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소소한 행복의 반전
에일린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창밖을 보았다. 그녀는 아예 창문을 활짝 열고 창틀에 손을 얹은 채 상점가에 언제 도착할지 가늠하고 있었다. 그때 말을 탄 누군가 창문 너머에 나타나 에일린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에일린이 불만스러운 듯 눈을 떠 러츠 경을 보았다.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그러다 창밖으로 떨어지실 것 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로이드가 호위 기사로 붙여놓은 러츠 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이면엔 에일린을 향한 부드러움이 깔려 있었다. 러츠에게 에일린은 어릴 때 어울리던 동생이었고 자신이 지키던 아가씨의 목숨을 살리는 데 도와준 사람이었다. 자연스레 에일린을 보는 러츠 경의 눈빛에 따스함이 어렸다. 하지만 위험한 건 위험한 거다.
“이 마차는 유독 창이 크게 났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마음만 먹으면 창문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몸을 집어넣진 않았으니 걱정 안 해도 되는데요?”
“그것만이 아닙니다만?”
러츠 경이 창문을 반쯤 닫았다. 그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에일린이 너무하다는 듯 보았지만 창문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만 두고 닫혔다.
“마마를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오메가가 되었다는 소문이 아니어도 에일린의 외모에 놀라서 돌아보는 이들이 상당했다. 러츠 경의 말을 알아들은 에일린이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얌전히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자신은 그것을 다 감안하고 나왔는데 러츠 경은 아닌가 보다. 그렇다고 자신을 지켜주려고 하니 더 고집을 피우기보단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참기로 했다.
다행히 에일린이 가고자 하는 곳은 멀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에일린은 마차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이 열리는 속도에 맞춰 나갔다. 러츠 경이 기다렸다는 듯 나온 에일린과 부딪히지 않게 옆으로 물러날 정도였다.
“고마워요.”
에일린이 가벼운 인사와 함께 땅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르륵 나열된 상가들이었다. 에일린은 상기된 눈으로 그 상가건물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사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지금 떠오르는 건 없지만 보면 사고 싶을 거 같아요.”
그냥 무작정 나왔다는 말에 러츠 경이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에일린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더 말하지 않았다.
“늘 들어만 왔던 곳인데 한 번도 와보지 못했어요.”
어릴 땐 에단과 함께 있어서, 커서는 오메가가 되어서. 그런데 지금은 오메가가 되었음에도 로이드로부터 어디든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떤 것부터 살펴보시겠습니까? 클로에 아가씨께서 자주 이용하시는 의상실이 멀지 않은 곳에 있…….”
으레 아름다운 드레스나 반짝이는 장신구가 있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었던 러츠 경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미 에일린은 갈 곳을 정한 듯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카이샨 제약입니다.”
“두통약부터 종류별로 보여줘요.”
마치 보석을 종류별로 보여달라는 듯한 요구에 직원이 당황하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매대를 훑었다.
“여기 마탑에서 나온 것부터 거래를 맺고 있는 곳의 두통약을 전부 가져왔습니다.”
에일린은 그것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이미 대부분의 약은 연구한 적이 있었기에 눈에 익었다. 그러다가 가장 끝에 있는 약을 가리켰다.
“이거요.”
“이건…….”
직원이 난감한 듯 에일린의 차림을 훑었다. 눈에 띄는 미인에다가 페로몬까지 느껴지는 게 상당한 고위 귀족이었다. 그런 귀족이 보여달라는 약이 가장 안 팔리는 것이라 난감했던 것이다.
“이건…… 잘 찾는 물건이 아니라서요. 괜찮으시다면 이것보다 마탑에서 나온 건 어떠실까요? 아니면 카세라 상단에서 나온 두통약이 효과가 확실합니다.”
직원의 안내에 에일린이 자신이 가리켰던 약을 보았다. 잘 찾는 물건이 아니라서 가장 끝에 뒀다는 걸 알았다.
‘내가 만든 약은 별론가?’
발견했을 때만 해도 반갑던 기분이 살짝 꺾였다. 에일린은 속마음을 숨기려 잠시 숨을 가다듬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저건 왜 찾지 않죠?”
“대형 상단에서 나온 게 아니어서 손님들이 잘 찾지 않으십니다. 효과도 카세라 상단에서 나온 게 더 좋으니 이걸 보시는 게 어떨까요?”
직원은 에일린이 약을 만든 사람이란 생각을 못 한 채 연신 다른 것만 추천해주었다. 에일린이 고개를 저으며 제 약을 가리켰다.
“저걸로 사죠.”
직원이 못내 아쉬운 듯 약을 포장하여 넘기자 에일린이 조금 시무룩한 눈빛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옆에서 다 지켜봤던 러츠 경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줬다.
“몸이 아플 때 찾는 약이니 아무래도 믿을만한 곳에서 사는 게 보통이지요.”
“그런가요.”
“마마께서 만든 약이라서가 아닙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믿음이 가는 곳으로 가는 거니까 그렇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클로에와 대화를 나누면서 약을 만들었던 걸 주워들은 러츠 경이 눈치껏 말해봤다. 에일린이 부정하지 않는 거로 봐서 그녀가 만든 게 맞았다.
에일린이 제가 만든 약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만들었다는 뜻으로 약에 본인의 이름을 붙였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하니 구입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러츠 경의 말이 맞아요.”
생각해 보면 왜 찾아주지 않느냐고 서운해할 게 아니었다. 약이라는 건 오묘해서 먹으면 나을 거란 믿음으로도 치료되는 경우도 있었다.
에일린이 약봉지를 끌어안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자신이 만든 약을 믿고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에일린이 가라앉았던 기분을 끌어올리며 러츠 경에게 말했다.
“그럼 다음 상점으로 가 볼까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에일린은 이후로 가고 싶은 곳은 다 드나들며 사고 싶은 걸 마음대로 사들였다. 나중엔 러츠 경이 따로 기사를 불러 물건들을 대공가에 먼저 두도록 시켰다.
***
“재미있으셨습니까?”
상점이란 상점을 에일린은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힘차게 돌아다녔다. 이제 대공가에 갔던 마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분수를 구경하기로 한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한이 없을 정도로 재밌었어요.”
세상에 많은 물건이 있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건 생각보다 머리 아픈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들이 즐거웠다. 항상 꿈에서나 바라던 일을 해보니 힘든 줄도 몰랐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변을 살피던 러츠 경이 무슨 일인지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며 말하자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안 갈 테니 걱정 말아요.”
러츠 경이 에일린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벗어났다. 금방 대공가의 기사가 올 것이고,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개방된 공간에서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며.
혼자 남게 된 에일린은 다시 분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는 계속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간혹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걸 알면서도 에일린은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원하는 대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일이 기대되었다. 내일은 어떤 걸 할지 생각하는 동안 누군가 에일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이 손수건을 떨어뜨리셨습니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자 에일린이 순간적으로 옆을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왜 여기에…….’
패트릭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에일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패트릭이 내미는 손수건을 에일린은 받아들 생각도 못 하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 것, 제 것이 아니에요.”
당황해서 목소리가 튄 것 때문에 에일린이 목을 가다듬으며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에일린은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패트릭을 외면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것도 손수건을 구기는 것도 전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럴 정도로 에일린은 패트릭을 만난 충격에 동요하고 말았다.
“괜찮으시다면 이름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에일린은 패트릭이 가지 않고 말을 거니 입술을 살그머니 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어떤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무시하고 있는데 패트릭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에 몸이 경직되었다.
자신을 강압적으로 누르던 그 페로몬이었다. 에일린이 다급히 손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마마.”
그러다 가문의 기사가 다가오니 에일린이 바로 일어나 거리를 벌렸다. 패트릭 쪽은 돌아보지 않은 채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에일린이 마차에 타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이마를 훔치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의 페로몬은 이미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해 몇 번이나 제 팔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여기서 마주치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의 만남 때문인지 더욱 심장이 진정되질 못했다. 에일린은 정말 패트릭이 맞는지 슬쩍 창문을 곁눈질했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 보이는 익숙한 얼굴은 패트릭이 맞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패트릭의 눈앞에서 절벽에 떨어졌을 때가 떠오르며 공포감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에일린이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커튼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