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묵은 감정
“새언니.”
클로에가 찾아오자 에일린이 방금까지 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반기니 클로에가 들고 온 한 장의 전서를 내밀었다. 전서에 그려진 검 그림에 에일린의 얼굴에 긴장감이 차올랐다. 검이 그려진 전서는 하나였다. 전쟁터에서 온 것.
“이번 결투도 이겼다네요.”
에일린이 전서를 펴서 읽고 있으니 클로에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에일린의 앞으로 간 전서를 먼저 읽은 게 아니라 소문을 들은 것이다.
“오빠가 떠난 지 삼 개월이 된 거죠?”
에일린이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이 상세히 적힌 전서를 읽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손가락을 꼽으며 지금껏 벌어진 일을 간략히 정리했다.
“세 번의 격돌에 참가했고 3번의 승전보를 울렸으면 꽤 선방했네요.”
물론 손가락으로 셀 필요까진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치러진 전투. 그리고 보란 듯이 가져온 대공의 승전보. 그건 지금껏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던 전쟁에 단비가 되어주고 있었다. 아니, 단비가 맞나? 적어도 상대방에게는 혈비와 다름없을 텐데?
“그런데 왕국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알아요?”
클로에는 이왕 주워오는 거 왕국의 것까지 알아 왔다. 에일린이 전서에서 눈을 들어 클로에를 보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하루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대요. 그게 자기 나라가 지더라도 말이에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왕국 입장에선 어떻게든 승기를 빼앗아 오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나?
에일린의 표정을 본 클로에가 예상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전쟁터에 보낼 군량미며 군수품 때문에 등골이 휠 지경인데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계속 밀리고 있잖아요. 그 와중에 자기네들의 가족이 병사로 출정해서 엄청 걱정되는데 제국의 지휘관은 자기네 지휘관의 목만 따서 승리하고 있으니 차라리 빨리 이겨줬으면 하는 거죠.”
에일린이 다시 전서를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전투의 양상이 세 번 다 비슷했다. 적은 희생만을 꾀할 수 있는 단기간의 격파. 동시에 목표는 결투를 주도하는 지휘관의 목.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전략을 로이드는 보란 듯이 실행하고, 결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게 제일 좋은데 말이죠.”
클로에의 한숨 섞인 말이 곧 에일린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바란다고 해서 될 게 아니었다.
에일린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 전쟁은 대공이 참여하고부터 1년 후에 끝났다. 에일린은 그걸 생각하며 로이드가 돌아올 시간을 가늠했다.
앞으로 8, 9개월 정도?
원래 기억하던 미래에서 로이드가 한 달 늦게 가긴 했으니 얼추 한두 달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에일린이 전서를 서랍에 넣으며 아까 보던 서류를 마저 들췄다. 하단에 인장과 제 이름까지 적고 난 후 한쪽으로 치워두자 클로에가 반색한 얼굴로 물었다.
“새언니 이제 바쁜 거 다 끝났어요?”
“대충 그런 거 같아요.”
에일린이 제 책상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서류는 다 돌아보았고 그중 급한 건 알아서 행정관이 들고 갔다. 책상 가운데 있는 서류만 갖다 주면 오늘 해야 할 업무는 끝이었다.
“그럼 호수에 가 보는 거 어때요? 지금이 가장 예쁠 때거든요. 매년 이맘때쯤 한 번씩 갔는데 올해는 새언니에게 꼭 보여 주고 싶어요.”
“이것만 전해 주고 올게요.”
에일린이 손에 든 것을 보여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에 역시 그녀를 따라 일어나며 기대에 차서 말했다.
“그럴 줄 알고 거기에 모든 걸 다 보내놨어요. 미리 별장에도 말해놨으니 우리 재밌게 놀다 와요.”
클로에의 설렘 가득한 말에 에일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가 소유의 산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평소엔 누구든 드나들 수 있도록 했지만 이렇듯 대공가의 직계가 갈 때에 한해서 통제를 하곤 했다.
“호숫가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바람도 쐬고 좋을 거 같지 않아요?”
클로에가 두 손을 맞잡으며 눈을 빛냈다. 에일린은 호수에 가는 것보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클로에가 귀여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왠지 특별한 날이 될 거 같아요.”
클로에의 기대와 다르게 에일린은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
에일린이 서류를 들고 가는 곳은 촉진제의 연구가 이뤄지던 연구소였다. 촉진제는 이미 전량 폐기가 되었고 그 빈자리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에일린은 아직도 제 촉진제에 관한 걸 그들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로이드가 바란 건 제조법이 아닌 완성품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에일린의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다.
‘언제가 좋을까.’
에일린이 그 시기를 가늠하며 걸어갈 때였다. 앞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에일린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입매가 굳어졌다.
‘알란 원로.’
맞은편에서 오던 알란 원로 역시 에일린을 발견하더니 입술을 씰룩였다. 촉진제 사건으로 둘 사이엔 은근한 벽이 생겼다. 에일린은 황궁에서 돌아오던 알란 원로와 마주쳤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 분노가 가득 쌓인 눈빛은 자신을 사정없이 난도질할 듯 사나웠다.
에일린은 알란 원로가 어떻게 나올지 기다렸다. 로이드도 없으니 자신 따위는 금방 없애버릴 듯 굴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눈빛이 착각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알란 원로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
‘그런다고 저 인간이 반성할 리는 없을 테지.’
에일린이 속마음을 감춘 채 그에게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알란 원로는 마주 인사를 보내오는 대신 에일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일린은 알란 원로에게 아무 반응이 없으니 더 할 말이 없다고 여기며 스쳐 갔다.
“그러고 보니…….”
알란 원로가 대뜸 내뱉은 말에 에일린이 그를 돌아보았다. 알란 원로는 뒤늦게 떠오른 게 있다는 듯 말했다.
“대공비께서는 할 일도 없으신 모양입니다. 괜한 관리인 하나를 내쫓으셨다면서요?”
제크의 이야기였다. 에일린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던 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촉진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일부 재료가 없어졌어요. 그걸 가져간 게 별관의 관리인이라 그에 합당한 죄를 물었을 뿐이죠. 아무리 할 일이 없대도 관리인을 아무 이유 없이 내쫓을 리는 없잖아요.”
에일린의 조목조목 따져오는 말에 알란 원로가 코끝을 씰룩였다. 자신을 향해 쏘아붙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상냥하게 굴지도 않는 에일린이 거슬린 것이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입니까?”
“그게 아닌 다른 이유 역시 있었죠. 궁금한가요?”
듣고 싶다면 말해 주겠다는 듯 굴자 알란 원로가 헛웃음을 그렸다.
“대체 무얼 믿고 그러는 겁니까?”
에일린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곳엔 마마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마께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게 이러느냔 말입니다.”
대공이 없는 대공가에서 네가 얼마나 무모한지 아느냐는 듯 알란 원로는 에일린에게 겁을 주었다.
“지금껏 마마께서 어찌 나올까 궁금해서 보고 있으니 아주 기가 차더군요. 마치 대공이라도 된 것처럼 안정제는 이전과 다를 게 없으며 오히려 대공가를 더 많이 흔들어 놓더란 말입니다.”
알란 원로가 에일린의 착각을 깨어 주려는 듯 한 번 더 강조했다.
“마마, 마마께선 대공이 아닙니다. 대공은 전쟁터에 있습니다.”
“대공님이 없다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게 나 대공비입니다. 아니면 대공님이 전쟁터에 있다고 해서 내가 대공비가 아닌 게 되나요?”
알란 원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일린이 말을 붙였다. 그녀는 알란 원로의 협박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대공비이고 원로에게 협박을 받을 위치가 아닙니다. 그러니 내게 두 번의 실례를 범하지 마세요.”
“실례라니 말을 재밌게 하는군요. 만약 제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알란 원로의 순수한 물음에 에일린은 그보다 더 순수한 웃음으로 받아쳤다.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게 아깝지 않을까요?”
서로 간의 묵은 감정이 은근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감정의 농도는 남달랐다. 가족을 다 잃고 가문이 무너진 에일린은 고작 알란 원로에게 사이클을 일으킨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빈틈을 보이는 순간 당신의 목덜미가 뜯길 거에요.’
그러기 위해 지금껏 그를 지켜보기만 한 거니까. 알란 원로가 무슨 꿍꿍이든 가만히 있는 만큼 에일린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의 충돌. 그 충돌에 두 사람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에일린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알란 원로를 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알란 원로가 에일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감히 자신을 바닥으로 밀어버리겠단 경고를 날리다니 제법이었다.
“그런다고 네가 내 몸에 손끝 하나 댈 수 있을 거라 여기느냐?”
알란 원로의 입가에 비죽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제껏 에일린을 기다려온 만큼 제대로 판을 짜두었다.
“이번에도 운이 좋다면 살아보아라.”
오늘 대공비는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