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67)화 (67/120)

67화. 내 아내인 건 변함없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발현으로 인해 잊고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목숨이 넘어갈 듯 위험한 지경이었는데 왜 잊고 있었을까. 에일린이 로이드를 올려다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클로에 아가씨는 괜찮나요?”

“괜찮아. 아직 의식은 차리지 못하고 있다지만.”

로이드는 제 동생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 맺힌 살기는 클로에를 건든 자에게 향해 있었다.

에일린이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가족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로이드는 자신 때문에 클로에를 보러 가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에일린이 제 목에 맨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세심하게 챙겨주는 데 반해 자신은 발현에 정신이 나가 클로에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에일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의외의 칭찬을 건네왔다.

“러츠 경에게 들었어. 상황 파악이 빨랐던데?”

에일린이 무슨 말인가 해서 생각했다가 곧 클로에를 말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숨이 너무 약했어요. 그래서 마차로 가기엔 늦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게 아니었다면 러츠 경은 혹시나 무리가 갈까 말을 탈 생각을 못 했을 거야.”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호수에 와서 차를 마신 것밖에 한 게 없는데…….”

“촉진제.”

로이드가 에일린의 답답한 속을 정리해 주려는 듯 답했다. 에일린의 어? 하고 놀란 얼굴을 본 로이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설마 그 폐기된 촉진제요?”

“그래.”

“어떻게 그런…….”

그건 아예 베타를 죽이려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에일린이 서서히 올라오는 분노를 느끼는 동안 로이드가 아까처럼 에일린의 머리카락을 만져왔다. 이번엔 그녀를 칭찬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순전히 바뀐 머리 색이 신기해서 만져보는 거였다.

“차에 들어 있었다더군. 그리고 그 차를 나눠 먹었다면서?”

로이드의 물음에 에일린이 눈을 내려 제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발현한 이유도 촉진제에 있었다. 클로에처럼 베타였다면 독약을 먹은 듯 쓰러졌겠지만 그러지 않은 대신 오메가가 된 시기가 당겨진 것이다.

“저는 몸속에 페로몬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렇듯 발현을 한 거고요.”

“한 사람이라도 멀쩡해서 다행이야.”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클로에와 다르게 에일린은 오메가가 된 것 외에 전부 멀쩡했다. 오히려 로이드가 풀어준 덕분에 개운하기까지 했다.

“범인은…….”

차마 그 이름을 먼저 언급하지 못한 에일린 대신 로이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만 대공가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기자 에일린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매년 이맘때에 클로에가 호수에 놀러 오는 건 대공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

로이드의 설명에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슷한 말을 클로에에게 들었었다.

“그러니 일을 벌이기도 쉬웠을 거야.”

로이드가 미리 지시했는지 따로 명령 없이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삼 일 전 로이드의 품에서 사라졌던 대공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갈색 위에 금빛이 뿌려져 완전히 금발이 된 머리카락과, 금안처럼 보이는 눈동자와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페로몬이 합해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제라미 경마저 에일린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로이드가 그를 언짢게 바라보았다. 이에 제라미가 힐끗 놀라서 사라지자 로이드가 설명을 이어갔다.

“나 역시 클로에가 호수에 올 걸 알기에 일부러 연락을 안 하고 몰래 찾아온 거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다가 정작 내가 더 놀라고 말았지만.”

그의 말에 에일린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긴 말도 없이 나타나서 아내를 놀라게 해 주려는데 베타인 아내가 오메가가 되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준비된 마차에 올라탄 에일린이 맞은편에 앉은 로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오메가가 된 거 괜찮아요?”

베타라서 선택했다고 했으니 이제 로이드의 머리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할 것이다. 자기도 베타일 때 그와 헤어질 생각이었기에 지금부터 다시 계획을 짜야만 했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특히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진한 페로몬에 감응한 그의 페로몬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에일린도 초조해져만 갔다. 로이드라면 자신이 발현했다고 갑자기 밀어내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알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자신의 형질이 바뀐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페로몬 향이 좋네.”

“……그게 다예요?”

“응.”

“저 얼굴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원했던 베타 아내가 사라졌단 말이에요.”

로이드의 대답이 너무 싱거워서 참다못해 에일린이 나섰다. 자신도 오메가가 되면서 더 예뻐진 걸 아는데 왜 이 남자는 그걸 말하지 않을까?

“하나도 안 달라졌어. 그냥 색이 좀 달라진 거밖에 없잖아. 그리고 여기 있잖아.”

로이드가 더 이상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 아내는 베타가 아니라 에일린이야.”

“에일린이기도 하지만 베타였죠.”

“내 아내인 건 변함없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로이드는 더 말할 게 없다는 듯 딱 잘랐다. 에일린이 발현해서 가장 많이 놀라야 할 사람이 그인데 가장 태연하게 굴고 있었다.

서서히 마차가 출발하자 에일린이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속마음을 감추려고 하는데 눈치 없는 제 페로몬이 자꾸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의 두근거리는 마음만큼이나 설레는 향이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에일린은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자신이 발현한 걸 물었을 때도 태연하기만 하던 그가 심각하게 미간을 굳히고 있었다.

“내 아내가 베타였다는 게 다시 중요해졌어.”

로이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

대공가가 발칵 뒤집혔다.

전쟁터에 나갔던 대공이 기별도 없이 돌아온 것이다. 더욱이 클로에와 함께 나갔다가 실종된 대공비와 함께 말이다.

알란 원로가 찻잔을 기울이며 안에 든 차를 응시했다. 클로에가 선물로 받았다고 좋아하던 그 카멜리 차였다. 촉진제에 담갔다 빼서 말린 제시아는 넣지 않았다. 알란이 잔 속을 들여다보며 보좌관에게 물었다.

“대공비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의사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옆에서 보조하던 이의 말로는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클로에 아가씨는 바로 진단을 받고 처치해서 괜찮지만 대공비는 워낙 늦게 발견한 탓에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러겠지.”

그러라고 먹인 거니까.

알란 원로의 미소가 막 입가에 댄 잔 뒤로 사라졌다.

“그래서 찻잎은 함부로 섞지 않는 거야. 이렇게 본연의 향을 즐겨야지 괜한 걸 섞어서는…… 쯧.”

알란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듣던 보좌관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로님.”

“뭔가.”

자신이 질문할 때 외에는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걸 상당히 불쾌해하는 알란이 보좌관을 마땅찮게 보았다.

“이번 일이 너무 커진 건 아닐까요? 한 사람도 아니고 두 분의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고 더욱이 전쟁터에 있어야 할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지?”

“대공비와 클로에 아가씨를 독살한 걸 만일이라도 대공 전하가 알게 된다면…….”

“시끄럽다.”

“죄, 죄송합니다.”

보좌관이 고개를 숙였다.

알란의 살기 어린 눈빛에 보좌관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얼마 전 한 남자의 시체를 치운 게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자의 입장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없다.”

알란이 살기를 거두었다. 당장 저치를 대신할 이가 없으니 그를 죽이는 것은 뒤로 미뤘다.

“대공비가 그렇게 된 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야.”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알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보좌관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이제껏 군소리 없이 일을 처리하던 자였지만 요새 들어 제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많았다. 황궁에 갔을 때도 일 처리 하나 하지 못한 무능력함이나 이렇듯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아하니 곧 쳐내야 할 것 같았다.

알란의 속이 들여다보이기라도 하는지 보좌관이 고개를 들었다가 찔끔한 듯 눈을 내렸다. 그는 서늘한 기분에 몇 번이나 목을 쓸어내리며 도망가고 싶은 걸 꾹 참아내야만 했다. 그때였다. 밖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알란 원로가 문을 바라보며 소리치자 보좌관이 눈치껏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제라미 경이 알란 원로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지금 당장 문책실로 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알란 원로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제라미 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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