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직 남은 전쟁
로이드는 에일린을 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 찾아가 말을 거는 것부터 포도주 잔을 흔들기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에일린은 오로지 남자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로이드가 에일린과 대화를 나누는 남자를 보았다.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제라미 경이 다가와서 물었다.
“누군지 아십니까?”
“알파.”
“…….”
그 외에 다른 말이 없어 제라미가 로이드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귀찮았는지 로이드가 제라미의 손에 있는 포도주 잔을 가져오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더 말씀해 주실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나머진 몰라.”
“알파인 건 어떻게 아시고요?”
“느껴지잖아.”
“아, 그렇죠. 우성 알파.”
제라미는 로이드가 가끔 알파답지 않게 구는 통에 잊고 있었다. 보통의 알파보다 페로몬을 미약하게 흘리지만, 누구보다 페로몬 감응에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제라미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거리가 꽤 멀고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콕 집어서 알 수 있는지 신기했다. 무도회에는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을 향수처럼 두른 사람들 천지인데 말이다.
“혹시 걱정되십니까?”
“뭐가?”
로이드가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되물었다.
“마마께서 알파 남자와 대화하고 있는 거 말입니다.”
에일린이 오메가로 발현하고 처음으로 나온 공식적인 자리였다. 모두가 그녀를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건 알고 있었다. 그 호기심이 담긴 시선의 물결 속에서 에일린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것도 알파의 남자에게 말이다.
그런 제라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질문에 로이드가 다시 에일린을 보았다. 앞의 남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짓기도 하고 살짝 미간을 찡그리기도 하는 걸 보아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얼굴만 본다면 제라미의 말대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로이드의 눈길이 에일린의 얼굴이 아닌 손으로 내려갔다. 살살 흔들어대는 포도주 잔의 주변으로 제 페로몬이 은근하게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에일린의 진짜 속마음은 저 손에 있는 듯하다.
“에일린을 걱정할 게 뭐 있어.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제 페로몬이 느껴질 때마다 에일린의 표정에는 미세하지만 분명한 안도감이 보였다. 그러니 상대 남자가 어떻다고 불안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별개로 남자가 신경 쓰였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봐.”
“마마를 걱정할 게 뭐 있냐고 하셨으면서…….”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 낯이 익어서 그래. 아니,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제라미는 로이드가 단순히 느낌이라 표현한 말을 흘려넘기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가지는 감이 뛰어났기에 제라미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제라미가 사라지고도 로이드는 여전히 에일린을 주시했다.
“자꾸 시선이 가는군.”
로이드가 허탈함에 혼잣말을 내뱉었다. 에일린에게 얼마든지 돌아다니라고 말했는데, 자꾸만 불안감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딱히 다른 이들보다 드레스가 화려한 것도 아니고 장신구를 많이 걸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무도회장에서 에일린이 가장 반짝인단 생각만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로이드가 제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에일린으로부터 눈을 뗐다. 살짝 아쉬움을 느끼며 상대를 확인한 로이드가 찰나에 지어진 날카로운 눈빛을 삼켰다.
알란 원로의 아들인 케일란이었다. 알란 원로를 똑 닮은 그는 정중하지만 적대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소문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셨다고요. 축하드립니다.”
“아, 경은 제국에 없었나?”
“그렇습니다.”
로이드가 잔을 빙글 돌렸다. 간략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케일란은 로이드를 향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며 알파의 페로몬을 내뿜었다.
“제 아버지의 일 역시 늦게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케일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마 추방당했음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로이드가 바로 알아듣고 대답했다.
“다신 대공가에 발을 들이지 못하다니 안타깝게 되었어.”
그 추방 명령을 내린 게 로이드 본인이면서 다른 이의 이야기를 하듯 대답하니 케일란이 이를 악물었다.
“평생을 대공가를 위해 살아온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가혹한 처사를 내리셨습니까?”
로이드는 케일란의 말을 곱씹기라도 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케일란은 공격적으로 알파 페로몬을 내보내며 원망의 말을 짓씹었다. 그 탓에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로이드는 케일란의 요동치는 페로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 페로몬을 흘리며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로이드가 입을 여는 순간 케일란이 숨이 막힌 듯 당황했다.
“클로에에게 독약을 먹인 알란 원로의 처사는 인자한가? 음? 자네의 생각을 말해 보게.”
로이드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케일란의 의견을 종용했다. 하지만 이미 로이드의 페로몬에 갇히다시피 한 케일란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분명 대공의 페로몬은 잔잔한 바다 같았는데 한순간 성난 해일을 일으킨 듯한 느낌이었다.
케일란이 그의 페로몬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리는 동안 로이드는 태연히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내 동생이 죽을 뻔했어. 대공가의 직계를 건드렸단 말이지. 아니면 인간 이하로 여기던 베타니까 죽여도 된다고 여겼던 건가?”
“그건…….”
케일란이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아버지는 클로에를 죽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만 직계에게 독약을 쓴 건 맞았다.
그렇다 해도 제 아버지 역시 오랜 시간을 대공가에 몸을 담았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날에도 대공가에 일이 생겼다고 달려 나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득했던 케일란은 인정하기 싫었다.
“가 보겠습니다.”
결국 케일란은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로이드의 페로몬이 점점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리며 케일란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다. 더는 버틸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해서 뒤로 물러났지만 로이드가 케일란을 놔두지 않았다.
“대답하고 가야지.”
로이드의 위압적인 눈빛에 케일란이 패배감이 짙은 얼굴로 대답했다.
“오해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말을 상당히 재밌게 하는군.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말해 보겠나? 내 처분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다시 알란 원로의 판결을 맡겨볼까? 귀족 재판이라도 열면 오해를 풀 수 있겠나?”
알란 원로가 한 짓을 공개해 보자는 로이드의 협박에 케일란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 아버지가 죄를 지었습니다.”
“알란 원로에 대한 내 처분은?”
“……자비로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케일란은 분함이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를 둘러싸던 페로몬이 사라지면서 막혔던 숨통이 트여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에게 인사를 받으니 더 기분이 좋군.”
맞아, 죽여도 마땅한 죄를 지었어. 로이드의 혼잣말이 케일란의 속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케일란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비통한 눈빛을 내리깔았다. 그는 감히 로이드에게 뻗어나가지 못할 비난의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실 겁니다.”
“그건 지켜봐야 아는 거고.”
로이드의 얼굴에 싸늘한 표정이 걸렸다. 케일란이 그에게서 하나 얻은 것 없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로이드가 돌연 케일란을 불렀다.
“알란 원로에게 따로 감사 인사를 하는 건 깜박했어. 덕분에 내 아내가 발현하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전해 주게. 내 아내가 오메가가 될 형질이었던 모양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클로에와 다름없이 쓰러져서 사경을 헤맸을 거야.”
격양되어 소리치지도 그렇다고 험악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차분하게 늘어놓는 별거 아닌 말에 로이드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
케일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아버지가 클로에에게만 그런 일을 벌였다고 들었다. 대공비가 얽혀 있는 줄 몰랐고 오늘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허락 없이 대공을 찾아왔다.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대공을 도발한 대가로 케일란은 온갖 자존심이 뭉개지는 상황에만 처했다. 그나마 제 자존심만 무너지면 다행이었다.
클로에가 쓰러진 것으로 추방되었지만 만약 대공비가 잘못되었다면…….
케일란은 순간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케일란이 주먹을 꾹 쥔 상태로 억지로 인사를 건네고 무도회장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로이드가 혀를 차며 잔을 들었다.
“아들에게 말하지 못했군. 애초에 떳떳하지 못한 짓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더욱이 알란 원로가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입 안이 썼다. 이대로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은 로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닐 테니 무슨 짓을 벌이겠어. 끝까지 가지 않으려 했는데, 쯧.”
어쩔 수 없다는 듯 굴면서도 로이드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올라왔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제국을 비추는 태양, 황제 폐하 오십니다.”
그때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에 로이드가 에일린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