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00)화 (100/120)

100화. 오빠의 마음

로이드가 말이 없자 에단이 제 말을 이어갔다.

“동생이 원래 그 자리에 앉았어야 할 저를 대신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물론 대공 전하를 원망하려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저…… 제가 결혼하기 싫다는 이유로 모든 짐을 에일린에게 얹은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울 뿐입니다.”

에단은 에일린이 납치가 되었을 때부터 매 순간 후회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결혼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가문 간의 정략혼을 피하려 했다. 그것을 제 동생이 다 짊어진 것만 같았다.

“마음이 통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정략결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에일린을 그만 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단이 로이드에게 부탁했다.

“지금껏 있었던 일들만으로도 충분히 에일린이 힘들었을 거 같아서 더는 지켜볼 수 없습니다. 부탁합니다.”

“…생각해 보지요.”

로이드는 에단의 부탁을 매몰차게 밀어내지 못했다. 에일린이 대공가에 와서 넘긴 고비만 해도 적지 않았다. 

에단의 말을 들었을 때, 에일린을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으나 고집스럽게 밀어낼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완곡한 거절 대신 시간을 내밀었다. 에단은 제 할 이야기가 끝났기에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일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동안 머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단의 인사에 로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에단이 나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집무실을 나온 에단은 참아왔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제 할 말을 했지만 실은 몇 번이나 말이 끊길 뻔할 위기가 있었다. 

“차라리 원래대로 내가 왔었다면…….”

자신은 에일린처럼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었다. 현명한 에일린이기에 지금껏 잘 대처해왔을 것에 비하면 에단은 자신도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에일린이 계속 위험을 겪는 걸 볼 때마다 자신이 오지 못한 게 미안했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에단은 에일린을 데리고 갈 마음이었다. 대공가와 연을 맺지 않았던 전의 평화로웠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대공에게 제 뜻을 말했으니 에단은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대공가에 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막 에일린의 방에서 나온 사람을 확인한 에단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러츠 경 역시 인사를 해오니 에단은 눈으로 받으며 그를 지나쳤다. 

그런 에단의 등에 대고 러츠 경이 말을 걸어왔다.

“잠깐 대화할 수 있으십니까?”

이대로 지나칠 줄 알았던 러츠 경의 시간을 내어달라는 말에 에단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

근처의 응접실로 들어온 에단은 러츠 경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어색함을 떨칠 수 없었다. 러츠 경과는 대공가에서 고작 몇 번 마주친 게 다였다. 그러니 단둘이서 할 수 있는 대화라는 게 별로 예상가는 게 없었다.

그러다 떠오른 게 있어서 에단이 먼저 러츠 경에게 말을 걸었다.

“에일린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러츠 경이 계속 에일린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러츠 경의 겸손한 대답에도 에단은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건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공 전하를 찾아간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대화를 나눴기에 그 질문은 대답해드릴 수 없네요.”

“그렇습니까?”

“혹시 할 말이 그거라면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에단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아니면 제가 맞춰봐도 됩니까?”

러츠 경의 한마디에 막 돌아선 에단이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러츠 경을 향해 돌아서면서도 아까와 다른 제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그건 허락도 없이 개인적인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인 것에 대한 불쾌함이었다.

“이 정략결혼을 끊어내고 에일린을 놔달라고 했습니까?”

심지어 러츠 경이 정확하게 맞추다 보니 에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몰래 엿듣기라도 했습니까?”

“저는 지금껏 클로에 아가씨의 호위로 대공비 마마의 방에 있었습니다.”

엿들은 게 아니라는 듯 러츠 경의 여상한 대답에도 에단의 의심은 접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럴 거라 예상했습니다. 워낙 사이좋은 남매였으니까요.”

사이좋은 남매라는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들을 잘 아는듯한 말투에 에단은 러츠 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제가 에단 공자였어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 같습니다. 동생이 계속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특히나 오빠가 외로울까 봐 옆에 있어 주던 착한 동생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러츠 경의 달라진 말투에 에단이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네 마음을 다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동생의 결혼까지 간섭하는 건 아닌 거 같다. 이건 엄연히 성인인 동생이 결정한 일이었어.”

“…….”

“정략결혼으로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를 향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당신…….”

에단이 잠시 혼란스러운 듯 러츠 경을 보았다가 이내 입술을 꾹 다물고 단단한 눈빛을 했다. 그 달라지는 표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러츠 경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아낸 모양이네.”

“…의심은 하고 있었어. 이로얀.”

“역시 알아볼 줄 알았어. 하긴 에일린도 금방 알아내더라.”

에일린이 러츠 경을 알고 있다는 말에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기에 자신도 러츠 경이 이로얀인지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에일린은 어떻게 알아본 건지.

에단이 의아한 마음에 가만히 있자 러츠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파란 머리카락이 반동으로 물결처럼 흔들렸다.

“오랜만이야. 에단.”

러츠 경이 후련한 마음으로 에단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

홀로 독서 중인 케이트 황비의 앞으로 기사가 다가왔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기사의 말에 케이트 황비는 지금껏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놨다. 조찬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부름이라 케이트 황비는 몇 시간도 안 돼서 다시 황제를 만나러 가는 거였다.

조찬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케이트 황비를 안내하던 기사가 황제의 집무실에 도달하자 옆으로 물러났다. 시종장이 케이트 황비에게 예를 갖추고 황제에게 알리러 간 사이 기사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나직하게 속삭였다.

“알란 비하트가 계속 케이트 황비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케이트 황비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부른 황제를 향해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케이트 황비를 본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케이트 황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케이트 황비는 날아갈 듯 황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 그래도 오늘따라 유독 폐하가 생각났습니다.”

“나 역시 황비가 많이 생각났소.”

황제가 직접 케이트 황비의 앞에 잔을 내려주었다. 나머지는 옆에서 시중을 드는 자들이 움직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케이트 황비가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에반스 황자가 제법 수업을 잘 따라가고 있다지?”

“예. 황자된 도리를 다하고자 밤낮으로 열심히 하더니 정치학 교수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랍니다.”

“제법이야.”

“에반스 황자가 11살이랍니다. 발현을 앞두고 있으니 더욱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베타로 남을 가능성은 미미하기에 케이트 황비는 에반스가 알파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발현할 것을 당연하게 여기듯 말했다. 

황제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니 케이트 황비가 기쁜 듯 더욱 에반스 황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현 알파인 첫째 황자와 비교해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황제에게 알려주고자 그랬다.

“그건 그렇고…….”

황제는 케이트 황비를 부른 본론을 서서히 꺼내 들었다.

“알란 비하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꾸 황비를 들먹이더군.”

황제가 난처한 듯 눈을 내렸다가 케이트 황비를 보았다. 

“황비는 어떻게 생각하나?”

케이트 황비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곧 기분 나쁜 듯 입매를 굳혔다.

“상관도 없는 엄한 황족을 끌어들이다니 참으로 불쾌한 자입니다. 폐하, 그자에게 절 걸고넘어진 책임을 똑똑히 물어주세요.”

케이트 황비는 알란을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정말 아무 관련 없는 것인가?”

“이제껏 제게 몇 번 만남을 요청한 것이 다입니다. 만약 그것으로도 제가 관련이 있다면 제 잘못이겠지요. 절 보고자 찾아온 자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탓이에요.”

케이트 황비가 처연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황제를 향해 눈을 뜨며 제 억울함을 내비쳤다.

“마음이 약해 그자를 만나긴 했지만 이번 일은 저와 아무 상관이 없답니다. 믿어주세요.”

알란을 죽이면 더는 자신을 물고 늘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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