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황실 무도회
에일린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패트릭이 부관에게 손수건을 넘겼다. 부관이 손수건을 받아들여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손수건의 주인이 따로 있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패트릭은 우연히 발견한 에일린을 유심히 살피다 다가갔었다. 눈에 띄는 외모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풍겨오는 페로몬이 달게 느껴졌다.
낯이 익은 여자였다. 그때는 검은 머리의 여자와 함께 있었던 거 같은데, 그렇다면…….
“대공비가 맞나?”
“네. 확실합니다.”
패트릭이 에일린에게 눈을 떼지 못한 사이 마차에 박힌 문양을 본 부관이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그는 예전에도 패트릭이 대공가의 여인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어서 이후로 틈틈이 정보를 모아왔다.
“하지만 머리 색이 다르던데?”
“최근에 대공비께서 발현했다고 합니다.”
“발현?”
결혼하고 난 후에 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발현하다니 신기하네.”
패트릭이 에일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진 외모가 이해 갔다. 패트릭은 에일린을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패트릭이 다시 에일린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대공비… 대공비라…….”
패트릭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대공비를 떠올리고 있자 부관이 안절부절못했다. 결혼한 여인에게 깊은 관심을 주는 게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역시나 패트릭의 입에선 부관의 불안함을 더욱 키울 만한 질문이 나왔다.
“다시 만나려면 어디에 참석해야 하지?”
“황실 무도회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대공이니 대공비 역시도 올 것입니다.”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부관이 슬쩍 패트릭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이번 황실 무도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역시나 같은 생각을 한 패트릭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도회에 참석하려면 그만한 권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는 이제 막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일렀다.
“황비 마마를 보러 가야겠다.”
저번 일로 황비의 심기가 좋진 않지만 방법이 없었다. 패트릭은 에일린을 다시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빠른 결정을 내렸다.
***
“에일린 잠깐만…….”
무도회장에 들어가기 전 로이드가 에일린을 붙잡아 세웠다. 그에 반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에일린이 의아한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네?”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로이드가 에일린의 볼에 가볍게 손등을 올렸다. 그 자연스러운 접촉에 에일린이 살짝 그의 손등에 얼굴을 기울였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긴장해서 그래요.”
무도회를 앞두고 긴장한 모습을 보이니 로이드가 금방 수긍했다. 그가 에일린의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긴장할 거 없어.”
그의 다정한 배려에 에일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무도회 때문이 아니라 패트릭을 만나고 나서부터 이런 기분인 건 말할 수 없었다.
에일린은 어젯밤까지 황실 무도회에 초대된 명단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안에 혹시나 패트릭이 있는 건 아닌지 살핀 후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패트릭은 없었지만 아직 긴장을 놓기엔 일렀다. 간혹 초대되지 않은 자들도 온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에일린은 계속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패트릭을 안 봤다면 모를까 보고 난 후라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를 평생 피하고 다닐 순 없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굴 자신도 없었다.
이래저래 고민되는 상황에서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로이드의 페로몬에 의지했다. 그걸 느낀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꼭 쥐었다.
“에일린. 당신 옆에는 내가 있을 거야. 내가 없더라도 당신이 대공비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로이드가 에일린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다정히 말했다. 페로몬으로 에일린의 마음까지 감싸주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아까의 긴장이 잦아들고 있었다.
로이드의 말을 되새기며 에일린이 편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패트릭을 다시 만나면 어떡할지 싶었던 불안감이 바뀌었다.
에일린의 시선이 황궁을 향해 돌아갔다.
“맞아요. 저는 대공비였죠.”
에일린은 로이드가 아닌 자신에게 주의시키듯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무도회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황제가 오지 않았다.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전 귀족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는 대공을 찾는 이가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에일린에게 쏠리는 관심도 만만치 않았다.
에일린을 본 적 있었다면 모두 그녀의 달라진 분위기에 놀랐고 처음 본 사람들은 여지없이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공을 세운 건 난데 왜 다들 당신만 바라보지?”
로이드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에일린에게 관심이 가는 게 질투 나는 게 아니라 제 아내를 뚫어져라 보는 알파들이 싫은 거였다.
“어디 가서는 내 아내라고 말하고 다녀.”
로이드의 당부에 에일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어디서든 로이드와 있으면 마음이 풀어졌다. 로이드가 에일린의 웃음에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웃는 것도 오늘은 좀 참아봐.”
다들 당신만 바라보잖아, 그의 칭얼거림에 에일린이 재밌다는 듯 굴다가 누군가를 발견하면서 웃음을 그쳤다.
“저 아는 사람을 봐서요.”
“인사하고 와.”
에일린은 로이드가 가라고 하는데도 걸음을 떼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살펴보는가 싶더니 포도주잔을 들었다.
“여기 당신 페로몬을 둘러줄래요?”
에일린의 요구에 로이드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면서도 순순히 잔에 페로몬을 진하게 머금어줬다. 그것을 느낀 에일린이 만족스럽게 돌아섰다.
‘피할 수 없으니까.’
에일린이 발견한 사람은 패트릭이었다. 그는 혼자 서 있었는데 누군가에 말을 걸지도 그렇다고 사근사근하게 웃고 있지도 않았다.
‘저런 사람이었지.’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이 직접 다가가지 않는 사람. 에일린은 로이드의 페로몬이 묻은 잔을 보물처럼 쥐며 그에게 다가갔다.
“다시 만나네요.”
에일린의 인사에 패트릭이 뒤를 돌아보다 멈칫했다. 그는 에일린이 먼저 말을 걸어준 게 놀란 듯하더니 이내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수건의 주인은 찾아줬나요?”
“그렇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날…….”
에일린이 가볍게 손수건을 언급하며 제가 들고 있는 잔을 흔들었다. 잔에서 그윽한 포도주 향과 로이드의 페로몬이 뒤섞여 올라왔다. 그것을 느낀 패트릭이 미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내 이름을 모르고 있었나요?”
“마마께서 가신 후 알았습니다.”
패트릭의 대답에 에일린은 잔을 보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을 마마라고 불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남남의 관계가 된 것을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누구와 함께 왔나요?”
그러자 패트릭이 갈등의 눈빛으로 에일린을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일린은 패트릭의 인간 관계를 다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바로 대답 못 할 사이가 있었나 떠올려보았다.
그때였다.
“내가 데리고 왔어요.”
“황비 마마.”
에일린이 치마를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패트릭을 데려온 사람이 케이트 황비라니 의외였다. 케이트 황비는 그 인사를 받으며 에일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케이트 황비의 시선이 에일린의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도로 올라왔다. 한참 얼굴을 바라보던 케이트 황비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늦게 발현한 건 둘째치고 예전과는 달라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알란 대공과 손을 잡았던 그녀로서는 대공과 대공비를 중심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패트릭은 내 사촌 동생이죠. 패트릭과 잘 아는 사이인가요?”
에일린은 두 사람의 관계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패트릭이 황비와 사촌이었다는 걸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어서 물어본 것뿐이지요.”
에일린이 혼란스러움을 감추려 잔을 쥐었다. 그때 멀리서 로이드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에일린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패트릭과 황비의 관계를 알게 된 것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에일린이 떠난 자리에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저 여인 때문에 무도회에 오고 싶다고 한 건가?”
패트릭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뜻이 전달되었다. 케이트 황비가 패트릭을 한심한 듯 보았다.
“너는 저 여인이 누군지 모르고 그런 부탁을 한 거였니?”
“그렇지 않습니다. 대공비인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더 불안하구나.”
케이트 황비가 코웃음 쳤다. 대공비인 걸 알고도 보고 싶다니 제 사촌 동생이 꽤 위험한 말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기라도 했나 보구나.”
“제가 더 먼저 만났으면 바로 청혼했을 것입니다.”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걸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니?”
“그 전의 모습도 본 적이 있습니다.”
패트릭의 솔직한 말에 케이트 황비가 혀를 찼다. 제법 똘똘한 줄 알았는데 저번에도 일을 망쳐놓더니 이번에도 실망스러운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을 만날 방법을 강구하고 빠른 결단력으로 자신을 찾아온 행동만은 마음에 들었다.
케이트 황비는 패트릭을 위로하고자 은근하게 말했다.
“결혼을 안 했다면 모를까 쉽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