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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71)화 (71/120)

71화. 달라진 시선

알란 원로의 일이 지나간 후 에일린은 클로에를 찾아왔다. 위급한 상황은 넘어갔지만 아직 눈을 못 뜬 클로에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아가씨, 지금 눈뜨지 않으면 좋은 구경 다 놓칠걸요.”

에일린이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저 오메가로 발현했어요. 다들 제 이야기로 얼마나 떠들어대고 있는지 몰라요.”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대공가로 돌아올 때 에일린은 알란 원로를 속이려고 로이드에게 안겨 왔다. 정신을 잃은 척하는 거지만 그 와중에 머리 색이 바뀐 걸 보여 주지 않으려고 외투로 꽁꽁 감쌌다. 그랬더니 에일린이 죽었단 소문이 돌았다. 

일부의 입에만 오르내리긴 했지만 그것을 들은 에일린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쓰러진 것처럼 굴긴 했는데 아예 죽은 것으로 되어버리다니. 

“제인도 그렇고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다 절 보고 기겁했다니까요?”

침대에 앉아 있는데 방으로 들어오던 제인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었다. 에일린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내 제인이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러대자 뒤따라오던 하녀들도 마찬가지로 소리를 치는 바람에 얼마나 난리였는지 몰랐다. 에일린은 자신의 손을 잡고 눈물 바람으로 재잘거리던 제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제인이 말하길 자신들은 돌아가신 대공비를 깨끗하게 씻겨야 하는 줄 알았단다. 그런데 막상 들어오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대공비와 눈이 마주쳐서 놀랐다는 거다.

그렇게 소란이 대공저를 한 번 휩쓸고 간 후 에일린이 알란 원로의 앞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말이 돌기 시작했다. 제 달라진 모습, 그리고 이전엔 풍기지 않았던 페로몬까지. 발현했음을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긴 제가 생각해도 저 좀 많이 예뻐졌어요.”

에일린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다가 슬쩍 손등으로 달아오른 볼을 감췄다. 실은 클로에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지 자기가 예뻐졌다는 말을 대놓고 하기가 민망했다.

“이 정도면 에단 오빠 동생이라고 할만하다니까요? 예전엔 오빠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젠 안 그럴 거 같아요.”

에단에게 생각이 미치자 에일린이 다시금 달라진 운명을 느꼈다. 예전엔 오빠가 죽고 나서 발현했는데 이번엔 오빠에게 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클로에가 눈을 뜨는 게 우선이었다. 에일린은 그녀의 마른 입가를 젖은 수건으로 톡톡 눌러주었다.

“아가씨 혼자 베타라고 서운해하지 말고요. 저는 아가씨가 베타라서 좋아하던 게 아니었어요.”

에일린이 클로에의 흰 볼에 어지럽게 붙은 머리카락을 조금씩 떼어냈다. 

“처음엔 같은 베타인 게 우리가 친해진 가장 큰 이유이긴 했어요. 아가씨는 모임에 나갈 때 조심해야 할 걸 알려주고 전 든든한 아군을 얻은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이후에 형질과 상관없이 잘 지냈죠? 그러니 아가씨…….”

에일린이 이불 속에서 클로에의 손을 꺼냈다.

“어서 일어나요. 일어나서 같이 차도 마시고 소풍도 가고 놀러 가요.”

“에일린.”

말하는데 갑작스레 들린 로이드의 목소리에 에일린이 고개를 돌렸다. 로이드가 에일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며 클로에를 살폈다. 에일린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안 일어났어요.”

“곧 깨어날 거야.”

“그래야죠.”

에일린도 그러길 바랐다. 독을 빨리 빼낸 덕분에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워지지 않는 불안감에 에일린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클로에 아가씨에게 저 발현했다고 말하는 중이었어요.”

클로에가 들을 수 있다는 듯 에일린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혹시나 눈을 떴을 때 저보고 놀랄까 봐요.”

로이드도 제인이 놀란 걸 봤기에 금방 이해하긴 했지만 다른 반응을 예상했다.

“별로 바뀐 게 없어서 놀라지도 않을 거야.”

“로이드. 전부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요?”

다들 에일린의 외양이 바뀐 걸 떠들어대고 그 이유를 추측하는 데 바빴다. 대공가가 전부 자신의 이야기로 들썩이는데 로이드만 태연했다.

“그거야 당신이 늦게 발현해서 그렇지. 별로 바뀌지 않았어. 늘 예뻐.”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말에 에일린이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늘 예쁘다고 말하는 로이드의 표정이 낯간지러운 말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니 듣는 에일린이 더 민망했다.

“혹시나 그런 말 다른 사람한테도 할 건 아니죠?”

“왜?”

“하지 말아요. 알았죠?”

너무도 뻔뻔하게 구는 모습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눈에 훤히 보였다. 에일린이 미리 로이드의 말을 단속하려고 들면서 두 번 세 번 강조했다. 그에 로이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라미 경에게 말했지만 그거야 에일린이 말하지 말라고 하기 전이니까.

로이드가 다시 클로에에게 시선을 보내자 에일린이 미심쩍은 듯 바라보면서도 더 말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됐겠지 하는 마음으로 에일린 역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오늘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가능하다면 아가씨가 눈을 뜨기 전까지 계속 있고 싶어요.” 

“클로에를 보살펴줄 사람은 많아.”

“알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누가 보면 당신 동생인 줄 알겠어.”

내 동생인데, 로이드의 기가 찬 듯한 어투에 에일린은 웃으며 답했다.

“당신도 걱정하는 만큼 내가 더 옆에 붙어서 살펴줄게요.”

“……에일린.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지 마.”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손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냥 무심결에 침대에 손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클로에의 손끝에 닿아 있었다. 로이드 역시 티 내지 않지만 제 동생이 걱정되는 것이다. 에일린이 그의 속을 들여다본 게 아니라 그가 속을 내보여주고 있었다.

로이드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에일린을 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워낙 나한테 많은 걸 뺏겨서 유독 마음이 쓰였어.”

로이드는 에일린에게 제 속을 들킨 만큼 대놓고 클로에의 손가락을 살짝 어루만졌다.

“대공가라는 허울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보란 듯이 산 것처럼 보이지만 외롭게 컸어. 우성 알파의 동생이라는 말만 들으며 관심을 받지 못했지.”

평범한 오빠를 가지지 못해 그늘 속에서 자란 클로에의 사정을 로이드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클로에에게 다가가지 못했어. 나와 같이 있어 봐야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니까.”

자신과 함께 있어 봐야 클로에에게 가는 관심이 줄어들 뿐이었다. 우성 알파와 그 동생이라고 비치는 게 싫어서 로이드는 의식적으로 클로에와 거리를 벌려 왔다.

“그런데 지금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클로에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던 게 다 부질없었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옆에 끼고 내 동생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다니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에일린은 두 사람의 입장이 다 이해가 가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 클로에는 우성 알파라며 오빠를 미워하는 대신 밖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갔고 로이드는 클로에를 위해 자신을 절제했다.

그 남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쓸데없는 말만 했네.”

“그렇지 않아요.”

에일린이 고개를 저으며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제게 할 말이 뭐예요?”

“황궁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릴 거야. 전쟁이 끝났으니 황제가 직접 축하의 의미로 주관할 거고 당신은 나와 함께 가겠지.”

로이드가 클로에를 눈짓했다.

“클로에도 일어난다면 같이 데려가고.”

별로 내키지 않지만 눈만 뜨면 데려가 주겠다는 듯한 말투에 에일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까지는 속 깊은 오빠였다가 지금은 툴툴거리는 오빠와 다름없었다.

그때였다. 

로이드의 표정이 굳어지며 클로에의 손을 향해 눈을 내렸다. 그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에일린도 클로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 작은 차이를 발견한 에일린이 놀라서 제 입을 가렸다.

“빨리 연회에 나가야겠네요.”

클로에가 눈을 감은 채로 속삭였다.

“새언니가 엄청 예쁜 거 모두에게 보여 주고 자랑할래요. 그리고 우성 알파의 하나뿐인 동생이 나라고 말하고 다녀야겠어요.”

“설마 진짜 그럴 건 아니지? 네 나이를 생각해.”

로이드는 클로에가 깨어난 걸 가장 먼저 받아들이며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뭐 어때.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오빠 동생인 건 변함없잖아.”

“그러든가.”

로이드가 마음대로 하라며 인정하는 말투에 클로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는 모습에 에일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가씨…….”

클로에가 눈을 몇 번 가물거리더니 에일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에일린은 격한 감정이 올라와 울음을 터트렸다. 

“연회에 다녀오면…… 우리 다시 소풍 가요.”

상냥한 말에 클로에가 에일린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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