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70)화 (70/120)

70화. 오메가가 된 대공비

에일린은 알란 원로가 끌려 나가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제 부모님을 죽이고 가문을 무너뜨린 원흉이었다. 심지어 시간을 돌아온 지금도 자신과 클로에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굴던 자였다. 그 죗값을 치러야 하는 걸 알면서도 왠지 시원하지 않았다.

“부족해서 그래? 지금이라도 죽일까?”

로이드가 뒤에서 에일린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알란 원로가 평생을 지켜온 걸 빼앗았지만 그것도 에일린에겐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으니 한 말이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에일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알란 원로가 원망스럽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여야 풀릴 마음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아직 의식이 없는 지금 오히려 자기보다 로이드가 더 알란 원로에게 감정이 깊을 것이다. 그런 로이드가 결정한 처분이었다. 에일린은 그 처분엔 아무 불만이 없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이 복잡했다. 알란 원로를 치웠으니 부모님이 무사하다는 생각을 하면 기뻐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공허함이 마음을 휘감았다. 자신을 지탱해왔던 한 축이 무너진 것 같았다. 가족을 지키려고 애써왔던 시간을 보상받았다기보다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 더 맞았다.

그에게 미래에 제 부모님을 죽인 죄를 물을 수 없으니 온전히 마음이 풀리진 않았다. 하지만 이건 남에겐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끌어안고 가야 할 마음이었다. 알란 원로는 몰아냈다 할지라도 부모님을 잃었던 그때의 감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냥 마음이 복잡해요.”

에일린이 이유는 숨긴 채 제 상태만 설명했다. 그러자 로이드의 페로몬이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그의 페로몬이 구원이 되었던 기억 때문인지 에일린이 눈을 감고 그의 향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거뿐이네.”

그래도 당신이 페로몬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에일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의 말대로 페로몬이 제 몸을 감싸면서 느껴지는 안도감이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손끝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머리카락 한 올마저 매만져주는 듯 세심했다.

자신의 사정은 모르면서 다 위로해 주겠다는 듯 느껴지는 페로몬에 에일린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면 충분해요.”

로이드의 배려에 에일린은 꽤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

***

대공가가 발칵 뒤집혔다. 쓰러진 줄 알았던 대공비가 실은 멀쩡히 눈을 뜨고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알란 원로가 추방되었다. 알란 원로가 지은 죄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원로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는 건 놀랍지 않았지만 클레어 아가씨가 당한 불의의 사고를 주도한 건 충격이었다.

알란 원로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큼이나 그들의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대공비의 달라진 모습이었다.

“분명 대공비 마마가 맞으신데 머리 색이 반짝이는 금발이었어.”

“난 우연히 가까이서 봤는데 눈동자 색도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예쁘셨어.”

“대공비 마마의 시중을 드는 애들이 얼마나 호들갑을 떠는지 몰라. 시중을 들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게 된다고 했다니까?”

“설마 그 정도야?”

“나도 봤는데 세상 그렇게 아름다우신 분은 처음이야.”

그들은 대공비의 달라진 외양은 물론 바뀐 분위기를 두고 떠들어댔다. 처음에 그녀가 올 때만 해도 에단 공자의 동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모습이었다. 특히나 화려한 공작새와 같은 대공의 옆에 있으니 더욱 눈에 띄지 않았는데 지금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덕분에 가장 신난 건 대공비를 모시는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은 매일같이 제 주인을 가까이서 볼 수 있으니 잠시도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했다.

그들이 대공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하나였다.

“신비로워지셨어. 그렇지 않아?”

“대체 대공비 마마의 모습이 왜 그렇게 변했지?”

“이유는 하나뿐이지.”

누군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지 무겁게 분위기를 잡다가 말했다.

“발현.”

“……뭐?”

“발현이라니 무슨 소리야. 형질이 바뀔 나이는 이미 지났는데 어떻게 발현을 해.”

다들 못 믿겠다는 듯 굴었다. 그도 그럴 게 형질이 나타나는 시기는 2차 성징과 함께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공비 마마는 이미 2차 성징이 다 지난 성인 여성이기에 시기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발현을 말한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공비 마마에게서 페로몬이 느껴졌어.”

“정말?”

“그래.”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건 알파, 오메가뿐이기에 그들은 알파인 남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니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듯 턱을 들었다.

“내 아내의 페로몬을 느꼈어?”

누군가의 질문에 남자가 팔짱을 끼고 손을 흔들었다.

“발현한 지 얼마 안 되면 페로몬이 완전히 감춰지지 않는 법이거든. 꽃향기가 나던데…….”

말하면서도 이상함을 느낀 남자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로이드가 불만스러운 듯 남자를 보고 있었다.

“대공 전하.”

남자가 예를 취하지만 로이드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손을 흔들었다.

“더 말해 보지?”

“그…… 죄송합니다.”

“내 아내의 페로몬은 꽃향기가 맞지. 제대로 맡았네.”

로이드의 평온한 말투와 다르게 심기 불편한 페로몬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으니 남자가 찔끔해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전하. 가셔야 합니다.”

그때 구원처럼 제라미 경이 끼어들었다. 로이드는 잠시 남자를 더 바라보다 대충 손을 휘저었다. 그 신호를 기민하게 알아챈 남자가 황급히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내 아내에게 관심이 너무 많아.”

“뒤늦은 발현이 신기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뻐서 그런 거겠지.”

“물론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긴 하십니다.”

“원래 예뻤어. 지금도 예뻐서 보는 건데 누가 들으면 갑자기 예뻐진 줄 알겠어.”

제라미 경이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예쁘긴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원래부터 예쁘다고 말하는 상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왠지 속이 울렁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 질투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왜? 내 말이 틀렸어? 경도 눈이 있으니 잘 알 텐데?”

“예. 원래부터 아름다우셨지요.”

“맞아. 객관적으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로이드의 뻔뻔한 말투에 제라미는 더 말하기를 포기했다. 그저 빨리 대공비에게 가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이번에 황궁에 가면 언제 오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대공가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밀리긴 했지만 로이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냈다. 곧 종전선언과 함께 공치사가 이뤄질 것이다. 더욱이 제국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부터 로이드가 받을 전리품까지 따져본다면 한동안 황궁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제라미 경이 뿌듯한 얼굴로 말하지만 그것을 듣는 로이드는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좋으면 나 대신 축하받아올래?”

“전하께서 축하받으시는 게 좋아서 그런 것입니다. 전하께서 없는 자리는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라미 경이 능청스럽게 말을 바꿨다. 그는 혹시나 로이드가 황궁에 가지 않을까 봐 그리 말하면서 뒤늦게 대공비를 찾는 척 고개를 돌렸다.

“어서 대공비께도 말해야 할 텐데요. 그렇죠?”

그러려고 대공비를 찾아가는 것이지 않냐며 제라미 경이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앞장섰다.

방으로 돌아온 로이드는 에일린이 보이지 않자 아직 닫히지 않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제프 경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클로에 아가씨를 보러 가셨습니다.”

로이드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나 혼자 갈 테니 준비나 해둬.”

로이드의 지시에 제라미 경이 따라오던 중간에 멈춰 섰다. 그는 멀어지는 로이드를 향해 가볍게 예를 취하고 사라졌다. 짧지만 폭풍 같이 몰아쳤던 시간 끝에 혼자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우성 알파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를 위태로운 인생이었다. 대공이 되었다 해도 알란 원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뒤흔들었다. 그의 수많은 위협을 버텨내려고 아등바등했던 시간은 알란 원로를 내쫓으며 보상받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정말 그 일이 벌어지고 난 후 로이드에게 남은 건 허무함이었다.

그가 잡아당기는 힘에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던 순간이 끝이 났을 때 순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잠깐이었다. 함께 알란 대공을 몰아내 주었던 누군가의 존재가 로이드의 마음에 깊게 박혔다. 알란 원로가 나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뒷모습이 눈에 박혔다.

그 작은 몸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로이드는 새로운 목표를 잡았다.

품 안에 있는 이 여인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릿속에 맴돌던 한 여자의 뒷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로이드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에일린.”

로이드의 부름에 한 여자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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