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77)화 (77/120)

77화. 제약소

집으로 돌아온 케일란은 곧장 알란을 찾아갔다. 

“아버지.”

술을 마시고 있던 알란은 케일란의 차림을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걸 보니 오늘 어딜 다녀왔는지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알란이 다시금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거기를 왜 갔느냐.”

“대공을 만나고 왔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네가 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다고 거길 갔어.”

“…아버지.”

케일란이 변명할 생각도 없는지 굳게 입을 다물었다가 알란을 불렀다. 알란이 힐끗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는데도 케일란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몇 번 달싹이던 케일란이 이내 한숨과 함께 진실을 물었다.

“대공비에게도 독을 먹였습니까?”

대공에게서 들은 말을 여러 번 곱씹었던 케일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부정하길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알란의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에 케일란은 답을 들은 듯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독이 아니다.”

“그럼…….”

알란의 부정에 케일란은 언제 절망했냐는 듯 한 줄기 기대를 품었다.

“사이클 촉진제를 먹였을 뿐이야.”

“야버지.”

어째서 클로에가 쓰러졌는지 그리고 대공비가 발현하게 되었는지 한 번에 설명되었다. 사이클 촉진제는 베타에게 독약과 다름없었다. 대공의 말대로 대공비는 단순한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로 발현할 몸이었으니 큰 탈 없이 지나간 것이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케일란이 울컥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가 어머니에게 연락을 받고 왔을 때 본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추방된 이후로 매일같이 술만 마셔대면서 급격히 추레해진 몰골이었다.

평생 근엄하고 깔끔하게 다니던 아버지라고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 모든 게 스스로 만들어낸 거라 케일란이 안타까운 듯 외쳐댔다.

“아버지께서 평생을 몸 바친 곳이잖습니까. 그런데 왜 하루아침에 쌓은 모든 걸 무너뜨리셨습니까. 왜!”

“시끄럽다.”

알란이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아버지.”

“전부 대공 잘못이다.”

“대공을 왜 끌어들입니까.”

“네가 대공을 몰라서 그래. 그놈은 내게 조금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케일란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알란의 말에 반응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란은 술잔을 마치 대공이라도 되는 듯 노려보았다.

“감히 대공 자리에 앉혀 준 은혜를 잊고 자기 멋대로 굴었어. 내 말을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했어야지.”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사람은 대공, 대공 전하입니다. 아버지께선 원로라고요.”

“그를 만든 게 나야.”

“아버지.”

“선대 대공에게 내가 정해준 혼처와 결혼시켜서 만든 우성 알파였다. 내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단 말이다!”

대공을 작품이라고 표현한 순간, 케일란은 아버지가 잘못된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케일란이 입을 다물고 있자 알란이 점점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그가 살짝 주먹 쥔 손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알아? 흥. 어림도 없지.”

“아버지, 그게 무슨…….”

“생각해둔 게 있으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알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술 때문에 일그러지는 천장에 로이드의 얼굴을 그렸다. 감히 아버지와 같은 자신을 공격한 대가는 똑똑히 치르게 할 것이다.

***

무도회에서 만난 부인들은 에일린에게 모임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었다. 에일린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면서도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어차피 자신이 대공비로 머물 시간은 정해져 있었으니 그런 모임 등에 속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시작이었다.

“스퀘어 백작 부인이 대공비 마마를 만나고자 찾아왔습니다.”

무도회가 끝난 후 약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에일린을 찾아오는 것이다.

“일단 무슨 용건인지 물어보고 오세요.”

“안 그래도 미리 여쭤보았습니다. 혹시 승마에 관심이 없냐고 하시면서 말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모임에 들어오라고 하는 게 나았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선물부터 들이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에일린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역시 무도회에서 눈에 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새언니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네요.”

에일린의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던 클로에가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무도회에 가긴 했지만 대공 부부와 따로 들어가서 철저히 방관자적인 입장으로 있었다.

무도회에 참석한 모두가 대공 부부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잘생긴 로이드는 놀랄 게 없었다. 오히려 그 옆에 오메가로 발현한 에일린을 보고 놀랐지.

“아가씨. 저는 정말 심각한데요.”

에일린이 클로에의 즐기는 듯한 표정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뭔가 이상해요. 전쟁에서 공을 세운 건 로이드인데 그 관심이 전부 내게 오는 기분이라고요.”

“새언니랑 친해지면 오빠와도 친해질 수 있다 생각하겠죠.”

에일린도 클로에와 비슷한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보게요?”

“아니요.”

에일린이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만 다음에 와달라고 말해 줘요. 약속하고 온 게 아니니까 정중히 거절하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에일린이 급히 책상을 정리하고 몇 가지 종이만 챙겼다. 

“어디 가려고요?”

“연구실이요.”

에일린이 상큼하게 웃으며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가려는 곳은 연구원이 있는 별관이었다.

촉진제가 사라진 후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어떤 약을 개발할지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형질자를 위한 것만이 아닌, 제한 없이 연구해볼 만한 것을 정하기로 했는데 그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고 있었다.

답답할 수도 있었다. 연구원들 역시 매일같이 연구해오던 모든 게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걸 정해야 하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에일린은 조급하게 굴지 않고 기다렸다.

에일린은 누군가의 아래에서 일한 적이 없기에 자유롭게 생각하며 약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왔으면 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마, 오셨습니까.”

“그래요.”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선 에일린이 연구원의 인사를 받으며 걸어갔다. 그러다 평소와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느끼며 중간에 멈춰 섰다.

“오늘따라 사람이 적어 보이네요.”

에일린이 제 자리에 앉으니 해시 연구원이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이죠?”

“그게…….”

해시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말했다.

“그만두겠다고 말한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요? 이유가 뭐죠?”

에일린은 적잖이 놀란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태연히 받아쳤다. 

‘아무래도 그들에게 고삐를 내어준 게 잘못된 걸까?’

자유롭게 만들라고 한 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방치와 다를 바 없이 느껴졌나 싶었다.

하지만 해시의 대답은 에일린의 예상을 벗어났다.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대부분 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만두고 싶다면 책임자인 내게 와서 말했어야지요. 그들을 전부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해시가 나가고 나서 에일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같이 나아가고 싶었는데 이를 어쩌지.”

에일린이 가만히 생각에 빠진 사이 해시가 데리러 간 연구원들이 속속 들어왔다. 그들은 에일린의 눈치를 보면서도 어딘가 결연한 모습이었다.

에일린의 앞으로 주룩 선 그들 중 누군가가 용기 내어 말했다.

“저희는 오늘부로 그만두려고 합니다.”

“이유가 뭐죠?”

“모두 다릅니다. 저는 당분간 쉬고 싶고 또 여기 맥스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만두는 이유를 하나씩 말하던 연구원이 마지막에 가서는 목소리의 힘을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에일린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비밀유지서약서는 기억하죠?”

에일린은 연구원들이 이곳에서 일하기 전에 썼던 서약서를 언급했다.

“그것만 지켜준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연구원이 에일린에게 뻣뻣한 인사를 하며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한쪽 구석에 서서 그들을 보고 있던 해시 연구원은 왜 말리지 않았는지 싶은 마음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냈다.

“이미 그만둘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붙잡아봐야 뭐 하겠어요.”

에일린이 해시가 궁금한 걸 대답해줬다. 그러면서 그들이 진짜 그만두는 이유가 뭘지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단체로 어딘가로 가지 않고서야…….’

에일린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섣불리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에일린의 예상은 다음 날 정확히 들어맞았다.

“케일란 제약소?”

케일란의 이름을 내세운 제약소로 대공가의 연구원들이 대거 들어갔다는 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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