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68)화 (68/120)

68화. 덫

문책실로 들어선 알란 원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하나의 의자를 둘러싸고 한층 높게 설계된 단과 그 위로 딱 맞춰 올라간 아치형 책상은 알란 원로의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그로 인해 책상의 뒤편에 자리한 대공 역시 앉아 있음에도 알란 원로보다 높은 시선에 자리했다.

한창 전쟁터에 있어야 할 대공이었다. 알란 원로도 일부러 그가 없는 동안 일을 벌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문책을 연다고 하니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었다.

‘그래봐야 내가 한 일인지 모르겠지.’

클로에가 쓰러졌고 대공비 역시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이니 이 자리를 연 것일 테지만 알란 원로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촉진제는 제크가 썼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절대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알란 원로가 가만히 서 있자니 로버트 원로가 그를 불렀다. 대공의 바로 옆자리를 가리키는 것이 알란 원로의 자리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알란 원로가 자리에 앉으며 대공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다 들었습니다. 전쟁은 끝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곧 종전선언이 날 것입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자리를 왜 마련한 겁니까?”

“그건 보면 알 것입니다.”

로이드가 쉽게 가르쳐줄 듯 굴지 않으니 알란 원로가 로버트를 보았다. 그러나 그도 모르는지 작게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들여라.”

로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알란 원로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대체 누구의 죄를 물으려고…….

“흐음.”

알란 원로가 나직한 소리를 흘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자의 얼굴이 너무나 눈에 익은 탓이었다.

“원로님.”

기사들에게 끌려와 의자에 앉혀진 남자는 아까까지만 해도 제 앞에서 겁을 집어먹던 보좌관이었다. 보좌관을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알란 원로를 돌아보았다.

“대공, 제 보좌관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끌고 왔습니까.”

“그것은 지켜보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저자 역시 원로에게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더군요. 그래서 따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로이드가 알란 원로와 보좌관 사이의 관계를 끊었다. 그의 보좌관을 끌고 왔을지언정 알란 원로와 조금도 얽히지 않았다고 해버리니 더 끼어들기 애매해졌다. 알란 원로가 볼살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저를 왜 여기로…… 저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보좌관은 겁에 질려있지만 최대한 긴장을 누른 채 로이드를 보았다.

“모르간이 맞나?”

“제 이름이 맞습니다만…….”

보좌관, 모르간이 잔뜩 주눅이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로 부른 건 책임을 묻기 위함이다.”

책임이라는 말에 모르간이 저도 모르게 알란 원로를 힐끗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게 뭔지 모르지만 제 행동은 모두 지시로 이루어졌다. 알란 원로가 모르간의 시선을 모른 척 로이드를 주시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알란 원로와 다르게 다른 이들은 모르간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짙은 호기심을 담은 채 바라보았다.

“안정제의 남용에 관한 책임을 묻고자 하는데 인정하나?”

“뭐?”

알란 원로가 황당한 듯 혼잣말을 내뱉었고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들 모두 알란 원로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로에에게 독살이라도 했나 싶어서 보고 있었는데 안정제의 남용이라니?

“제가 안정제를 남용했단 말입니까?”

“삼 개월 전 안정제를 가져갔다고 하더군.”

모르간이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는가 싶더니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어느 시기를 말하는지 금방 떠오른 것이다. 알란 원로에게 갑자기 사이클이 찾아왔고 자신은 그의 지시를 받아 안정제를 가져간 일이 있었다.

모르간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원로님께 갑작스레 사이클이 일어나 안정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만 가져갔을 뿐인데 제가 무슨 남용을 했단 말입니까.”

자신은 지시대로 안정제 하나만을 챙겼는데 이상하게 오해를 하는 듯해 억울함을 내비쳤다. 심지어 모르간은 베타였기에 안정제를 먹을 필요가 없었다.

“내 것이라는 게 문제지. 허락 없이 가져갔으니까.”

“……그건.”

모르간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은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지금껏 안정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생산했다는 걸 알 테지. 하나만 없어져도 쉽게 눈에 띄는데 왜 그리 대범한 짓을 벌였지?”

가만히 듣고 있던 모르간이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로이드와 알란 원로를 보았다. 그건 알란 원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자신이 안정제를 몇 번 가져갔을 때에는 아무 말 안 하더니 이제 와 모르간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것은 제가 썼습니다.”

“저는 허락 없이 손댄 것에 대한 책임만 물을 뿐입니다.”

그래서 모르간이 원로의 사이클에 썼다고 할 때도 그걸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알란 원로는 로이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순순히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문득 스친 생각에 알란 원로가 비소를 지었다.

“가문의 법도가 무너지면 안 될 일이니 제 보좌관 역시 죄를 물어 마땅하지요.”

알란 원로의 대답에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그리고 제 억울함을 덜어주길 기대했던 모르간은 처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대공 전하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이겠습니까. 안정제의 판매권을 가진 건 대공비 마마인데 말이지요.”

그 전에 대공비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대공이 제 입으로 직접 안정제의 독점 판매를 넘겼다. 그때는 눈앞에서 거대한 이득을 베타 여성에게 넘겨주어 화가 치밀었는데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이야.

알란 원로의 얼굴에 사라졌던 여유가 서서히 올라왔다.

“그러니 대공비 마마에게 물어보시지요. 분명 허락을 받고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고 모르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대공비는 알란 원로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언제 죽을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허락을 받았단 거짓말을 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대공비 마마를 불러주십시오.”

“감히 대공비를 오라 가라 하는군.”

로이드가 불쾌한 시선으로 모르간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모르간이 움찔하며 알란 원로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대공비 마마에게 정확하게 상황을 알아보시지요. 공정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로이드가 알란 원로를 지그시 바라보다 대공비를 데려올 것을 명했다. 그 당당한 지시에 알란 원로는 대공비가 쓰러진 게 거짓말이었나 싶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대공비가 아닌 그녀의 시중을 드는 고용인이었다. 제인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잠깐 주춤했다가 이내 손에 든 것을 꼭 쥐며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비 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제인이 대공을 향해 든 걸 내밀었다. 제라미 경이 그것을 받아들여 로이드의 앞에 내려놓았다. 로이드가 그것을 받아 펼쳐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란 원로에게 조언을 구했다더니 이거였군요.”

그에 알란 원로가 로이드가 들고 있던 종이에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는데 자신이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든 탓이었다.

“원로에게 예약제에 관한 조언을 들은 뒤 보좌관, 연구원들과 논의하여 상세한 계획을 적었더군요. 현 가문에 있는 안정제의 개수와 함께 어떻게 이용할지 적혀 있습니다.”

로이드가 종이를 보란 듯이 앞에 내려놓으며 모르간을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즉, 대공비에게 허락을 받았단 네 말이 거짓이라는 뜻이고.”

“그, 그런.”

모르간이 보이는 안쓰러운 모습에도 로이드는 가차 없이 죗값을 결정했다.

“안정제를 가져간 것과 함께 거짓된 말로 현혹시키려는 죄는 1년간의 노역으로 갚겠다.”

“노역 말입니까?”

모르간이 충격적인 말을 들은 듯 온몸을 굳혔다. 보좌관으로 살아온 자신이 한순간 노예처럼 혹사를 당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르간은 절망스러운 얼굴로 알란 원로를 보았다.

알란 원로가 종이를 노려보더니 모르간에게 무언의 압박을 넣었다. 더는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에 모르간이 무의식적으로 제 가슴을 꼭 휘어잡았다. 심부름으로 안정제를 가져온 죗값이 그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비록 1년이지만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직 안 끝났어. 다음으로 지은 죗값도 치러야지.”

제 달라진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모르간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로이드는 아까보다 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모르간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별관의 관리인을 살해, 그 시체를 유기한 것과 감히 클로에를 독살하려던 죄가 남았다.”

모르간의 흔들리는 시선이 로이드의 옆으로 향했다. 안정제를 가져간 것으로 1년의 노역을 받았다. 그렇다면 관리인을 살해했다는 죗값은 무엇일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벌이지도 않은 누명이 그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려 하고 있었다. 모르간의 입술이 부들 떨리더니 이내 단조로우면서도 제 마음을 대변하는 감정을 내보였다.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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