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발표
수도에 원인 모를 병이 퍼져 수많은 제국민이 쓰러졌다. 귀족과 평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아 제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우연일 수 있고 소문만 퍼지던 것이 사건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황제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다.
원인 모를 발작과 각종 증상으로 인하여 전염병이 아닌지 의심했었다. 그러나 환자를 간호하는 가족이나 치료하는 의료진 누구도 병이 옮진 않았다.
대공가를 비롯해 각 가문에서 의사를 파견하고도 잡히지 않는 소란에 황제가 손을 쓰기 직전이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누군가의 치료제가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원인조차 불분명했고 사람마다 증상이 달랐는데도 치료제가 대부분의 병을 치유해줬다.
그 이름 모를 치료제로 인해 한바탕 몰아쳤던 난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에 달라붙는 먼지의 퍽퍽함을 단비가 씻겨주듯 누군가의 처치로 이루어진 치료제가 많은 자를 구해냈다.
이젠 모두 치료제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과연 누가 만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황궁 내처에서 황족의 식사가 이뤄졌다. 선두에 앉은 황제를 중심으로 황후와 세 황비나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았다.
케이트 황비는 맞은편에 앉은 루사벨라 황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첫째 황자가 알파로 발현하고 난 후 루사벨라 황후는 그 여느 때보다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마치 그의 황자가 다음 황제가 될 거라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두고 보라지.’
지금 케이트 황비는 알란에게 받은 안정제와 금으로 귀족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제 아들인 둘째 황자가 알파로 발현하는 날을 위해 케이트 황비는 멈추지 않고 물밑으로 열심히 세력을 넓힐 계획이었다.
케이트 황비가 루사벨라 황후를 신경 쓰고 있을 때 황제가 말했다.
“오늘 저녁에 발표가 날 것이오.”
“무슨 발표입니까?”
루사벨라 황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진하게 물었다. 그녀가 부드럽게 받아주자 황제는 다음 말을 쉽게 꺼냈다.
“이번에 수도에 벌어졌던 난리를 잠재운 치료제에 관한 것이오. 그것의 이름을 알리고 정식으로 판매가 이뤄지게 할 것이오.”
치료제라고 한 순간 케이트 황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이번 일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 원인 중 하나가 제가 힘을 키우려 나눠준 안정제라는 것도. 그런데 그것을 잠재운 치료제에 대한 공공연한 발표가 일어난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원인 또한 알려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케이트 황비가 지금 일궈놓은 힘의 일부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러나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치료제가 궁금하던 참인데 잘됐네요. 그런데 폐하, 혹시 그 발표가 황궁에서 이뤄지는 것입니까?”
“그렇소.”
“그 치료제를 만든 제약소가 있을 것인데 꼭 황실이 개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더군다나 그것은 이제 막 나온 약이 아닙니까. 혹시나 나중에 몰랐던 부작용이라도 일어날까 걱정입니다. 차라리 발표하지 않고 그것을 일반 약처럼 취급하는 건 어떻습니까?”
일반 약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상점과 치료소에 두고 필요할 때 쓰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만 해도 충분히 잘 될 것입니다.”
“황비의 황실에 대한 생각이 깊군.”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한 황실에서 한낱 약 하나를 발표하는 것은 폐하의 고귀한 업적에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케이트 황비가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황제는 그녀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 손길에 케이트 황비는 제 말이 먹혀들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 케이트 황비는 순간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내 생각은 다르오.”
황제는 케이트 황비에게 확신에 찬 눈빛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미 생각을 굳힌 듯 제 의견을 말하는 데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폐하.”
“내가 승인했소.”
“하지만 폐하…….”
“아무리 황실이 중요하다고 하나 모두 제국민이 있음으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제국민이 없는 나라에 황실은 없는 법이오. 그러니 한낱 약이라 해도 그들의 근심을 잠재워줬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그렇다 해도 이번 일은 아직 원인이 드러나지도 않았습니다. 혹여나 황실이 괜한 오해로 얽힐까도 걱정이 됩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이 사달을 일으킨 자들이 걱정할 일이지. 그렇지 않소?”
황제가 의견을 물어오니 케이트 황비는 차마 아니라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발표는 예정대로 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예.”
케이트 황비는 황제를 설득하려다 실패하면서 민망함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맞은편의 루사벨라 황비나 제이나, 로지에 황비가 케이트 황비를 보고 있었다.
황제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과 더불어 어딘가 찔리기라도 하는 듯 발표를 반대했다.
역시나 루사벨라 황후가 바로 기회를 물어왔다.
“혹시 아는 게 있나요?”
“있다면 이리 걱정하겠습니까. 차라리 속 시원하게 전부 밝혀지면 좋겠네요.”
“케이트 황비의 말이 맞습니다. 이리 우리 둘의 생각이 맞은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루사벨라 황후의 웃음과 함께 마무리된 대화 속에서 케이트 황비는 그녀의 웃음조차 비웃음으로 들렸다. 이제껏 루사벨라 황후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 의견을 낸 자신을 꼬집는 것이리라.
케이트 황비는 모멸감을 감추려 입술을 깨물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케이트 황비는 제 분한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눈엣가시가 따로 없더니 오늘은 제대로 날을 잡았어. 아주 제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던 꼴이 얼마나 기가 차던지.”
케이트 황비는 루사벨라 황후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댔다. 어차피 패트릭이 알아듣도록 설명할 마음도 없었다. 지를 대로 지르고 나서야 케이트 황비가 자리에 앉았다.
아까의 난리를 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의 도도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패트릭은 그제야 황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정제에 관한 흔적은 다 손봐두었습니다. 혹여나 그것의 실체가 밝혀진다 할지라도 황비 마마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구시면 될 것입니다.”
패트릭의 보고에 케이트 황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처음으로 지어지는 진실한 웃음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치료제를 발표하면서 안정제에 얽혀들어 갈까 싶었던 걱정이 전부 사라졌다.
“잘했구나.”
“감사합니다.”
“그건 이제 걱정 없다 할지라도 다른 게 거슬려.”
케이트 황비가 팔걸이에 손을 얹고는 까딱거렸다. 그냥 이 모든 게 제게 유리하지 않은 게 싫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제게 유리한 쪽으로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멀리서 무언가를 알리는 긴 종소리가 울렸다.
케이트 황비는 그 종소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태연히 기다렸다. 모든 것이 끝나면 누군가 알리러 올 것이다. 역시나 기다리고 있으니 래즐 부인이 들어왔다.
“황비마마. 방금 황실에서 하나의 발표가 났습니다.”
“말해 봐요.”
생각보다 발표가 빨랐다. 설마 황제가 배후로서 직접 관여하는 건 아닌지 싶은 의심이 들었다.
“치료제는 대공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대공비가 직접 만든 중화제이며 대공비의 이름을 딴 제약소에서 나올 것이라 합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이 케일란 제약소의 약의 부작용이라고 하면서 대공비가 만든 촉진제 역시 함께 나온다고…….”
대공비라고 하는 순간 케이트 황비와 패트릭 둘 다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케일란 제약소에 제대로 공격을 날렸다. 그들이 만든 약의 부작용을 해소하고자 나온 치료제가 중화제였고 촉진제까지 나온다면 아예 케일란 제약소를 무너뜨리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더불어 이 모든 발표는 황실에서 나온 것이니 신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대공비는 그저 책임자가 아니었나?”
케이트 황비의 혼잣말에 래즐 부인이 조심스럽게 대답을 해줬다.
“그 역시 아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대공비가 본래 그녀의 이름으로 약을 연구하고 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미 시중에 다른 약이 제법 나와 있습니다.”
“알란이 제대로 당했군.”
케이트 황비가 기가 찬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도 대공비를 이용할 생각을 했지만 적어도 연구소의 책임자이고 대공을 흔들 용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약을 만드는 대공비라… 처음부터 대공비를 경계해야 했었어. 이건 알란의 가장 큰 잘못이기도 하네.”
적어도 알란이 대공비가 약을 만들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전에 확실히 처리했을 것이었다. 케이트 황비가 혼잣말을 내뱉고 있자니 패트릭이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뭘 말이냐?”
“제가 황비 마마의 근심을 덜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녀를 없애는 게 좋겠지요.”
패트릭의 무덤덤한 대답에 케이트 황비가 그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공비를 마음에 들어 하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이리 방해된다는 이유로 없애자고 한 말이 진심인지 살펴보았다.
케이트 황비가 속을 꿰뚫어 보려고 지그시 바라보지만 패트릭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무감정한 눈빛에 케이트 황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네게 일을 맞기마. 대공비를 없애거라.”
패트릭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나섰다.
그로부터 정확히 나흘 후, 대공비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