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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64)화 (64/120)

64화. 갑작스러운

마차는 근처의 적당한 자리에 세우고 기사를 남겨둔 채 에일린과 클로에, 러츠 경만이 호수로 향했다. 그녀들의 시중을 들 사람은 미리 별장에 보내두었으니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큰 호수에 에일린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수의 표면이 빛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죠?”

클로에의 물음에 에일린은 호수에서 눈도 못 떼고 고개만 끄덕였다. 클로에가 그렇게 호수 이야기를 하던 이유가 있었구나.

에일린이 호수를 보는 동안 러츠가 돗자리를 깔고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하자 클로에가 기쁜 듯 가서 앉았다. 그리고 에일린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데 표정만 봐도 기분이 좋은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에일린이 클로에의 옆에 앉으니 러츠 경이 마지막 바구니까지 두 사람 사이에 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에일린은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러츠 경을 보았다. 클로에의 호위 기사이자 암중으로 에일린의 호위까지 맡은 러츠 경은 제 역할을 적당하게 수행해가는 중이었다.

그가 이로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키는 걸 알기에 에일린은 러츠 경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냥 넘어가는 게 없음을 깨달았다.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는 거리와 클로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감춘 이로얀의 이름. 그 모든 게 보면 볼수록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이런 날을 위해 특별한 차를 가져왔어요.”

클로에가 직접 들고 온 가방을 열어 유리병을 꺼냈다. 에일린이 고개를 돌려 클로에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유리병이 잘 보이도록 들었다.

“그 유명한 리버 산에서 캐온 카멜리란 말이죠. 여기에 함께 말린 제시아까지 있으니 맛과 향은 보장될 거예요.”

“카멜리에 제시아의 조합은 저도 좋아해요.”

에일린이 대공가에 와서 한동안 즐겼던 찻잎이었다. 제시아 허브와의 블랜딩한 카멜리 차는 그윽하면서 끝맛이 달콤하게 남았다. 거기서 리버 산이라고 하면 산세가 험악하기로 유명한 만큼 가서 따오기만 한다면 고가에 거래되었다.

클로에가 직접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리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러츠가 가져갔다. 직접 우려서 잔에 따르고 혹시나 흘리기라도 할까 작은 트레이에 담아 내밀었다.

에일린이 잔을 들자 클로에가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에일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입에 댔다. 조금 식어 따뜻해진 잔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며 향이 맴돌았다.

“정말 그윽하네요.”

우린 시간이 길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전에 먹은 것보다 더 진한 맛과 향을 자랑했다. 클로에가 자랑할만했다.

“음?”

에일린이 다시 한 모금 넘겼을 때 이상한 기분에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반응을 예민하게 느낀 클로에와 러츠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클로에의 물음에 에일린이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물 내음이 아닌 다른 냄새가 맡아졌다. 그게 별건가 싶지만 마치 냄새가 피부에 닿은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요. 무슨 냄새가 느껴져서 그랬어요.”

“새언니 옆에 있는 바구니 때문에 그래요. 갓 구운 빵을 담아왔더니 고소한 냄새가 계속 올라오잖아요.”

에일린이 돌아보자 러츠 경이 바구니의 뚜껑을 열면서 여러 가지 요리를 꺼내주곤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냄새가 사라지자 에일린이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고 발을 담가도 좋아요.”

클로에가 바람에 살랑이는 호수를 바라보다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발만 담그고 올게요.”

구두를 벗은 채 맨발로 선 클로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 신나 하는 모습이 너무도 해맑아 에일린이 함께 웃었다. 클로에와 있으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다.

“아가씨 너무 깊게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에일린의 호위까지 맡아야 하는 러츠가 클로에를 향해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 한두 번 들어와?”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러츠 경은 걱정이 많아서 탈이…….”

“아가씨!”

분명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던 수심에 클로에가 신나게 몸을 움직여댔다. 그러면서 보란 듯이 러츠에게 물을 튕겨내려던 클로에가 갑자기 물에 빠졌다.

“클로에!”

에일린이 벌떡 일어나는 사이 러츠 경이 달려 물에 빠진 클로에를 건졌다. 클로에가 정신을 잃은 채 러츠에게 안겨 오자 에일린이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코밑에 손을 대보고 눈꺼풀을 들어 보이던 에일린이 러츠에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당장 의사에게 데려가야 해요.”

“마차를 준비해.”

에일린의 말에 러츠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일정 거리에 마차를 세우고 지키던 기사가 다급히 마부석에 올랐다. 그러자 에일린이 러츠의 팔을 잡았다.

“마차로는 늦어요. 말로, 말로 가세요.”

당장 클로에의 호흡이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늘어졌다. 에일린의 설명에 러츠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선…….”

“지금 내가 중요해요? 어서 가요. 나는 천천히 따라갈게요.”

“알겠습니다.”

러츠가 클로에를 안은 채로 말에 올라타 별장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는 에일린은 목까지 차오른 걱정에 다른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러츠가 최대한 빨리 도착하길 바라며 에일린이 마차를 바라볼 때였다.

“마차가… 어디로 갔지?”

러츠 경이 마차에서 말을 한 마리 끌고 올 때만 해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증발하기라도 한 듯 사라졌다.

에일린은 아까 마차가 있던 자리로 와서 둘러보았지만 기사는 물론 마차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별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별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에일린은 일단 누구든 오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에일린이 오싹한 느낌에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부들거리며 몸이 떨렸다.

‘몸이 왜 이러지?’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오래 맞아서 그런가 싶지만 딱 잘라 정의하기 애매했다. 팔을 안은 손끝이 떨리고 곧 입술도 바르르 잔떨림을 일으켰다. 치마 아래 오금이 저린 다리에선 힘이 풀려왔다.

에일린이 입술을 깨물며 떨림을 멈춰보려 하지만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춥고 더웠다. 호수에서 밀려오는 바람에 몸이 으슬거리는데 몸 안에서는 기이한 열이 돌아다녀 덥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런 상반된 기분을 동시에 느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냄새가…….’

에일린이 눈을 들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방금까지 맡아졌던 냄새 사이로 결이 다른 냄새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게 뭔지 처음엔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금방 감을 잡았다.

“이건 페로몬이잖아.”

에일린이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페로몬을 느낀다는 건 에일린이 발현했다는 증거였다.

‘대체 왜 지금…….’

발현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그사이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느낀 에일린이 절망에 빠졌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사이에 발현이 되어버렸다. 당장 사이클 안정제도 없이 에일린은 제 팔을 긁듯이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 따가운 감각이 곧 쾌감처럼 느껴지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에일린은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

“마지막까지 잘해 주었다.”

알란 원로의 지긋한 웃음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온통 얼룩덜룩한 멍과 한쪽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부어있지만 그가 대공가에서 쫓겨난 제크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원로님께서 말씀하신 건 전부 했습니다. 그럼 이제 약속한 것을 내어주시는 겁니까?”

제크는 촉진제의 재료를 훔친 죄를 물어 대공가에서 쫓겨났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떻게 알았는지 해시가 찾아와 그를 사정없이 때리는 바람에 제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하나뿐인 친구였지만 그의 목숨을 담보로 일을 벌인 덕분에 제크는 친구를 잃었다. 아직도 해시에게 맞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신이 벌인 일로 아버지의 상단은 하루아침에 망했고 평생을 살아온 터전에서 쫓겨났다.

벼랑 끝까지 몰린 제크는 알란 원로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고 그가 내세운 조건을 막 채우고 온 터였다.

“클로에 아가씨가 호수에 가는 걸 알아내고 마지막 촉진제를 전부 부어서 말린 잎을 섞었습니다. 기사까지 포섭해서 지금 호수에는 마차 한 대 없습니다. 대공비가 당장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도 의사를 만나기 힘들 겁니다.”

제크가 입을 다물었다가 뒤늦게 생각나서 다급히 말을 붙였다.

“우연히 살아 돌아와도 클로에 아가씨를 죽이려는 죄를 씌울 수 있으니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완벽했네. 아주 완벽했어.”

알란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알란은 당장 대공비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싶은 걸 꾹꾹 참아냈다. 섣부르게 건드리기보다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 그녀가 방심할 기회를 노렸고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제크는 그의 기분이 좋아진 걸 느끼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희 아버지의 상단을 다시 살려주시는 겁니까?”

“물론.”

알란이 품에서 하나의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을 기대에 차서 바라보던 제크의 눈동자가 주머니의 입구가 열리면서 크게 떠졌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작은 단검이었다.

제크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피하려고 했지만 알란의 행동이 빨랐다. 그는 제크의 머리카락을 쥔 그대로 목덜미에 단검을 댔다.

“그런데 자네가 살아 있으면 완벽하지 않잖아.”

알란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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