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반격의 시작
에일린은 오랜 고민 끝에 말했다.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그건 위험해.”
로이드는 바로 거절했다. 에일린에게 이 상황을 말해 주러 오긴 했지만 그녀가 직접 가서 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에일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로이드를 보았다.
“모두가 클로에 아가씨 같은 증상을 보이진 않을 거예요.”
로이드와 에일린이 이 모든 게 케일란 제약소에서 나온 약의 부작용이라 여긴 이유는 바로 클로에 때문이었다. 클로에가 쓰러지면서 보였던 증상과 같은 것을 겪는 자들이 많았다.
에일린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하필 로이드가 문가에 버티고 서 있으니 나갈 수가 없었다. 로이드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댔다.
“정말 가야겠어?”
로이드가 재차 물었다. 그의 못마땅하다는 뉘앙스에도 에일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까이 가진 않을게요. 그런데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에일린의 설득에 로이드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공비로서의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틈만 나면 연구소에 갔다. 그 빡빡한 하루를 보내는 그녀의 고생을 알아 강하게 밀어내기 힘들었다.
“조건이 있어.”
로이드는 결국 반쯤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에일린이 반색하자 로이드의 반듯한 미간이 구겨졌다. 어떤 조건이든 상관없이 가는 것만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조건이 뭐예요?”
로이드는 대답 대신 손을 올려 그녀의 눈 아래를 가렸다.
***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자들은 우선 한 곳으로 모아두었습니다.”
한 경비병의 말에 경비대장인 한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증상이 적거나 정신이 있는 자들은 치료소로 보냈지만 갑자기 쓰러지느라 신원 파악이 안 된 자들은 치료소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의사를 파견했다. 그것으로 그들의 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늘어났다.
처음엔 한 명이었는데 다음 날 두 명이 되고 또 그다음엔 밤에 쓰러진 자들까지 해서 다섯 명이 되고.
“대체 원인이 뭐지.”
어떻게든 알아보려고 각 환자들의 상태를 적어보고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히 황제 폐하께도 따로 가서 알렸고 말이다. 그런데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것과 다르게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결국 경비대에는 때아닌 환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때 후드로 머리끝까지 가린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장내를 둘러보며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입구에서 더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을 보던 한스가 직접 나섰다.
“아무래도 오늘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이 안의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한스는 얼굴을 가렸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느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라는 느낌에 예를 갖췄다.
“잠깐 둘러보고 가겠다.”
남자의 무거운 목소리에 한스는 잠시 고민한 끝에 옆으로 비켜섰다. 혹시나 이 상황을 알고 온 거라면 어떤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가졌다.
한스의 허락에 다른 경비병 역시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덕분에 에일린은 큰 어려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일부라더군.”
로이드의 설명에 에일린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누워있는 자들은 클로에처럼 의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많은 것에 비해 조용한 분위기였다. 에일린과 같은 생각인지 로이드가 먼저 예전의 상황을 설명해줬다.
“점점 나아진 거라고 하더군. 처음엔 난리도 아니었다더군. 그나마 정신이 있고 신분이 보장된 자는 치료소에 보내고 아닌 자들은 한곳에 모으고 의사를 붙여놓으니 제법 안정된 거야.”
“그래도 이 정도까지 상황을 정리한 건 잘했네요.”
에일린은 처음 어수선한 과정을 서면으로만 보았다. 쓰러지거나 이상 증세를 보이는 자를 전부 데려오다 보니 혼란스러웠다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정도로 만든 건 누군가의 지휘가 컸다.
“저자라고 하더군.”
로이드가 한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까 자신들에게 말을 걸었던 그 남자였다.
“경비대장.”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네요. 그럼 이제 우리도 할 일을 할까요?”
에일린은 단단한 결의에 찬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를 바라보며 로이드는 팔짱을 꼈다.
며칠 전 가 보고 싶다는 말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조건을 걸었는데 에일린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로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에일린은 바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날에도 그대로 연구소에 남아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던 로이드는 오늘 출발하기 전에 알았다.
“이걸 이 사람에게 먹여봐도 될까요?”
에일린이 대공가에서 나온 의사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에 의사가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익숙한 목소리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이자가 제일 제격인 듯해서요.”
“이리 주십시오.”
의사가 극진하게 두 손을 내밀자 에일린이 가지고 온 약병을 내밀었다. 오늘 아침 마탑으로부터 보증을 받은 중화제였다.
의사의 처리가 이루어지는 동안 에일린은 환자의 상태를 보다가 또 다른 환자를 살폈다. 그 시간이 제법 흐르면서 로이드가 처음으로 에일린을 불렀다.
“이제 그만 가야지.”
“하지만…….”
에일린이 처음 중화제를 먹였던 환자를 돌아보았다. 그는 약을 먹은 지 3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반응을 지켜보고 싶었던 에일린은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로이드의 말을 따랐다.
이미 여기 나와서 환자를 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그는 많은 배려를 한 것이었다. 거기다 밖에는 에일린에게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 데려온 의사와 기사들로 진을 치고 있었다. 에일린은 로이드가 내민 손을 잡으며 아쉬움을 달래려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렸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아닌지라 입꼬리가 떨렸지만 후드를 깊게 쓰고 있어 다행이었다.
에일린이 로이드와 함께 몸을 틀 때였다.
“으음.”
누군가의 신음에 에일린이 돌아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막 움직이는 자는 에일린이 처음으로 중화제를 먹인 사람이었다. 곧바로 의사가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에일린은 로이드의 손을 잡은 채 기다렸다.
“상태가 나아졌습니다.”
의사가 놀라운 표정으로 말했고 에일린의 후드 아래로 표정이 밝아졌다.
***
에일린은 곧장 대공가로 돌아오자마자 해시를 통해 중화제를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안정제와 촉진제 둘 중 어떤 약으로 인해 부작용이 일어났는지 모를 자들이 하나둘 중화제를 먹고 상태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로이드는 옆에서 에일린을 도와주었고 에일린은 부작용의 증세를 모으면서 끊임없이 중화제를 보냈다. 어느새 에일린은 로이드의 집무실에 자리를 잡은 채 계속 현 상황을 알려주었다.
“촉진제 복용에 두통이 먼저 나타나고 이후로 몸이 견디기 힘들어서 쓰러진 경우가 가장 많네요. 그다음으로 몸이 붓거나 메스꺼움을 느끼고 출혈도 적지만 있고요.”
에일린이 보고서의 내용을 추려서 말해 주니 로이드가 제 서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가 있을 줄 알았어.”
“의외인 건 안정제까지 부작용이 있다는 거였어요. 혹시 알고 있었어요?”
에일린의 물음에 막 서류에 인장을 찍던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었다라, 로이드가 짧게 생각하고 대답했다.
“그들이 안정제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알고 있진 않았지. 그렇기에 독점권을 내가 쥘 수 있었던 거야.”
알란이 원로로 있을 때조차 정보를 다 알지 못해서 가만히 지켜봤었던 거다. 로이드가 만들어놓은 최소한의 장치가 이번에도 먹혀들었다. 에일린이 이유를 알게 되니 그렇구나 싶으면서 한숨과 함께 종이를 들고 있던 손을 다리 위로 떨구었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위급한 것을 해결하고 나니 여유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이제 이 중화제에 이름을 붙일 일만 남았네요. 이왕이면 이것도 촉진제와 같이 당신이 가져가요.”
“그건 내가 손써뒀어.”
“벌써요?”
에일린은 그가 거절해놓고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겼다. 중화제가 효과가 있고 슈프레에서 나온 것이라는 신뢰가 더해진다면 잘된 일이었다.
“그럼 이제 이것도…….”
“당신의 이름으로 낼 거야.”
로이드가 일부러 에일린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는 에일린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조용히 그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보통의 집무를 이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에일린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에일린에서 만든 두통약도 있고 진통제도 있는 걸 알아. 그 이름으로 낼 거라고.”
“하지만 그건…….”
“그리고 하나 더. 대공비의 이름이 에일린 리하스트이자 이번에 약을 낸 것까지 전부 발표할 거야.”
로이드는 에일린의 이름에 대공가라는 날개를 달아주기로 했다. 에일린이 다른 말 할 수 없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지어버린 로이드가 막 인장을 찍었던 서류를 흔들었다. 그게 에일린의 이름으로 약을 낼 서류였나 보다.
에일린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아예 제라미 경을 불러 서류를 넘겨주면서 모든 일이 끝났음을 보여 주었다.
“곧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 않아?”
로이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