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92)화 (92/120)

92화. 해결사 오빠

에일린은 지금까지 제가 만든 약을 늘어놓았다. 모두 형질인을 위한 약이었다. 

“약을 만드는 기준은 페로몬이란 말이야.”

형질을 구분하는 이유는 약이 페로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페로몬과 부딪히지 않게 약을 만들다 보면 비형질인에게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일린이 만든 건 형질인이 먹는 약이라고 해서 비형질인이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비형질인이 먹어도 상관없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약을 에일린 본인도 먹기 위해서.

실제로 알란이 몰래 먹인 촉진제를 누르는 것도 자신이 만들었던 두통약이었다. 그런 점에서 케일란 제약소에서 나온 약은 정말 위험했다. 그간 받아왔던 보고서에는 알파, 오메가만이 부작용을 겪은 게 아니었다. 비형질인도 제법 있었다. 

에일린이 약을 하나씩 들었다 내리며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에 에일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로이드일까? 싶어서 보고 있으니 문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사람은 에단이었다. 

“들어가도 되니?”

“……응.”

에일린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에단을 반겼다. 

‘나는 왜 로이드라고 생각한 거야.’

그는 지금 한창 바쁜 시간인데. 로이드가 아니라서 힘이 빠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에단이라 다행인 거 같기도 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에단은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아 아예 대공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라 왔는데 방해한 거 아니지?”

“괜찮아.”

에일린이 눈으로 반가움을 표하고는 다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일어나서 반겨올 에일린의 이상 반응에 에단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 하는데?”

“고민 중.”

“고민?”

에단이 에일린의 앞에 줄지어 놓여 있는 약을 보았다. 최근까지 에일린이 개발한 약들이었다. 

“오빠.”

에일린이 약을 차례로 매만지며 말했다.

“나 그동안 이 약 많이 먹었다?”

“…자랑이야?”

에일린의 말끝이 올라가니 에단이 좋은 일인 건가 싶어 물었다. 약을 많이 먹었다는 건 아픈 때가 많았다는 건데 뭐가 좋은 거지? 싶은데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발현하기 전에도 종종 이 약을 먹었었다고. 이거 형질인이 먹는 약이잖아.”

“아. 그렇지. 네가 만든 건 다 나를 위한 거였잖아.”

“응.”

에일린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흥미가 일기 시작한 에단이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지금껏 이 약들을 먹고 괜찮았어.”

“케일란 제약소에서 나온 약 때문에 그렇구나?”

“맞아. 어떻게 그런 약을 낼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정말 부작용이 일어날 줄 몰랐을까 싶기도 하고.”

“그건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겠네. 그저 몰랐다고 하면 끝이지.”

에단의 부정적인 의견에 에일린은 차마 아니란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들에게 진실을 들을 수 없을 거 같았다.

“특히나 이런 난리가 났는데 과연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짐작했다고 할까?”

에단이 창밖을 가리켰다. 실제 창밖의 어디를 보라는 게 아니라 멀리 있을 황궁을 말하려는 거였다.

“폐하께서도 이 일을 중히 생각하신다던데. 걸리기만 하면 단단히 책임을 물을 거야.”

에일린도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약을 보고 있자니 에단이 물었다.

“오늘은 대공 전하께선 안 보이시던데 바쁜가 봐?”

“아…….”

에일린이 어색한 대답을 흘리고 말았다. 그에 에단이 에일린의 표정을 살피니 어딘가 난감해하는 얼굴이었다. 에단이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무슨 일 있어?”

“음…… 있긴 있었지.”

“싸우기라도 한 거야?”

“꼭 싸웠다고 할 순 없는데 애매해.”

에일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로이드를 보기 불편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있으니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던 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에일린은 그제 있었던 일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로이드가 에일린의 이름으로 약을 낸다고 했던 날, 에일린은 그것을 거절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로이드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생각한 건데 그는 오히려 에일린에게 얹어주려고 했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한 후 로이드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참 애매하네.”

이야기를 들은 에단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서로를 미워해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오히려 서로를 위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거기다 싸운 건 아니지만 어색하고 또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으니 에일린이 저렇게 구는 것도 이해 갔다.

“혹시 전엔 싸운 적 없었어?”

“없었어.”

초반에 그를 오해할 때도 에일린은 그와 부딪히는 대신 어떻게든 타협을 하려고 했었다. 로이드도 에일린의 의견을 존중해준 덕분에 둘은 아예 의견이 부딪힌 채로 시간을 끈 적이 없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

“그건 대공 전하도 마찬가지고?”

“내 거니까 내 이름으로 내는 게 맞대. 하지만 내 이름은 그만한 영향력이 없는데도 상관없다고 그래.”

“하긴. 이미 중화제의 효능은 검증되었으니 내기만 하면 네 이름값은 높아질 거야.”

“그래도 이왕 있는 슈프레에서 내면 더 좋잖아.”

“참…….”

사랑싸움은 아닌 것이 묘한 느낌이었다. 남들은 가지지 못해 안달 날 것을 가지고 이러고 있으니.

에단은 지금 중화제가 얼마나 큰 여파를 미쳤는지 알고 있었다. 더욱이 중화제를 궁금해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그것은 곧 대공이든 에일린이든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오빠가 나라면 어떡할 거야?”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인 질문에 에단은 대뜸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자신이 로이드와 부부인… 상상해 보니 정말 별로였다.

“어쨌든 나라면…….”

에단이 말끝을 흐리자 에일린이 상체를 숙이며 귀를 기울였다. 오빠의 대답이 궁금한 나머지 에일린은 에단의 입술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네가 주고 싶다면 줘. 좋은 거라서 주고 싶다는 거잖아.”

“그게 뭐야. 지금 그거 때문에 문제인 거잖아.”

에일린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에단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대신 너도 좋은 거 하나 가진다고 하면 되지.”

“……나도 좋은 거?”

에일린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한 느낌에 에단의 말을 따라했다. 

“좋은 거 두 개를 만들고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가지면 되지.”

“중화제를 반으로 나눌 수도 없고 좋은 거 하나를 어디서 구하는데?”

에일린은 점점 꼬여가는 기분에 제 머리를 붙잡았다. 에단이 말하는 걸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그때 에단은 에일린의 앞에 있는 약들을 가리켰다.

“이거 비형질인이 먹어도 되는 거지?”

“그렇다니까? 지금까지 내가 먹어왔어. 효과도 있었고.”

“그럼 그렇게 팔면 안 돼?”

“……어?”

“지금까지는 형질에 상관없이 먹을 수 있는 약이 없었잖아.”

“어…… 그렇지?”

에일린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이 세상을 나누는 데 있어 남녀보다 중요시 여기는 게 페로몬의 유무였다. 에일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먹긴 하지만 형질인을 위한 약이라고 여겼으니까.

그걸 에단이 짚어온 것이다.

그제야 에일린은 에단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챘다. 형질에 상관없는 약이라면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데 이거 다 형질인을 대상으로만 파는 약으로 정해졌는데 어떡해? 마탑에서 그렇게 보증받았는데…….”

“그럼 다시 보내.”

“어?”

에단의 간단한 대답에 에일린이 그와 눈을 마주친 채 되물었다.

“그래서 이걸 비형질인이 먹어도 되는지 확인하면 되잖아. 다른 사람이 괜찮을지는 너보단 마탑이 더 잘 알려줄 거 같은데?”

“……그러네.”

지금까지 보증받은 약을 다시 마탑에 보낸 적이 없었다. 아니, 에일린이 아는 한 없었을 뿐 깊게 조사해보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 알아봐 줄까?”

알아서 에일린이 원하는 정보까지 알아 오겠다고 하니 에일린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오빠 진짜 똑똑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에일린이 눈을 반짝이며 존경하는 눈빛을 보내자 에단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집무실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귀여운 제 동생이었다.

“네가 지금껏 이 약 먹었다고 말했잖아.”

“내가 그랬지.”

에일린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생각은 알란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가 먹인 촉진제 때문에 두통약을 자주 먹게 되었고 케일란 제약소의 문제를 짚어보다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다른 문제를 해결해 보자.”

에일린이 한결 후련한 표정으로 있자니 에단이 아직 이르다는 듯 말했다.

“다른 문제?”

“지금 대공 전하랑 사이 불편하다며. 어떻게 다가갈래?”

에단의 상냥한 목소리로 짚어오는 냉정한 말에 에일린은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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