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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91)화 (91/120)

91화. 회동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치는 손길에 연구원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은 당장 자신들의 약에 부작용이 난 것보다 알란의 불똥이 그들에게 향할까 조마조마했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연구원들이 서로 눈치를 볼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에 널리 퍼진 부작용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 부작용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지만 케일란 제약소에서 나온 약 때문임을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장 알란도 그 부작용이 무엇에서 왔는지 알아채고 들이닥치지 않았다. 

“왜 아무도 말이 없나. 설마 이번 일의 원인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란이 그들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듯 한 사람씩 보았다. 그러자 알란과 눈이 마주친 자들은 동요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저마다 분분히 시선을 피했다. 알란이 신경질적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으니 맥스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약 개발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안정성 확인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이전에도 촉진제를 내지 못한 건 그만한 부작용을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하지만 촉진제가 불안정하다는 건 전부 알고…….”

“닥쳐라.”

알란의 호통에 마크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애초 대공가의 연구원으로 있을 때부터 촉진제는 각종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전부 없애지 못해 연구가 지지부진했던 것을 알란 원로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분명 촉진제를 다시 만들 기회를 줬다.”

“그건…… 죄송합니다.”

맥스 연구원이 이를 악물며 변명을 달지 않았다. 원래부터 알란은 그들에게 촉진제에 관한 연구를 계속할 기회를 준다고 했었다. 환경과 자금은 얼마든지 대줄 테니 마음껏 실험하라고. 그리고 부작용이 발생했을 시의 책임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그것을 맥스 연구원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들이 유혹에 넘어가 알란에게 온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다가가지 않을 사람이었고 더욱이 이번에 일을 수습하기 위해 어떤 짓을 할지도 몰랐다.

‘해시가 현명했어.’

그때는 촉진제도 다 엎어지고 그저 버티는 게 고작인 해시를 비웃었는데 그가 현명한 거였다. 적어도 대공은 이 모든 책임을 연구원에게 돌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뭐 하나 제대로 만든 게 없으니…….”

알란이 혀를 차며 그들을 한심하게 보았다.

“진정하세요.”

얼어붙은 분위기 사이로 케일란이 걸어들어왔다. 그는 주룩 늘어서서 고개를 숙인 연구원을 힐끔 돌아보았다. 

“부작용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저들의 편을 들어주는 게냐? 네 이름을 망치려고 작정한 자들이다.”

어느 순간부터 알란은 이 모든 것을 연구원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 빠른 변화에 연구원들은 큰일 났다는 걸 알고 케일란을 보았다. 여기서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이들에게 실력이 없다고 책임을 묻는 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저 완벽하지 않은 걸 알고도 침묵한 죄만 있을 뿐이지요.”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는 듯한 말에 연구원들이 기대했다가 이어지는 뒷말에 절망적인 감정을 내보였다. 늘 온화하고 다정했던 케일란은 결국 알란과 다름없었다.

“죄는 나중에 묻고 당장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 그렇지. 이놈들이야 나중에 손을 댄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알란의 마지막 쐐기와 다름없는 말에 연구원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들의 사정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알란이 아까 내려쳤던 테이블에 팔을 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 케일란이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연구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으라는 신호에 기사들이 입구에 섰다. 그들이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며 연구원들을 위협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알란이 입을 열었다.

“황비를 만나야겠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케일란이 앞장서자 알란은 연구원 쪽으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폭풍과 같은 시간이었다.

***

“황비에게 찾아간다고 도움을 줄 것 같습니까?”

알란이 자신만만하게 황궁으로 향하고 있으니 케일란이 의아한 듯 물었다.

“흥, 이번에도 나를 무시한다면 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전에 사이클이 왔던 자신을 나 몰라라 한 이후 황비는 그 일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알란이 그녀를 찾아갔어도 일상적인 대화만 하고 갔었기에 완전히 연이 끊어버리려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안정제를 달라는 연락을 최근에 받으며 두 사람은 다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하지만 저번처럼 아버님을 모른 체한다면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미 한 번 배신을 했다면 두 번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케일란이 여전히 미심쩍은 듯 굴고 있으니 알란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내 그럴 줄 알고 이번엔 황비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덫을 쳤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녀에게 안정제와 안정제의 수익을 전부 주었지.”

처음부터 케이트 황비가 안정제를 요구하는 이유는 그녀가 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안정제를 이용하여 제 주변인에게 나눠주면서 은근하게 세를 늘리고 있었다. 더욱이 알란이 안정제에서 나오는 수익 전부를 바치면서 케이트 황비는 이전보다 더 많은 귀족을 포섭할 수 있었다.

“그걸 전부 기록해 놨으니 이번에는 절대 날 무시 못 할 거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케일란은 더 캐묻지 않았다. 원래도 약에 관한 건 전부 알란이 처리해왔으니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화가 끊기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케일란이 다시 알란을 불렀다.

“아버지. 이번에 부작용을 잠재운 곳은 대공가가 확실합니까?”

경비대를 시작으로 하나의 약이 풀어지면서 부작용에 시달리던 자들이 전부 치료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날 한 쌍의 남녀가 경비대에 들어갔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케일란은 곧바로 대공 부부를 떠올렸다.

“그러겠지.”

알란 역시 케일란과 같은 생각이었다.

“촉진제에 관한 이해가 깊은 건 대공밖에 없잖으냐. 그가 아니면 이리 빠르게 치료약을 만들 자가 없지.”

“…만약 그 약을 대공비가 만들었다면요?”

케일란의 은근한 목소리에 알란이 불편한 시선을 들었다. 대공비라고?

“대공비가 연구소의 책임자 아닙니까. 일전에 그녀를 만나 촉진제를 낼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준비했다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말이 아닙니다.”

“자세한 거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지금이야 마탑의 보증을 받아 긴급 사용으로 어디인지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곧 나올 것이다. 알란은 그것이 슈프레일 거라 확신하면서도 신중을 기했다.

“네 말대로 대공비를 의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영악한 성격을 숨기고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어.”

알란이 무도회에서 만난 에일린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아직도 그날 자신이 먼저 물러선 게 자존심이 상했다. 

“만약 이번 치료제가 정말 대공가에서 나온 거라면 대공비를 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케일란은 대놓고 대공과 맞닥뜨리기보다 대공비를 이용한 공격 의사를 내비쳤다. 그에 알란이 괜찮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비가 맡은 연구소에서 정말 치료제가 나왔든 그게 아니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를 건드는 게 대공을 흔들기도 좋았다.

어느새 황궁 안으로 진입한 마차가 멈췄다.

케일란아 먼저 내린 후 알란이 내리니 그들의 앞으로 시녀가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이쪽입니다.”

그들과 잘 아는 사이인 듯 시녀가 자신을 따라올 것을 말했다. 그러면서 먼저 앞장서니 알란과 케일란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랐다. 

복잡한 길을 걷고 걸어 황궁의 내처와 다름없는 공간에 다다르자 시녀가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알란이 직접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황비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황비, 그리고 그녀와 같은 머리 색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알란이 남자가 누군지 살펴보게 되자 케이트 황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오세요.”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란이 빈자리를 찾아 앉게 되니 그때까지 그를 돌아보지 않았던 젊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가볍게 목인사로 알란과 케일란에게 인사를 건넸다.

“패트릭 카문입니다.”

남자가 제 이름을 말하고 나서야 알란이 그를 알아보았다. 겉으로는 사촌임을 밝혔으나 뒤로는 황비가 수족처럼 부리는 자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도움이 될까 불렀어요.”

케이트 황비가 패트릭을 부른 이유를 꺼냈다. 그러자 알란은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도 황비에게 협박을 가장한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고 그녀가 직접 움직이지 않을 거라면 대신할 자가 필요했다.

“그럼 날 보자고 한 이유를 말해 보세요.”

케이트 황비의 말에 네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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