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되살아난 악몽
패트릭의 저택에선 모두가 에일린을 주시하는 감시자였다. 어디를 가든 시선이 따라붙었고 심지어 저택에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외부와의 연락도 끊어지다시피 한 삶 속에서 에일린은 점점 말라만 갔다. 그러나 패트릭은 에일린이 고립되면 될수록 만족스러워했다. 에일린이 제게만 기대고 제 품 안에서만 숨 쉬기를 원했고 그만큼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러던 중 패트릭은 에일린을 데리고 별장에 갔다. 색다른 기분을 내 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제게 생긴 별장이라는 게 좋았는지 잠시 에일린을 혼자 두는 우를 범했다.
에일린은 자신을 감시하는 자가 없음을 틈타 별장에서 빠져나왔고 절벽에서 패트릭에게 붙잡히기 직전 떨어져 죽었다.
“다신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운명이라는 게 참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의 연속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완전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패트릭과는 영원히 엮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와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그의 별장에 있는 이 상황에 자꾸 마른 웃음만 나왔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모두 털어 낸 에일린이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장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니 다른 점이 보였다.
“한 번 나갔던 곳인데 두 번은 못 나갈까.”
물론 그때와 다르게 기다리고 있으면 로이드가 구하러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일린도 패트릭에게 납치될 줄 몰랐었다. 자신처럼 로이드 역시 그렇다면 마냥 그를 기다릴 순 없었다.
에일린은 방의 한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밀었다. 이곳은 별장을 관리하는 사용인이 드나드는 작은 문이었는데 다른 곳과 다 연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때도 에일린은 이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에일린을 감시하는 인원은 적었고 패트릭이 잠깐 한눈판 사이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일린은 이번에도 같은 통로로 들어가면서 누군가 마주치기 전에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곧장 창문을 열자 바람이 다량으로 들어왔다. 에일린이 창틀에 손을 대고 아래를 보았다.
별장의 한 면이 얕은 절벽에 맞게 지어지면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에일린은 곧장 창틀을 밟고 바깥에 있는 돌에 발을 내디뎠다.
“읏.”
바람이 치마며 외투를 흔드는 바람에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지만, 창틀을 부여잡고 버텨 냈다. 에일린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바위에서 미끄러지듯 발을 내밀었다.
얕은 절벽의 흙과 나뭇잎이 에일린의 몸을 아래로 추락시켰다.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속도였다. 바닥에 떨어진 그대로 두어 번 구르고 난 후에야 에일린은 눈을 뜨고 참은 숨을 내뱉었다.
“콜록콜록, 하아.”
에일린은 손목으로 기침 소리를 죽이고는 고개를 들었다. 별장의 열린 창문과 함께 펄럭이는 커튼까지 그녀가 움직인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자신이 도망간 걸 알면 패트릭이 저 흔적을 보고 따라올 것이다. 그렇기에 에일린은 힘이 빠졌던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곧 갈림길에서 멈춘 채 오르막과 내리막을 번갈아 보았다.
“위로 가면 절벽일 텐데……”
내리막으로 가자니 마차가 다니는 넓은 길이 있어 자신을 잡기 수월할 것 같았다. 에일린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그때와 같은 선택을 했다.
“잡히고 싶지 않아.”
아래로 내려가면 멀리 가지 못하고 도로 붙잡힐 것이다. 그래서 에일린은 과감히 산 위로 올라갔다.
* * *
“……도망을 쳤다고?”
“그렇습니다.”
부관의 말에 패트릭이 기가 찬 듯한 웃음을 흘렸다. 납치해 놓고 깨어날 때 제게 보고하라고 했더니 도망친 걸 보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뒤편 절벽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붙잡아 오겠습니다.”
부관이 바로 대공비가 도망친 흔적을 찾아내면서 잡아 오겠다 말했지만 무슨 일인지 패트릭이 곧장 허가를 내리지 않았다.
“도망…… 도망이라.”
패트릭은 대공비가 저지른 맹랑한 움직임에 호기심이 이는 듯 연신 같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 끌러 놓은 검집을 들었다.
“내가 직접 잡으러 가겠다.”
패트릭은 사냥하러 나가기라도 하는 듯 느긋한 움직임으로 걸어 나갔다. 대공비가 도망쳤을 때만 해도 벌을 받을까 걱정하던 부관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아 오겠습니다.”
“아니, 됐다.”
패트릭이 손을 들어 부관의 간섭을 막았다. 그러고는 바람에 실려 오는 미약한 페로몬에 집중했다. 대공비를 납치하면서 맡았던 그 달콤한 페로몬이었다. 맡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반응하고 몸이 움직이는 그 향에 패트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알아서 길을 내주고 있네.”
패트릭은 페로몬을 따라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 * *
“찾았습니다.”
“어딨지?”
“별장입니다.”
제라미 경이 달리는 말을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려 오며 로이드에게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케이트 황비 소유의 별장이 얼마 전 다른 자에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 소유자는 패트릭 카문으로 대공비가 사라진 날로부터 그 역시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별장의 위치가 아디지?”
“케일 산입니다”
로이드는 제라미 경이 타고 왔던 말의 고삐를 잡으며 단숨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장 대공가를 빠져나가니 제라미 경 역시 신속히 다른 말을 구해 로이드의 뒤를 따랐다.
* * *
에일린은 거친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구두는 이미 해질 대로 해졌고 하나는 굽이 부러지는 바람에 절뚝이며 걸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엉키는 치마를 대충 잡아 올린 채 에일린은 다른 한 손으로 나무를 짚고 올라갔다.
긴장된 몸이 가파른 산을 타고 있으니 숨을 고르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일린은 제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의식하지 못했다.
“후욱.”
타는 듯한 갈증에 에일린은 잠시 나무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온몸에 비 오듯 흐르는 땀이 여기저기 긁힌 생채기 위를 흐르니 따갑고 쓰라렸다. 그 자잘한 고통들이 합해지자 에일린의 굳게 먹었던 마음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자신이 발현했을 때 기척처럼 나타났던 그 사람. 에일린은 로이드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 준 날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잡았다.
“여기까지 와서 무너지면 안 돼.”
지금도 잡히지 않았고 고작해야 몸이 힘든 정도였다. 그러니 굳게 버텨야 했다. 그때였다.
“에일린.”
어디선가 들려오는 큰 소리에 에일린이 흠칫했다. 그녀는 꼼짝없이 덫에 걸린 듯 굳었다가 천천히 아래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빨간 머리카락, 패트릭이었다.
“벌써…….”
에일린이 패트릭을 보는 동안 그 역시 에일린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에일린은 거리가 멀었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에일린은 곧장 패트릭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패트릭은 서두를 것 없이 그녀의 페로몬을 따라왔다. 제법 멀리 갔지만 점점 진해지는 페로몬으로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그녀의 이름을 내질렀다. 그러자 확연히 짙게 풍겨 오는 페로몬에 패트릭이 고개를 들었다.
“찾았다.”
에일린 역시 자신을 발견하고 도망치는 걸 본 패트릭이 즐거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도망가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패트릭은 금발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걸 보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사냥감을 몰이하듯 패트릭은 여유롭게 에일린을 잡으러 움직였다.
“역시나 그냥 죽이긴 아깝단 말이야.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둬야겠어.”
패트릭이 혼자만의 계획에 살을 붙이며 에일린을 뒤쫓았다. 어차피 이 위로 가면 다른 길은 없다. 알아서 막다른 길로 도망치고 있는 사냥감이 귀여우니 조금 천천히 따라갔다.
패트릭은 서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에일린을 발견했다.
“이제 도망갈 데도 없네.”
절벽에 다다른 패트릭은 멈칫한 에일린을 보고 진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사냥감의 몰이가 끝났다. 이제는 간단히 휘어잡으면 될 일이었다.
“죽이지 않을 테니 얌전히 내 손을 잡는 게 어때?”
“……뭐?”
“내가 아니었으면 죽을 목숨이었어. 그러니 대공비가 아니라 내 여자로 살라는 말이야.”
평생 숨어 살아야겠지만 죽는 것보단 낫지 않나.
패트릭의 제안에 에일린이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그녀의 반응은 영락없이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패트릭이 여유롭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에일린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잘 안 들려. 그냥 와서 내 품에 안겨.”
패트릭이 두 팔을 벌려 에일린을 안을 준비를 마쳤다. 그는 에일린이 제게 안길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에일린은 패트릭에게 안기는 대신 날카롭게 말했다.
“개소리는 집어치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