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좋은 거
클로에는 오랜만에 연구소에서 나오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계속 건물 안에만 있었더니 공기가 다르네. 공기가 달라.”
그렇다고 연구소가 딱히 답답한 건 아니었지만 벽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컸다. 클로에가 몇 번 더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러츠 경이 물었다.
“계속 여기 있으실 겁니까? 아직 할 게 많으신 거로 아는데요.”
“그렇게 잔소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시 들어갈 거야.”
클로에가 러츠 경을 얄밉다는 듯 흘겨보았다. 자신이 매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면서 다시 들어가라고 하다니.
“생각해 보니까 러츠 경도 매일 내가 하는 걸 지켜봤으니까 어느 정도 알 것 같은데?”
클로에는 문득 러츠 경에게 관심이 미쳤다. 온종일 자신을 지킨다고 근처에 있으니 지켜본 것도 많을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 제약을 더 알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클로에가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러츠 경도 오늘부터 나한테 배워볼래? 내가 잘 가르쳐줄게.”
지금은 어린아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판국이었다. 중화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그거에만 매달리고 있을 수도 없지. 이런 상황에 러츠 경이 간단한 심부름 정도만 해줘도 참 좋겠단 생각이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물론 러츠 경이 받아들인다는 가정하에. 러츠 경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거절했다. 클로에는 치사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요즘 안 보이는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했다.
“오빠는 왜 안 보이는 거야?”
“대공 전하께서야 늘 바쁘신 분 아닙니까.”
“알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
클로에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본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러츠 경은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냥 혼자서만 일하는 게 싫은 거 아닙니까?”
러츠의 생각대로 클로에는 자기 혼자 죽을 순 없다는 듯 거침없이 걸어갔다.
***
“바빠.”
칼같이 잘라버리는 제안에 클로에가 말문이 막힌 듯 대답을 못 했다.
“누가 오빠 바쁜 거 모른대? 그래도 너무 안 왔잖아. 잠깐이라도 시간이 안 났어? 어제도 안 오고 오늘도 안 오고, 지금 연구소에 사람 부족한 거 알면서 왜 자꾸 안 와.”
얼마 전까지는 바빠서 자리에 앉을 새가 없다 할지라도 꼭 들렀던 거 같은데 그 잠깐의 발걸음마저 하지 않아 찾아왔다.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닌데. 그만 나가봐.”
로이드의 쌀쌀맞은 대꾸에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뭐가 이렇게 날카로워?”
마치 새언니와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예민했다. 클로에가 왜 그러나 생각하는 사이 로이드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서류를 들췄다. 그의 결재를 받으려 서 있는 행정관들은 저마다 굳은 얼굴로 클로에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대공의 싸늘한 분위기로 일하기가 여간 힘든 모양이었다. 클로에가 그들을 돌아보고 다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클로에가 설마, 하는 눈으로 로이드를 보았다.
“오빠 설마 새언니랑 싸웠어?”
“…….”
로이드는 클로에의 말을 무시한 채 서류를 넘겼다. 하지만 그가 막 사인할 때 멈칫한 걸 본 클로에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니 새언니와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연구소에도 안 왔던 거구나.”
“넘겨짚지 마.”
“너무 뻔하잖아.”
클로에가 언제 토라졌냐는 듯 여유롭게 소파에 가서 앉았다. 아무래도 로이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기 전에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로이드가 클로에를 귀찮은 듯 보다가 러츠 경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러츠 경이 클로에에게 다가갈 때였다.
“나 억지로 내보내면 바로 새언니한테 찾아갈 거야. 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지.”
클로에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러츠 경이 다가온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로이드에게 건넨 협박이었다. 로이드는 그런 클로에를 잠시 바라보다 행정관들을 내보냈다.
“싸우지 않았어.”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에일린의 이름으로 중화제를 내려고 했는데 거절당했지.”
“뭐?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왜? 지금 황제 폐하도 주시하고 계시잖아. 이거 이번 사건만 가라앉히고 난 후에도 엄청 팔릴 텐데?”
클로에는 바로 중화제가 가져올 이득을 따졌다. 정말 최소한으로 줄여서 생각하면 마르지 않는 금을 취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황제의 눈에도 든 중화제를 대륙이 눈여겨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슈프레로 내고 싶다고 해서.”
“응? 그러니까 새언니는 자기 이름으로 내겠다고 하고 오빠는 슈프레로 내겠다는 거고?”
“그 반대야.”
반대라고 하니 클로에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화제를 서로 가지라고 싸우고 있다니?
“그런 거로 싸우기도 하는구나. 신기하네.”
클로에는 다소 메마른 감정을 내보였다. 욕심껏 가져가서 싸우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괜한 회의적인 마음이 들었다.
“사랑싸움인가?”
“싸운 게 아니라고 했어.”
“그럼 사랑이라고만 할게.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없어?”
클로에가 대충 털어내고 로이드에게 물었다. 어쨌든 새언니와 좋은 관계로 돌아와야지만 다시 연구소에 오겠다니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네가 날 도와준다고 순순히 말하는 게 의외네.”
로이드가 클로에의 말이 재밌는지 처음으로 실금 같은 미소를 내보였다. 그건 동생이 든든하고 귀여워서 나온 거지만 정작 클로에는 비웃는 것만 같아서 투덜거렸다.
“나는 오빠는 싫지만 새언니는 좋거든. 그런데 지금 새언니도 오빠처럼 복잡할 거 아니야.”
“그래봐야 네가 뭘 할 수 있지.”
선심 쓰듯 도와준다고 했지만 로이드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말에 클로에가 로이드를 노려보았고 로이드는 무시했다. 중간에서 대화를 듣는 러츠 경은 남몰래 고개를 내저었다. 서로를 위하는 남매이긴 하지만 여전히 둘이 나누는 대화는 매끄럽지 못했다.
그때, 불편한 분위기를 밀어내듯 누군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에일린이 어색하게 문을 두드리며 제 존재를 알린 후 로이드에게 물었다.
“로이드. 혹시 바쁜가요?”
“아니.”
“그럼 저랑 같이 차 마실래요?”
로이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클로에는 완전히 무시한 채 에일린에게 갔다.
“…이래서 부부 사이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는 거구나.”
클로에는 오늘 제대로 배웠다는 듯 중얼거렸다.
***
에일린이 슬쩍 로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차를 마시자고 했지만 그녀는 연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차는 마시지 않았다. 특히나 그녀의 주위로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페로몬은 지금 에일린이 고민이 많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로이드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제 앞에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 에일린의 꽃향기와 어울리는 향긋한 차였다.
“찻잎은 제가 직접 골랐어요.”
로이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에일린이 따뜻하게 우려낸 차를 내밀었다.
“그동안 생각 많이 했어요. 당신은 절 위해 준비한 건데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미안해요.”
“그리 생각하니 다행이군. 안 그러면 서운할 뻔했어.”
로이드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벼운 불만을 내뱉었다. 이미 에일린에게 그 어떤 나쁜 감정도 품고 있진 않았지만 그간 못 본 불만에서 나온 심술이었다.
“그렇지만 저도 나름 생각해서 한 말이었어요.”
“그렇게 남에게 퍼주기만 하면 언제 당신 것을 챙길 거야.”
“제가 언제 퍼주기만 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당신 게 제 거잖아요.”
로이드가 삐딱하게 받아치자 에일린도 순간 울컥해서 내질렀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민망함을 느꼈다.
그것을 본 로이드가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어 에일린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눈 맞춤이 이뤄졌다.
“그럼 나도 당신 건가?”
“…중화제는 그럼 제가 가질게요.”
에일린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본론을 끌어왔다. 그러자 로이드는 더 장난칠 수 없다는 걸 알고 곧바로 상체를 물렸다.
“잘 생각했어.”
“대신 제 다른 약 모두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에일린은 제 욕심껏 하나를 챙기겠다는 듯 굴었다. 그러자 로이드는 그것이 기꺼운 듯 바로 받아들였다.
“모든 걸 슈프레로 이전하려면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는 게 좋겠지?”
“그전에 할 게 있어요.”
에일린의 제지에 로이드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페로몬이 조금 더 진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금부터 하는 말이 본론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부 마탑에 보낼 거에요.”
“다 보증받은 게 아닌가?”
“다시 받으려고요. 그러니까 제 약이 비형질인이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것을요.”
에일린이 자세한 설명 없이 결론만 말했음에도 로이드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약을 복용하는 대상을 늘리겠다는 건가. 그것도 형질인과 비형질인을 나누지 않고 전부를 상대로.”
“정확해요.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 역시 중화제만큼이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겠죠.”
에일린의 말대로 누구나 상관없이 먹을 수 있는 약이 나온다면 자신에게 안정제와 더불어 든든한 받침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좋은 거 하나씩 나눠 가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