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95)화 (95/120)

95화. 두 번째 탈출

에일린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찬 바닥의 냉기가 올라와 몸이 시려 왔지만 뒤로 결박당한 두 손 때문에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에일린은 눈을 감은 그대로 제 상황을 돌아보았다. 

중화제가 발표가 되고부터 에일린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케일란 제약소에서 나온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고 중화제는 그것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여기저기 알렸다. 그리고 직접 중화제의 판매를 알아보려고 제약 상점에 가던 길에 마차를 뒤흔드는 강한 충격과 함께 기억이 끊겼다. 

‘대체 누가…….’

에일린은 납치당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누가 그랬을지 짚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알란이었다. 알란은 에일린을 찾아와 제 계획을 말하며 경고를 했었다. 

형질인을 조절할 힘을 얻어 대공가를 눌러 버리겠다고 했지만, 그 희망을 에일린이 끊어 냈다. 지금 알란은 황제가 직접 꾸린 조사대의 취조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머지않아 일을 벌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분노를 제게 풀려고 이런 짓을 벌였을 수 있었다. 그 외에는 크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천천히 눈을 떴다.

가려진 커튼 사이로 햇빛 한 줄기가 들어와 어둑한 내부를 은은하게 밝혀 주었다. 확연히 앞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방이라는 건 알 수 있을 정도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에일린은 그대로 고개만 살짝 숙여 제 옷을 보았다.

흙과 먼지에 쓸려 더러워지긴 했지만 제가 입고 나온 그대로였다.

눈동자만 굴러 주변을 돌아보던 에일린은 몸을 옆으로 숙이며 허리에 힘을 줬다. 손이 묶여있어 쉽지 않았지만 무사히 상체를 일으킨 에일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어디야.”

일어났다고 보람을 느끼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린 에일린이 아까 보지 못한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단순한 방의 형태를 띠고 있어 딱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에일린은 어딘가 눈에 익는 느낌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왜 이렇게 익숙한 기분이지.”

에일린은 발이 묶여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한 발씩 세워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현기증이 돌아 휘청거렸지만 다행히 벽 가까이에 있어 넘어지진 않았다. 등을 기댄 에일린은 크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호흡을 골랐다.

진정되는 걸 느끼자마자 에일린은 천천히 벽에서 등을 뗐다. 발걸음 소리가 안 나도록 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침대와 협탁, 화장대 등을 살펴보던 에일린은 마지막으로 창가에 다가갔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기에 움직임이 한껏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커튼을 잡은 에일린은 잠깐 숨을 내쉬고 천천히 커튼을 걷었다. 얼굴 위로 드리우는 햇살에 눈이 부신 것도 잠시 에일린은 바깥의 풍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얼마간 바라보기만 하던 에일린이 힘없이 손을 떨구었다. 다시금 커튼이 내려가며 아까처럼 약간의 빛만 새어 들어왔다. 에일린은 어두워진 시야에 익숙하지 않은 듯 눈을 깜박였다.

숨통이 막힌 듯 작은 숨소리조차 사라진 공간에서 에일린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을 쳤다. 그녀는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벽에 손을 짚었다. 고개를 떨군 에일린은 곧 격한 숨을 내쉬며 제 가슴을 움켜잡았다. 

“패트릭.”

이 방을 낯설어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바깥을 보고 난 후, 이곳이 패트릭의 별장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에일린이 죽기 직전 패트릭에게 끌려왔던 그 별장이었다.

“어, 어떻게 패트릭이…… 내가 왜 여기에.”

알란이 아닌 패트릭이 자신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니고 이 별장이라니. 에일린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불안하게 떨려 왔다.

* * *

로이드가 거친 걸음으로 다가와 거세게 앞을 막아선 문을 밀어 버렸다. 안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던 기사들이 로이드를 보자마자 일렬로 나란히 섰다. 에일린을 찾기 위해 임시로 마련된 회의실에서 제라미 경이 로이드를 맞이했다. 

“대공 전하.”

“에일린이 있는 곳은 아직인가?”

“마차는 인근 산 입구에서 전복된 걸 발견했고 마마의 흔적은 산에 들어가고부터 사라졌습니다. 납치해서 산을 탄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다음은?”

“마마를 호위했던 러츠 경에게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러츠 경이 남겼을 표식을 찾아보는 중입니다.”

“그다음은?”

“거기까지입니다. 죄송합니다.”

“무능력하군.”

로이드의 차가운 일갈에도 제라미 경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러츠 경과 나갔다던 에일린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났다는 보고에 로이드가 황급히 그 자리로 가보니 부서진 마차의 잔해뿐이었다. 

에일린은 물론 러츠 경까지 사라지면서 지금 대공가는 그녀를 찾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록 이렇다 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알란 쪽은 알아보았나?”

“알란과 케일란 모두 황실 조사대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누가 데려갔는지조차 나오질 않는군.”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다. 알란이 에일린을 납치했을 거라 여기고 그를 뒤지느라 상황이 더 꼬여 버렸다. 

“대공비 마마께서 사라진 책임은 전부 제가 지겠습니다.”

“제라미 경.”

로이드가 제라미 경을 비롯해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기사들은 일제히 비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금은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다.”

로이드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에일린이 사라진 시간부터 근처를 뒤진 결과, 마차가 전복된 장소 등 지금껏 알아낸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던 로이드가 팔짱을 끼고 손을 까딱거렸다. 어디서든 단서를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일린의 행방이 더욱 묘연해진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로이드는 조급함이 치밀어 오르며 생각이 좁아지는 걸 느꼈다. 지금 누구보다 냉정해야 할 사람은 그인데도 불구하고 평정심이 계속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로이드가 다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미 질릴 때까지 보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종이를 쥔 손이 떨려 왔지만, 로이드는 어떻게든 생각해 보고자 이를 악물었다.

“……케이트.”

로이드가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껏 에일린을 찾는 데 있어 조사 범위에 넣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옆에 있던 제라미 경이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인지 싶은 생각에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케이트 황비 마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황비를 조사해 봐.”

“하지만 황비 마마는 이 일에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거기다 황족이라 조사 자체가 어려울 것입니다.”

제라미 경은 혹시나 케이트 황비를 조사한다고 들이는 시간만큼 마마의 납치 흔적이 옅어질까 걱정스럽게 말해 왔다. 제라미 경의 만류에도 로이드는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지 않았다. 

“혹시 이전에 알란과 손을 잡았던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알란이 자신의 계략에 당해 사이클이 일어났을 때 1황자 루시드를 이용하여 그를 가둔 적이 있었다. 그때 알란이 만나러 갔던 이가 바로 케이트 황비였다. 제라미 경은 로이드가 그것 때문에 황비를 조사해 보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냥 감이다.”

그 대답에 제라미 경이 잠깐 멈칫했지만 곧 그는 제 주군을 신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거든 지체하지 말고 루시드 황자에게 도움을 받도록 해.”

“알겠습니다.”

제라미 경이 묵례 후 나가자 기사들이 전부 그를 뒤따랐다. 홀로 남은 로이드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에일린이 앞에 있는 듯 손을 뻗었다. 에일린에게 닿지 않는 그의 손끝이 경직되었다. 로이드는 천천히 손을 떨구었다.

에일린이 없는 지금 그의 시간은 공허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오늘은 특별한 시간을 보낼 거야.’

에일린은 패트릭을 피해 마차의 구석에 웅크렸다. 어젯밤 그에게 시달린 몸은 마차를 가득 메우는 송곳 같은 페로몬에 쉴 새 없이 떨려 왔다.

그런 에일린의 겁에 질린 표정을 보고도 패트릭은 진한 웃음을 내보였다. 

‘어, 어디로 가는 거죠?’

패트릭이 산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떨렸지만 패트릭이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 이렇게 나와서 즐겨 줘야 색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거든.’

패트릭이 유난히 강조한 ‘색다른’에서 에일린이 드러난 제 손목을 소매 안으로 숨겼다. 무언가에 묶였던 붉은 자국은 이제 안 보였지만 에일린은 침조차 삼키지 못할 정도로 떨었다. 패트릭은 에일린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기 좋을 대로 떠들어 댔다.

‘내가 이번에 새로 선물을 받았거든.’

어느새 마차가 멈추고 에일린은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마차에서 내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패트릭의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 나왔다.

바닥에 쓸리는 흙과 나뭇가지, 마른 잎과 산 특유의 공기가 에일린을 감쌌다.

‘내 별장인데 어때?’

거대한 별장을 가리킨 패트릭이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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