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제 정말 마음 놓고
클로에가 눈을 뜨자마자 의사가 불려오고 하녀들이 바삐 돌아다녔다. 다행히 몸속에 남은 독이 없다는 진단을 받자마자 클로에는 갑갑하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누워만 있었던 게 아주 실감 나네요.”
클로에가 기지개를 켜며 엄살을 부렸다. 오래 잠을 잤더니 몸이 굳었다며 클로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몸을 푸는 걸 에일린이 한쪽에 앉아 지켜보았다. 조금 전, 로이드가 클로에에게 준비되면 나오라 말하고 갔다. 그것을 에일린이 지켜보는 것이다.
“오빠가 온 걸 보니, 전쟁은 끝났다는 거네요.”
옷을 갈아입으려 클로에가 팔을 벌린 채 고개만 에일린을 향해 살짝 틀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쓰러져 있던 사이 발생한 일들을 유추하고 있었다. 에일린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가 클로에의 등에 달린 끈을 잡아당겨서 매듭을 지었다.
“아가씨가 호수로 놀러 갈 걸 알고 바로 거기로 왔었어요.”
“그리고 새언니랑 만났고요?”
에일린이 작은 미소로 대신했다. 클로에가 매년 이맘때 호수를 간다는 걸 로이드가 흘려넘겼다면 에일린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발현통을 겪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의 페로몬을 맡은 알파가 나타났을 수도 있고.
정말 기적처럼 맞아떨어진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클로에가 거울을 빤히 보며 흘리는 소리에 에일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던 클로에와 눈이 마주쳤다.
“진짜 엄청 많이 달라졌네요?”
클로에가 에일린에게 눈을 떼지 못하며 감탄했다.
“그냥 예뻐진 정도가 아니잖아요. 새언니 등에 날개 달린 거 아니죠?”
클로에의 호들갑에 시중을 들던 하녀 역시 에일린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대공비의 하녀들이 그렇게 넋을 놓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제가 많이 예뻐지긴 했어요.”
에일린이 순순히 인정하며 손가락에 제 턱을 가볍게 올렸다. 그 작은 몸짓조차도 우아하고도 신비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나오니 클로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에단 공자를 봤을 때만큼이나 충격받았어요.”
“그 오빠의 동생이잖아요.”
“오메가가 되면 성격도 변해요?”
너무 뻔뻔해진 거 같은데? 그건 우리 오빠 닮았네요, 클로에의 우스갯소리에 에일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클로에가 눈을 뜨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은 자신대로 끔찍한 발현통에서 벗어났고 모두가 무사하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미래, 그녀가 겪었던 지옥과도 같은 나날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알고 있어서 더욱 지금의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에일린이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잔잔한 미소를 남기자 그걸 본 클로에의 눈이 가늘어졌다.
“새언니 엄청 기분 좋아 보이네요. 내가 깨어나서 그런 거라기엔 너무 좋아하는데요?”
에일린이 제 볼을 감싸며 웃음을 지워보려 하는데 쉽지 않았다.
“아가씨가 깨어나서 그래요.”
“그래요? 흐음. 아닌데.”
클로에가 음흉하게 웃었다. 클로에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건 로이드가 에일린의 몸에 자연스럽게 얹고 있던 손이었다. 거기다 에일린은 로이드의 손이 닿아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둘의 사이가 변한 게 틀림없다. 클로에가 모른 척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늦지 않게 눈 떠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정말 재밌는 걸 다 놓칠 뻔했잖아.’
클로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앞으로의 일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로이드가 전쟁을 끝내고 왔으니 연회는 열릴 거고 많은 이들이 당연히 대공 부부를 주목할 것이다.
‘둘이 사이좋으면 된 거지.’
겉으로 화목한 사이가 되는 건 어떻게든 티가 나는 법이다. 그런데 정말 사이가 좋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무장한 두 사람이라면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
로이드의 집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에일린은 다양한 페로몬을 맡았다. 그전엔 느끼지 못했던 페로몬의 결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흘러나왔다.
페로몬이라는 건 온전히 가릴 수 없는 고유의 흔적이었다. 완전히 가둘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모두가 향수처럼 페로몬을 인식해왔다.
에일린은 그중 하나의 페로몬을 따라갔다. 분명 잘 느껴지지 않는 가장 미약한 페로몬이었다. 페로몬의 주인이 워낙 제 흔적을 나타내는 걸 싫어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에일린은 그 소량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제가 가장 익숙하게 받아들여서가 아닐까?
집무실 앞에 선 에일린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페로몬이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득 에일린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로몬이 계속 달라져.”
로이드의 페로몬은 조금 특별했다. 페로몬은 고유의 색과 같으나 그에게 맡아지는 건 조금씩 달랐다. 가장 기본은 무겁게 깔린 과일향과 비슷하지만 히트가 왔을 때 맡아지던 그의 페로몬은 청량함이 강했다.
달칵, 안에서 문이 열리는 동시에 제라미 경이 놀란 눈으로 에일린을 보았다. 우연히 문을 열었는데 에일린이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제라미 경은 다른 말을 했다.
“정말이네, 대공 전하께서 마마가 왔다고 하셔서 못 믿었는데… 신기하네요.”
“내가 온 줄 알고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제라미 경이 들어가라며 옆으로 비켰다. 안에 들어선 에일린은 로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놀랐어?”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에일린이 마주 웃으며 들어갔다.
“제 페로몬을 맡은 거죠?”
“역시 바로 맞출 줄 알았어.”
에일린 역시 로이드의 페로몬을 느끼듯이 그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았다. 생각보다 둘의 페로몬이 깊게 결합이 된 듯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와서 앉아 봐.”
로이드가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리고 에일린에게 줄 서류를 준비하는 듯 앞의 종이 더미 몇 가지를 쏙쏙 골라냈다.
에일린이 자리에 앉으니 로이드가 하나가 된 종이 뭉치를 넘기며 말했다.
“보고 나서 이야기하지.”
로이드가 천천히 보라는 듯 에일린의 앞에 새로 내린 차도 밀어주었다. 에일린은 천천히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황실에서 있을 연회와 참석하는 자들의 간단한 정보가 담긴 내용이었다.
“내가 직접 초대할 자들을 추린 명단이야. 이번 무도회는 내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어질 거거든.”
“그럼 전 이 명단에 있는 이름만 기억하면 될까요?”
“명단에 없는 이가 올 수도 있어. 초대받은 이가 데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니 그럴 땐 당당하게 그들이 누군지 물어봐도 될 거야.”
에일린이 알겠다는 듯 명단에서 눈을 떼더니 이내 다른 일정을 살펴보았다.
“가야 할 곳이 많네요.”
에일린이 보면서 느낀 점을 말했다.
“황실 무도회를 일주일간 하는 건 괜찮은데 바로 이어지는 만찬까지 참석하려면 한동안 대공가에 발도 못 붙이겠어요.”
“하나라도 부담되면 말해. 빼줄게.”
“그럴만한 자리가 없네요.”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공의 공을 치하하고 축하하는 자리인데 쉽게 빠질 곳이 하나 없었다.
“괜찮겠어?”
에일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괜찮을까요?”
빈말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죽는소리에 로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
에일린이 울렁거리는 마음을 차를 마시는 척 감췄다. 이상했다.
“든든하네요.”
로이드는 언제나 한결같이 말해줬다. 그게 에일린에게 어떤 마음을 주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게 있잖아.”
로이드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에일린은 바로 제 머리를 넘겼다.
“제가 오메가가 된 거 말이죠?”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네. 맞아.”
에일린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구혼이 끊임없이 들어왔었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부모님은 에단 오빠처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고 말이다.
‘오메가가 되었는데 불안하지 않은 건가?’
오메가가 된 후 에일린의 삶은 자유롭지 않았다. 알파가 있는 공간엔 절대 들어가지 못했고 혼자서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건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였기에 혹시나 로이드도 그렇게 생각할까 싶었다.
에일린이 말이 없어진 사이 로이드 역시 생각에 잠기며 둘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건 로이드였다.
“연회에 가기 전에 마음껏 돌아다녀. 나중엔 어디 놀러 가고 싶어도 못 갈 테니까.”
“……마음껏 다니라고요?”
“그래.”
“제가 오메가로 발현한 것도 막 밝혀도 돼요?”
“안 될 게 있나?”
로이드가 종이에 적힌 날짜를 가리켰다.
“다만 시간이 많지 않아. 내일모레는 황궁으로 들어가야 해.”
“그 정도면 충분해요. 저 진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죠?”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불안해지려고 하는데?”
“오메가가 되고 나서 더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어요.”
이제 정말 마음 놓고 즐겨도 된다고 생각하니 하고 싶은 것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에일린이 신난다는 듯 외치자 로이드가 살짝 후회하는 듯 보더니 곧 웃음 지었다. 놀러 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아이처럼 에일린이 기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올게요.”
로이드가 손을 뻗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에일린은 이미 집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저렇게 신날 일인가?”
이전부터 하지 말라고 한 게 없는데 말이야.
로이드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의 입가에도 에일린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뭘 할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