 에일린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일린,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맡아본 적 있어?”
에일린은 갑자기 들어온 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페로몬을 맡아본 적이 있냐고? 당연히 오메가가 된 후부터 형질인의 페로몬을 느끼긴 했다. 거기엔 알파의 페로몬도 있었고 오메가의 페로몬도 있었다.
“네. 있어요.”
“어땠어?”
로이드의 물음은 에일린에게 막연하게 다가왔다. 페로몬이 어떠냐고? 보통 형질인 사이의 알파와 오메가라면 서로의 페로몬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알파끼리나 오메가끼리라면 서로의 페로몬을 달갑게 여기진 않았다.
에일린은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어땠는지 떠올려보았다. 실은 로이드가 물어봐서 지금이라도 생각해 보는 거지 평소엔 그들의 페로몬을 느낀다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패트릭의 페로몬은 진저리치게 싫었고.
“그냥 그랬어요. 누군가가 향수를 뿌리고 왔다고 해서 그것을 주의 깊게 느끼진 않잖아요.”
에일린의 대답에 로이드가 제 페로몬을 한층 진하게 뿜었다.
“로이드?”
“내 페로몬은?”
“지금 당신의 페로몬을 맡으라고 그렇게 내보내는 거라면 그러지 말아요.”
에일린은 로이드가 장난을 치는 거라 여겼다.
“당신의 페로몬은 신경 쓰인다고요.”
“어떻게 신경 쓰이는데?”
자신의 페로몬을 가라앉혀주고 사이클 역시 눌러주었던 페로몬이었다. 맡고만 있어도 몸에 힘이 빠지고 계속 맡고 싶어지는 그런 향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만든다면 이 페로몬 향을 떠오를 만큼 좋아요.”
에일린은 보이지 않는 페로몬의 결을 만져보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페로몬은 만져지지 않았는데 로이드가 그 내민 손을 잡았다.
에일린이 잡힌 제 손을 보다가 로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