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78)화 (78/120)

78화.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에일린이 제약소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을 때 로이드는 집무실에서 제라미 경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패트릭 카문. 카문 백작가의 차남입니다.”

제라미 경의 보고에 로이드가 패트릭의 신상이 적힌 종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케이트 황비의 먼 친척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멀기에?”

“남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멉니다. 하지만 패트릭이 마음에 들었는지 최근 케이트 황비가 자주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로이드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의 이름을 톡톡 두드렸다.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케이트 황비라고 하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로이드가 그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안았던 아이처럼 인상을 썼다가 곧 표정을 풀었다.

“무기를 가져갔던 자야.”

숙제를 풀어낸 듯 뿌듯함이 담긴 표정에 제라미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 사라졌던 무기. 그리고 그 무기에서 미약한 페로몬을 통해 케이트 황비와 연관이 있음을 알아냈지만 패트릭이 그랬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때 그 페로몬을 기억하십니까?”

“잊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감.”

로이드는 뻔뻔하게 대답하고는 패트릭의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왠지 그를 대충 생각해서는 안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로이드는 하나씩 진중하게 살펴본 후 말했다.

“이자를 만날 자리를 좀 찾아와.”

“직접 만나보시게요?”

“그냥 넘기기에 찝찝하거든. 그래서 직접 보고 판단하려고 해.”

“알겠습니다, 그다음은 이것입니다. 케일란 제약소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제라미 경이 또 하나의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름이 낯설지 않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 케일란이 맞습니다.”

“알란이 앞세웠나?”

“그런 듯합니다. 거기에 우리 연구원이 대거 이동했고요.”

“에일린이 많이 상심했겠네.”

아침에 봤을 때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았다는 걸 떠올린 로이드가 이것 때문이었군, 중얼댔다. 그들이 제약소에 들어간 걸 에일린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만뒀으니 생각이 많을 거라 여겼다.

“이건 전적으로 에일린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어. 일단 제약에 관한 전반적인 권한은 그녀에게 있잖아.”

제라미 경이 그렇죠, 하는 투로 반응했다.  

“에일린의 결정을 따를 거야.”

“마마께서 그냥 지켜본다고 하신다면요?”

“그러면 가만히 둬야겠지.”

겉보기엔 아내의 말을 잘 따르는 남편처럼 로이드 역시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감정을 제라미 경이 눈치채고 물었다.

“마마께서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도록 움직이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로이드가 태연한 얼굴 위로 한 줄기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내가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기억나나?”

“그건…….”

제라미 경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주군이 전쟁터에서 승리한 전략이라고 한다면 하나였다.

“전하께서 직접 움직여 지휘관을 잡았습니다만.”

“그래. 이번엔 단순히 추방으로 끝나지 않겠지. 내가 직접 그의 숨통을 휘어잡을 수 있으니까 좋은 기회잖아. 안 그래?”

에일린이 고민하는 건 안타깝지만 말이야.

***

케일란 제약소를 생각하던 에일린은 자꾸만 생각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미래에 케일란 제약소가 있었나?’

자신이 아무리 집에만 있었다 해도 단 한 번도 들려온 적이 없었다. 대체 그게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와중에 연구원들이 거기로 갔다고 하니 불안해졌다.

“왔어요?”

상념에 빠져 있던 에일린이 로이드의 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가 목까지 잠근 단추를 풀며 다가가니 에일린이 눈치껏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오늘도 많이 바빴죠?”

“나보단 당신이 더 바빴을 거 같은데?”

로이드가 손목에 달린 커프스를 푸는 동안 에일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구원이 그만둔 일이라면 조금 복잡해지긴 했어요.”

“그들이 선택한 거니 혹시나 당신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

“그래도 제가 촉진제를 다 엎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많이 방황하다가 결정한 거 같아요.”

에일린은 제 솔직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에 반대편의 커프스를 풀려던 로이드의 행동이 멈췄다. 그는 에일린의 얼굴에 진 그늘을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체를 기울였다.

“에일린.”

로이드의 부름에 에일린이 그를 보았다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놀라 흠칫했다. 

“생각 안 나게 해 줄까?”

그의 말과 함께 제 몸을 휘감아 오는 페로몬에 에일린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페로몬이 들어오며 등줄기가 바짝 떨려왔다. 

“계속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쉬어주는 게 더 좋을 수 있어.”

에일린이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며 로이드의 페로몬을 느꼈다. 그의 페로몬에 감응한 제 페로몬이 슬슬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거운 과일 향 위로 산뜻한 꽃향기가 차곡차곡 올라왔다. 에일린은 점점 달아오르는 공기 속에서 로이드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제 손을 가두고 그의 페로몬에 제 페로몬을 올렸다. 향긋하게 퍼져나가는 꽃향기에 로이드가 옅게 웃으며 제 페로몬의 양을 늘렸다. 그러자 페로몬의 향이 달라졌다. 청량감이 가득하게 올라오면서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가락을 살살 매만졌다.

에일린의 손을 잡고 제게 당기자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떠서 다가왔다. 로이드는 그대로 에일린의 허리를 감으며 눈을 맞췄다.

사이클이 아니어도 이 정도의 분위기는 에일린도 크게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이드의 페로몬에 집중하고 그와 맞닿은 부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서로 간에 깊은 관계를 보여 주고 난 후 생겨난 변화였다.

“향이 달라졌어요.”

역시나 로이드의 페로몬이 달라진 걸 느낀 에일린이 속삭였다. 그녀는 다른 손을 로이드의 어깨에 올리며 쓸어내렸다.

“계속 내 향에 집중해.”

로이드가 아까보다 진해진 페로몬을 흘리며 에일린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고개를 기울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에일린의 페로몬과 체향이 뒤섞이며 익숙한 냄새가 맡아졌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케일란 제약소에 왜 우리 연구원이 갔죠?”

“케일란은 알란의 아들이야.”

그의 간단한 대답에 에일린은 아까부터 의아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말끔히 풀림을 느꼈다.

“그러면 가서 촉진제를 만드는 거 아닌가요?”

로이드가 제 목을 가볍게 깨물자 에일린이 중간에 숨을 들이켜면서도 물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별 게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그깟 촉진제가 뭐라고 이러는지…….”

로이드의 말에서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에일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게요. 그게 뭐라고 이럴까요. 아니, 뭐가 안 되게끔 하면 되죠.”

로이드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에일린이 이상해서 고개를 내렸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 

“그렇죠? 촉진제가 꼭 필요한 사람이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잖아요. 이번 클로에 아가씨처럼요.”

“…그래.”

“그럼 그에 맞는 약을 만들면 되잖아요.”

에일린의 질문에 로이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당신의 생각이 맞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건 다 해도 좋다는 듯.

“그래,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면 되는 거지.”

“저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방금까지 그녀의 페로몬에 갇혀 미약한 흥분감이 올랐던 로이드는 완전히 식어버린 분위기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 안 나게 해 준다고 해 놓고 오히려 그녀를 더욱 불태워버렸다.

“다 내 탓이지.”

로이드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그는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

남아 있는 연구원을 전부 소집한 에일린은 먼저 그들이 그동안 회의한 결과를 물었다.

“어떤 약을 만들기로 했죠?”

“그게……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해시 연구원이 대표로 말했다. 그가 가장 열성적으로 회의에 참여했지만 무언가 대안을 내놓기까지는 역부족이었는지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희는 지금껏 촉진제를 연구해왔습니다. 이제 와서 무엇이든 새롭게 만들어내는 건 그만큼 아무 바닥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해시 연구원이 모두를 대표해서 그간 지지부진하게 나온 이유를 말했다.

에일린은 그들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며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새롭게 시작하길 바라는 제 마음에 부흥하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저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럼…….”

그래서 에일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그 촉진제를 기반으로 새로운 약을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어때요?”

“기반으로 한다고요?”

해시 연구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에일린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밤새 적어놓은 제 연구일지를 꺼냈다.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민 에일린은 아주 잠깐 기다린 후에 말했다.

“중화제를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어때요? 같이 할래요?”

이제껏 책임자로만 있었던 에일린이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