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65)화 (65/120)

65화. 사이클

다글다글 끓어오르는 뱃속의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밭은 숨을 내뱉는 에일린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디든 혼자 있을 곳으로 숨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상태를 눈치채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오메가의 사이클은 주변의 알파를 끌어들이려는 게 강해서 짙은 페로몬이 퍼져나갈 것이다. 당장 페로몬을 감추지 못할 거라면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장소에 있어야 했다.

사이클로 인해 나타날 작열통을 생각할 여력 따위 없었다. 에일린은 당장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고 일어났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더운 숨과 함께 에일린의 시선이 연신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창고를 발견한 에일린은 눈으로 들어온 땀을 훔칠 겨를도 없이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에일린은 빠르진 못해도 착실하게 나아갔다.

창고에 들어온 에일린은 헛손질을 하면서도 묵묵히 문을 잠갔다. 이미 정신은 아득히 멀어지기 직전이지만 기댈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에일린은 입술을 깨물어가며 버텨야만 했다.

문을 잠그고 나자 에일린이 깊이 한숨을 내쉬며 문에 등을 기댔다. 아직 더 안쪽으로 들어가 숨어야 하지만 적어도 한 겹 안전막을 두른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건 오메가의 페로몬 아냐?”

누군가의 목소리에 에일린이 전신을 굳혔다. 아까 걸어오는 동안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인기척에 에일린이 몸을 굳혔다. 이미 페로몬을 느꼈다면 자신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안 돼. 안 돼. 제발.’

에일린은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발을 뒤로 끌었다. 또다시 그때의 악몽을 겪고 싶지 않았다.

“여기 문이 잠겼는데?”

에일린이 공포가 가득 찬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문을 열려는 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흔들렸다. 잠금장치가 금방 끊어질 듯 위태롭게 버티고 있으니 에일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쳐봐야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에일린이 제 몸을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페로몬을 조절해 보려고 했다. 페로몬을 최대한 안으로 갈무리할 수 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급한 마음과 별개로 이제 막 개화한 몸은 페로몬을 감출 의지가 전혀 없었다.

이제 에일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작열통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는 이상 남자를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로이드.’

지금 떠오르는 건 우습게도 가족이 아니라 로이드였다. 그가 옆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전쟁터에 있는 걸 알면서도 헛된 기대감이 들었다. 에일린이 흐린 시선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했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에일린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보는 얼굴은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았다.

“히트 사이클이잖아?”

에일린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며 남자를 경계했다. 당장 작열통으로 괴로울지라도 처음 보는 남자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아니, 저 남자만이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에일린이 원하는 건 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서워한다고 곧바로 손을 떼던, 그래서 더욱 미안함을 느끼던 그 사람이었으면 했다. 모두 부질없는 바람이지만.

막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에일린이 눈을 부릅뜨며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미칠 것 같은 고통이 헛것을 보게 하는 건지 헷갈렸다.

“왜 여기 있어.”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남자의 말이 들려오면서 그가 진짜라는 걸 알았다.

“로이드…….”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로이드가 심각한 얼굴로 들어왔다.

“클로에와 놀러 온 거 아니야? 왜 혼자야. 그것도 이 창고에…….”

에일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느꼈는지 로이드의 말끝이 흐려졌다.

“당신은…… 왜 여기에 있어요?”

대신 에일린이 잘게 떨리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물었다.

“내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 할 거 같은데.”

로이드의 걱정에 에일린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에일린은 코끝을 자극하는 강렬한 페로몬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참아왔던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에일린의 억눌린 흐느낌에 로이드는 제 망토를 벗어 그녀를 감쌌다. 그대로 제 품에 안아 올린 로이드가 돌아섰다.

“다들 물러서라.”

에일린은 그에게 기대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넘실거리는 페로몬이 에일린의 주위를 감쌌다. 그에게 닿은 가슴이나 팔만이 아니라 제 몸 자체를 에워싼 듯 안정감을 주었다.

“사이클 안정제는 어딨지?”

로이드의 물음에 누군가 근처에 왔다가 사라졌다.

“에일린.”

에일린이 고개를 들어 로이드와 눈을 맞추었다. 진짜 로이드야. 로이드가 날 구해 준 거야.

에일린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으니 그가 온갖 욕이 튀어나오려는 듯 입술을 씰룩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에일린이 왜 그러냐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색색거리며 숨만 내쉬고 있자니 로이드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눈가가 달아올랐어. 볼도 빨갛고 입술도 빨개서 사과랑 다를 게 없는 상태라고.”

어쩜 비교해도 사과라니, 지금 그런 장난이 나오냐고 말하고 싶지만 에일린이 할 수 있는 건 그를 애타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모든 경계심이 사라졌고 그의 페로몬을 안락하게 받아들였다.

덕분에 에일린은 아까보단 고통이 조금 잦아드는 걸 느꼈지만 동시에 억눌러있던 갈증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이 안정감 있게 감싸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에일린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더한 것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보면 어떡해.”

로이드가 한 손으로 안정제를 든 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치아로 물어 뚜껑을 벗긴 그가 에일린의 입에 안정제를 흘려 넣었다.

“우선 마시고 정신 차려. 우리는 그다음에 이야기하는 거야.”

에일린은 그가 먹여주는 안정제를 꼴깍 삼켜댔다. 차가운 액체가 혀를 감싸더니 목구멍 안쪽으로 넘어갔다. 시원한 기분에 에일린이 더 마시고 싶어 손을 들었지만 흘러들어오는 게 없었다.

“그게 다야.”

로이드는 빈 통을 대충 던지며 에일린의 몸을 끌어올렸다.

“그래도 부족하면 물이라도…… 하아.”

로이드가 제 옷을 잡고 늘어지는 에일린의 손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정신없다고 후회할 짓 하지 마.”

“로이…드. 로이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쉬어있었다. 그게 창피한데 또 로이드가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부르는 걸 멈추지도 못했다.

점점 이성이 흐려져 가는 와중에 에일린은 로이드의 이름만 애타게 불러댔다.

“흑, 로이드. 로이드 나 좀 봐…줘요.”

“보고 있어. 보고 있으니까 울지 마.”

에일린은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에 로이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발정열이 끊임없이 이성을 긁어대고 있으니 이젠 모래성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를 지경이었다.

“로이드, 나… 나 어떻.”

에일린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한계에 치달은 몸은 로이드에게 유혹의 페로몬을 쏟아내듯 보내고 있었다.

“대체 안정제는 왜 이렇게 약효가 안 드는 거야.”

로이드의 신경질적인 말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만 같아 에일린이 옷을 붙잡고 늘어졌다. 자신은 이제 그가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 힘도 없는데 그가 갈까 봐 그랬다.

“로이드…….”

에일린의 목소리는 이제 지나가는 바람에도 묻힐 정도로 작아져 버렸다. 그를 잡았던 손은 감각이 사라졌고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이제 모든 걸 포기한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다가올 발현통을 처음 겪으면 모를까 지금으로는 아예 정신을 놓아버리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일 수도…….

“으읍.”

에일린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입술에 닿는 감촉이 차갑다는 게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시원한 것을 찾아 고개를 돌리니 제 입 안으로 말캉한 것이 들어왔다. 물은 아닌데 청량한 무언가가 함께 들어오며 에일린의 발정열을 아주 조금씩 식혀냈다.

그래봐야 불난 집에 물 한 양동이 부은 거지만 에일린에겐 아주 조금 숨이 트여오는 순간이었다.

“하아.”

에일린이 다시금 요구하기 전에 입술이 다가와 그녀의 열을 식혀주었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 언뜻 별장에 들어온 것 같지만 그의 페로몬을 느끼며 잊어버렸다. 그저 입술을 떼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의 페로몬을 듬뿍 받고 싶었고 그가 제 고통을 식혀줬으면 했다.

에일린은 등에 닿은 푹신한 감촉도 느끼지 못한 채 로이드의 입술을 탐하고 페로몬을 빨아들였다. 그러다 그의 손이 등에서 앞으로 넘어올 때 에일린이 전류가 통한 듯 몸을 떨었다.

어디까지나 쾌감에 자연스레 보인 반응이었지만 오해한 로이드가 입술을 댄 체 말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간지러운 감각에 에일린은 웃음을 흘려대기도 했다. 입을 열 때마다 들어오는 청량하고도 무거운 페로몬 때문인지 아득히 멀어졌던 이성이 아주 조금 돌아왔다.

“안정제가 돌기 전까지 키스만 할 거야. 그러니까 다른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입술을 깊게 맞물려왔다. 그 때문에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제 상태를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은 뒤늦게 발현한 케이스였고 초반에 겪었던 발정열은 이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기에 안정제 하나로는 가라앉지 않을 거라는 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