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에단의 제안
에일린은 예의 그 절벽에 서 있었다. 바람이 그녀의 찢긴 드레스 사이를 통과하고 머리카락을 휘날려 시야를 방해했다.
그녀의 삶이 끝났던 장소이자 새로운 시작을 맞았던 그 자리에서 에일린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에일린은 절벽에서 떨어져도 죽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기에.
‘에일린.’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에일린이 돌아보았다. 상대를 확인한 에일린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에단 오빠.’
‘죽지 마.’
에단의 말에 에일린이 제 발밑을 바라보았다. 한 걸음만 걸어가면 떨어질 수 있는 절벽이 에단이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나 보다. 언제나 상냥한 오빠는 꿈에서도 똑같았다. 에일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역시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은 오빠뿐이야.’
‘네가 죽으면 나 대신 결혼할 사람이 없잖아.’
걱정해서 죽지 말라는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놀란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에단을 바라보았다. 제 오빠가 맞는데 오빠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하고 있다.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대신이라니…….’
‘나 대신 결혼하겠다고 한 건 너잖아.’
‘그건, 어쩔 수 없었어.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 건 오빠를 위해서 그런 거야.’
‘대공비가 될 수 있단 욕심 때문이 아니었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나는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거야.’
에일린은 처음부터 권력이나 신분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 건 에일린의 행복을 지켜 주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도 간절했고 그걸 위해 움직였다.
‘그럼 이젠 대공비 그만두겠네.’
에단의 말에 에일린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1년만 버틸 생각이었잖아. 나를 살리고 부모님을 지켰으니 이제 그만두겠네’
에일린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이 원하는 답이 뭔지 알 거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대공비가 되어보니까 미련이 남아?’
‘그렇지 않아.’
‘그게 아니라면 대공을 사랑하게 되기라도 한 거야?’
에단이 태연스럽게 뱉은 말을 에일린은 넘기지 못했다. 에일린이 제 치마를 꼭 쥔 채 주춤 물러났다.
‘너는 대공을 미워했어. 그러나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대공에게 먼저 계약결혼을 제의한 거야.’
에단은 에일린이 꼭꼭 숨겨뒀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파헤쳤다.
‘설령 네 마음이 변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알잖아. 대공은 너와 약속된 시간을 바꿀 마음이 없다는 거.’
에일린은 차마 에단의 말에 그 어떤 것도 부정하지 못했다. 로이드는 지금껏 계약된 시간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패트릭에게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의 이용 가치는 충분했어. 차라리 지금 보내주면 어때?’
하지만 아직 시간이 안 됐는데.
에일린은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제 삶이 다시 시작된 절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분명 이 절벽에서 패트릭과의 인연을 정리하며 홀가분했던 거 같은데…….
“쉿.”
순간 귓가를 에워싸는 따뜻한 온기에 에일린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분명 에단은 아니었다. 누가 그런 거지?
“에일린.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자자.”
누구지.
“악몽 꾸면 내일 더 피곤할 텐데. 다들 걱정하는데 빨리 건강하게 일어나야지.”
잔소리같으면서도 다정한 음성에 에일린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절벽이 사라지고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꿈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에일린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푹 자야 몸이 낫지.”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속삭임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손길이 에일린을 다시 잠이 들도록 해 주었다.
막 잠이 들기 직전 에일린은 자신을 안은 사람의 옷을 움켜쥐었다. 귓가에 닿는 목소리, 등에 닿는 손의 온기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았다.
“가지 마요.”
제 몸을 데워주는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에일린의 어리광이 느껴지는 듯한 투정에 로이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데도 안 가.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자.”
에일린은 안심한 듯 다시 잠이 들었지만 그의 옷을 잡은 손은 여전했다. 꿈에선 벗어났지만 먹먹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붙잡고 있으니 손이 에일린의 등을 가로지르며 끌어안았다.
에일린이 로이드의 가슴에 기대고, 어느 순간 다시 잠이 들었다.
“당신이야말로 어디 갈 생각은 마. 이제 보내 줄 마음이 사라졌거든.”
로이드의 목소리는 깊게 잠이 든 에일린을 스쳐 갔다.
***
에일린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자 그녀의 곁을 맴돌던 제인이 눈물을 보였다. 에일린이 당황해서 그녀를 달래주고 나니 클로에가 찾아오고 칼릭스 원로 역시 병문안을 왔다.
“정말 괜찮아요.”
에일린이 웃으며 말하지만 누구도 나갈 생각이 없었다. 클로에는 아예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고 칼릭스 원로는 제인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계속 건넸다.
“기력이 많이 상하셨으니 좋은 재료로 식사를 꼭 챙겨드리게.”
“알겠습니다.”
“햇볕도 쐬셔야 하니 꼭 신경 쓰고.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 있도록 옆에서 세심히 봐야 해. 그리고…….”
“저는 정말 괜찮으니 그만해도 돼요.”
계속 가만히 있다간 허공의 먼지도 치우라 말할 거 같은지 에일린이 말렸다.
“숙부도 참,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클로에는 혀를 차면서도 손에서 찻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차를 다 마시기 전까지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싶더니 제인을 불러 다른 차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이리 오세요.”
클로에의 부름에 칼릭스 원로가 몇 번 더 주변을 둘러보고는 소파에 앉았다.
“새언니. 숙부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요. 새언니가 깨어날 때까지 한숨도 못 잤거든요.”
“크흠.”
칼릭스 원로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거야 클로에 아가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쪽에 서 있던 러츠 경이 끼어들며 하는 말에 칼릭스 원로가 힘을 얻은 듯 굴었다.
“그랬군.”
“당연하죠. 새언니는 대공비잖아요. 새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을 줄 모르는데 어떻게 자겠어요. 모두가 새언니를 걱정했어요.”
클로에가 태연하게 받아치고 있으니 러츠 경과 칼릭스 원로가 대꾸할 말을 못 찾았다.
에일린은 고작 일 년도 안 된 이곳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시선을 눈치챈 클로에가 말했다.
“오빠는 지금 에단 공자와 있어요.”
“에단……오빠랑요?”
“네. 새언니가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오빠가 여기 있었는데 에단 공자가 찾아왔어요.”
원래라면 자신이 눈을 떴을 때 에단이 가장 먼저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로이드에게 할 말이 있다고 가버린 게 마음에 걸렸다.
이상한 꿈을 꿔서인지 에일린은 불안한 눈빛을 띠었다.
***
“에일린이 깨어났는데 안 가 볼 겁니까.”
로이드의 물음에 에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사히 일어났으면 됐습니다. 그보다 지금 대공 전하를 뵙는 게 더 중요할 거 같네요.”
에단은 지금껏 로이드가 에일린을 찾는 내내 옆에서 지켜보았다. 에단은 로이드처럼 많은 기사를 거느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에단 스스로가 무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대신 에단은 에일린의 빈자리를 메꾸며 약이 빈틈없이 유통되도록 힘을 썼다.
에일린이 돌아와서는 안정을 취하도록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고 오늘은 로이드에게 할 말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집무실에 자리했다.
“이번 납치가 대공가의 원로였던 자가 벌인 짓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지켜주신다고 한 약속을 이렇게 빨리 이행하실 줄 몰랐습니다.”
에단이 우스갯소리처럼 예전에 둘이 나눈 이야기를 가져왔다.
에일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고 로이드에게 지켜달라고 부탁했었다. 로이드는 흔쾌히 그러겠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일린에게 일이 생겼다. 다만 그 모든 일의 원흉이 대공가의 원로였던 터라 로이드는 무거운 시선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약속을 지켰어도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에일린이 대공가에 와서 이런 일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로이드는 에일린을 지켜냈고 데려왔으니 에단은 그에게 책임을 지라는 의미로 찾아온 게 아니었다.
“얼마 전에 에일린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에일린이 고민을 하고 있더군요.”
에단이 옅은 미소와 함께 로이드와 에일린이 중화제를 서로에게 주려 씨름했던 때를 꺼내왔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대공께도 좋은 일이 되었습니까?”
“그래요.”
“다행이네요.”
에단이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제 동생을 지켜준 사람이기에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로 대공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대공 역시 에일린을 위한 일을 해 줄 수 있습니까?”
로이드는 에단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빠이기에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부탁을 할 거라 여겼다.
로이드의 긍정적인 반응에 에단이 잘됐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에일린을 놓아주십시오.”
에단은 지금 로이드에게 에일린과의 연을 끊어달라는 제안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