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후련하게
에일린의 단호하다 못해 질겁하는 거절에 패트릭이 뿌득 이를 갈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그렇게 버텨봐야 누가 손해인지 몰라?”
“네게 안긴다고 이득이 되는 건 아니야.”
패트릭과 살 때 단 한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에일린은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가족은 무사히 살아 있고 오메가가 된 후의 이번 삶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시간을 돌아온 건 후회를 남기지 말라는 건지도 몰라.’
제게 주어진 시간이 여기까지일 수도. 그렇게 생각하니 에일린은 아까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패트릭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다가오지 마.”
패트릭이 다가오자 에일린이 한 걸음 물러났다. 절벽까지 단 한 걸음도 남지 않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패트릭보다 에일린이 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죽어봐야 누가 안다고 그래. 이리 오면 살려준다고 했을 텐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했잖아.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에일린은 무슨 일인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부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눈물이 맺힌 눈을 깜박였다. 에일린은 청량하고도 은근한 향을 느끼며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살려준다니 감동한 모양이군.”
패트릭이 에일린의 마음을 읽은 듯 굴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느끼는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는 발걸음에 패트릭이 설마, 하며 바라보았다가 경악했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상대는 에일린에게 살짝 흘렸던 페로몬을 사방으로 개방했다.
“지금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패트릭이 검을 뽑아내는 것과 동시에 페로몬을 도로 갈무리한 로이드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네가 아니라 날 보고 우는 거야.”
로이드가 패트릭과 자신을 차례로 손가락질하며 친절하게 짚어줬다.
너 아니고 나.
“리하스트 대공…….”
“또 보네.”
로이드는 에일린과 절벽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패트릭에게 말을 건넸다.
“여길 어떻게 왔지?”
“친절하게 설명해 줘야 할 필요는 없지만 네 남은 인생이 불쌍해서 말해 주지. 케이트 황비를 조사했어. 그리고 네가 움직였다는 걸 알자마자 페로몬을 따라왔지.”
로이드가 제 코를 톡톡 두드렸다.
“보다시피 내가 페로몬에 좀 예민해서 말이야.”
늦지 않게 패트릭을 찾아낸 게 신이라도 난 듯 로이드는 끝없이 말을 늘어놨다.
“흥.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페로몬이라는 건 패트릭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공기 중에 흩어지지 않은 페로몬은 실처럼 얽혀있기에 누구 한 사람의 페로몬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자신만만한 눈빛을 띠었다.
“왜? 못 할 거 같나?”
로이드의 잘난 듯이 떠드는 말에 패트릭은 그의 형질을 다시금 떠올렸다. 우성 알파. 패트릭이 불가능하다고 로이드마저 안되는 건 아니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로이드가 에일린을 힐끗 돌아본 후 예의 그 미소를 지웠다. 아예 표정이 사라진 로이드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함에 패트릭이 검을 꼭 쥐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뀌면서 아까와 비교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검을 맞대지 않아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에 패트릭이 패색이 짙어지려는 걸 감췄다. 여기서 대공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죽는다.
패트릭의 시선이 에일린 쪽을 스치듯 보았다. 만약 그냥 벗어날 수 없다면 에일린을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일린이 있는 곳을 확인한 패트릭은 그녀를 이용할 수 없음을 알고 혀를 찼다.
대공이 떠드는 사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에일린이 패트릭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든 움직일 건 생각했지만 계획대로 인질로 삼으려면 대공을 지나쳐야만 했다.
“내 부인을 납치한 죗값을 치러야겠지?”
로이드는 곧장 패트릭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에일린은 두 남자의 싸움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혹시나 자신이 방해가 될까 멀리 물러날 뿐 로이드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다치면 안 되는데.”
패트릭에게 지는 것보다 로이드가 다칠까 걱정되었다. 작은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선공은 패트릭이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제게 유리하도록 끌어오기 위해 패트릭은 매섭게 검을 찔러왔다. 그것을 로이드는 옆으로 몸을 틀어내며 피하고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검술은 나쁘지 않은데 머리가 나쁜가?”
로이드의 도발과 함께 둘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공간을 울려댔다. 둘은 검을 맞대는 동시에 서로의 페로몬을 크게 일으켰다.
패트릭은 로이드와 팽팽하게 페로몬을 뿜어내며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러면서 그는 로이드의 도발에 맞서 비죽 웃었다.
“내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지 알았으면 모른 척 있어야지. 저 여자 하나 구하겠다고 황비님에게서 등을 돌리려 할 셈인가?”
“이미 내 여인을 건드린 순간 모두 끝이지. 나는 절대 에일린을 모른 척할 생각이 없거든.”
“대공가라고 해서 버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고작 황비 따위인데 못할 거 없지.”
로이드가 태연히 답하는 사이 패트릭이 숨겨놨던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황비와 척을 지든 아니든 패트릭은 상관없었다. 대신 그는 기회를 노리다 한 번에 승기를 뺏어오려고 했다.
로이드는 확연히 좁혀진 거리에서 순식간에 휘둘러지는 패트릭의 단검을 피하지 못했다.
“로이드!”
에일린이 비명을 지르며 로이드에게 달려갔다가 그의 오지 말란 손짓에 멈춰 섰다.
“크윽.”
한쪽 무릎을 꿇은 건 패트릭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를 표정으로 거친 숨을 쉬었다. 그건 에일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우.”
로이드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패트릭의 어깨에 짐을 얹듯 검을 얹었다. 패트릭이 휘둘렀던 단검은 로이드의 배를 그은 것에서 그쳤다. 반편 패트릭은 로이드가 순간적인 힘으로 방향을 돌린 검에 옆구리가 찔렸다. 패트릭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난 괜찮아.”
로이드의 대답에 에일린은 참아왔던 긴장을 내뱉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에일린, 이리 와.”
로이드는 패트릭의 목에 검을 댄 채 말했다. 그의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에 에일린이 로이드를 보았다. 분명 자신을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로이드는 에일린을 평소와는 다른 조금의 온기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
“어서.”
로이드의 재촉에 에일린이 홀린 듯 그에게 다가섰다.
“이리 와서 이 자를 똑바로 바라봐.”
로이드는 머뭇거리는 에일린의 팔을 잡아당겨 제 앞에 서게 했다. 그리고는 패트릭을 똑바로 바라볼 것을 강하게 지시했다.
에일린은 로이드의 말대로 패트릭을 보았다. 무릎을 꿇어 자신보다 낮은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불어 패트릭의 여유가 사라진 표정도.
“이런 자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을 했었지.”
로이드는 아까 에일린이 했던 말을 가져왔다.
“당신이 죽고 사는 건 이자 때문에 결정되는 게 아니야.”
로이드가 에일린의 턱에 손을 올리며 자신을 보도록 당겨왔다.
“나여야만 해. 똑바로 봐.”
로이드는 주문을 외우듯 에일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했다.
“당신을 흔드는 건 나뿐이야.”
에일린은 로이드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았다. 로이드는 설령 패트릭에게 잡히더라도 죽지 않고 버티길 바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구하러 올 수 있으니까.
에일린은 로이드가 왜 그런지 알고 나서야 맥이 풀린 듯 눈을 감았다. 자신은 제게 주어졌던 기회만을 떠올렸을 뿐 로이드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생은 끝난 게 아니었다. 에일린은 로이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패트릭을 내려다보았다.
“행복했던 시간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매일매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었어. 내가 꿈꿔왔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나는 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매일 같이 되뇌어봤어.”
“뭐라는 거야.”
에일린이 제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속 시원하게 풀어냈다. 그걸 패트릭이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전부 내 탓을 했었어. 내가 약을 개발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발현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내가 너무 늦게 발현해서.”
일찍 발현했다면 오빠가 아닌 자신이 대공비가 될 수도 있었고 약이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그렇게 불에 타 죽는 일도 없었을 거란 후회를 많이 했다. 모든 게 제 존재로 인해 벌어진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매일 나를 원망하다가 한 번쯤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었지.”
그 대상이 리하스트 대공이었다.
“그런데 아니야.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나는…….”
에일린이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패트릭이 어떻게든 반격을 해 보려다가 로이드의 검에 베이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저 누군가에게 놀아난 것뿐이야.”
에일린의 표정이 아까보다 밝아졌다. 스스로에게 상처 낼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사랑해주는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고 적당한 때에 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젠 날 위해 잘 살아 보려고 해.”
이전 삶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후회, 죄책감 등 모든 것을 흘려보낸 에일린이 후련한 미소와 함께 로이드에게 몸을 기댔다. 로이드는 단단하게 에일린의 몸을 받쳐주었다.
“다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나랑 잘 살 거지?”
로이드가 에일린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납치로 인한 사건이 나름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