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62)화 (62/120)

62화. 배웅

황궁에서 걸어 나오는 알란을 발견한 보좌관이 황급히 다가왔다. 그는 지난 삼 일간 소통이 막혀버린 상관을 향한 걱정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으십니까?”

“비켜라.”

하지만 알란 원로는 보좌관의 걱정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 따위로 여기며 그를 사정없이 옆으로 밀쳐냈다. 가뜩이나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없던 알란의 심기가 단단히 틀어진 탓이었다.

그는 황궁에서도 침대 하나와 협탁이 전부였던 작은 방에서 사이클을 보냈다. 안정제를 먹었음에도 가라앉지 않고 심지어 집에 가서 해결하겠다고 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머리통이 으깨지는 것 같은 통증으로 인해 울부짖는데도 문이 열리는 것은 물과 식사를 줄 때뿐 그마저도 알란이 다가가면 나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알란은 다 필요 없으니 돌아가겠다고 문을 두들겼지만 그의 의견은 단 한 번도 먹히지 않았다. 전부 루시드 황자의 지시라는 이유로 기사는 알란의 의견을 묵살한 것이다.

덕분에 알란은 처음으로 사이클을 혼자서 버텨내야만 했다. 촉진제를 먹어서 일어난 것이라 더욱 조절되지 않았고 죽을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던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알란은 평생 잊지 못할 이 악몽의 시작을 짚어갔다. 머지않아 하나의 원인을 잡아냈다.

“대공비 그년 때문에.”

제크와 계략을 짜고 일을 치른 건 생각하지 않고 알란이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대공비가 그 차를 가져오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 이건 전부 자신을 노리고 벌인 게 분명했다.

알란은 제멋대로 생각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막 마차가 출발하기 전 보좌관이 아직도 감시역으로 붙은 기사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닥였다.

“황비님을 뵙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애초에 황궁에 온 이유도 그분을 만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알란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받아쳤다.

“그럴 필요 없다.”

알란은 그 좁은 방에 갇혀 있을 당시 케이트 황비가 구해 줄 것을 믿었다. 아무리 자신과 손을 잡은 걸 비밀로 해야 하지만 이런 함정에 빠진 걸 나 몰라라 하진 않을 거라 여겼다.

서로 도와주기 위해서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케이트 황비는 그림자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알란은 대공비만큼이나 야속한 케이트 황비에게도 앙금을 품었다.

“어디 한 번 누가 아쉬운가 보자.”

황족이라고 해 봐야 황비일 뿐인 것을. 알란이 코웃음 치며 고개를 앞으로 고정했다. 그러자 보좌관은 두말없이 마부석을 두드렸다.

그를 태운 마차가 움직였다.

“감히 나를 건드렸단 말이지.”

알란은 이번에 더욱 치밀하게 함정을 계획했다. 어설프지 않으면서 확실하게 대공비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한편 알란 원로를 가두고 감시하던 기사는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기사는 곧바로 루시드 황자를 찾아가 보고했다.

“갔습니다.”

책을 읽고 있던 루시드 황자는 기사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향해 눈길을 돌리니 마침 한 대의 마차가 움직였다.

“대공에게 가서 전해. 알란 원로는 아주 잘 쉬고 갔다고.”

“알겠습니다.”

삼 일 전 루시드 황자는 대공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가문의 가신이 황궁에 가고 있으니 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달란 간단한 부탁이었다. 그땐 너무 설명이 부족해 서신을 읽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원로란 자를 보자마자 느꼈다.

페로몬을 풍기며 걸어오던 꼴이라니.

루시드 황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알란 원로는 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유서 깊은 대공가의 원로로서 제가 가진 힘을 보란 듯이 휘두르던 자였다. 분명 그는 귀족일진대 어지간한 황족에게도 맞먹으려 드는 자였다.

그런데 이번에 톡톡히 망신을 당했으니 과연 어떻게 나올지.

“이상하지 않나?”

루시드 황자가 혼잣말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기사는 알란 원로에 관한 건 알았지만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죄송하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사이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잖아. 그렇지?”

“그렇습니다.”

알란 원로의 상태를 물어본 것임을 알아채고 기사가 대답했다.

“대공이 알란 원로의 사이클 주기를 알고 있었나? 그래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싶어서 말이야.”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 정도 사이클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보통 집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공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네.”

“알아볼까요?”

“깊숙이 알아볼 필욘 없어. 적당히 긁어봐.”

어쨌든 자신은 대공의 부탁을 받아 사이클이 일어난 가문의 가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다 보냈으니 그 정도 알 권리는 있었다.

“황자.”

루시드 황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엔 그의 어머니인 황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늘이 예쁘네요.”

“그렇다면 더욱 나가서 봐야지요. 마침 날씨가 좋아서 같이 산책이나 할까 하고 왔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루시드 황자가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황후의 옆으로 다가가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

대공가의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자리했다. 이미 간단히 출정식을 치르고 떠날 준비를 마친 이들의 주변으로 가족들이 와서 인사를 건넸다.

에일린 역시 로이드에게 다가왔다. 가뜩이나 자기보다 큰데 말을 타고 있어서인지 정말 커 보였다.

로이드가 투구를 벗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에일린은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나 높은 콧대, 그리고 짙은 눈동자까지 천천히 돌아보았다. 떠나기 전 그의 얼굴을 머리에 새기려는 듯 그렇게 하염없이 보고 있으니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봐.”

“오래 못 보잖아요.”

“평소에 많이 봤어야지.”

로이드의 핀잔에도 에일린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미리 많이 봤다면 이 아쉬움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있었다. 고집이 가득 담긴 턱, 미운 말만 하는 입술, 언짢음을 표현하던 볼, 쓸데없이 놓은 코. 그리고 퉁명스러운 눈동자까지 어젯밤 자신을 걱정해 손 하나 못 대던 바보 같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역시 잘생기셨네요.”

“그런 말 안 해도 알아.”

“그러니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눈코입으로 잘생기셨다고요.”

언젠가 했던 농담에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얼굴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신뿐일 거야.”

“고마워요.”

에일린이 태연하게 받아치니 로이드가 더 말해 뭐하냐는 듯 한숨을 쉬었다. 방금까지 흐르던 가벼운 분위기가 밀려나고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할 때가 왔음을 서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잘할 거라 믿어.”

“절대 폐 끼치지 않을게요.”

“에일린.”

로이드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눈빛으로 에일린을 내려다보았다. 잘하겠다고 한 건데도 부족한가 싶어서 에일린이 눈을 굴렸다.

“지금껏 내가 당신에게 말한 거 다 잊었어? 마음껏 돌아다니고 뭐든 마음대로 해.”

종종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차마 그가 없는 동안에도 그러라고 할 줄은 몰랐다.

“제가 그러다 문제라도 만들면 어떡해요.”

“그러면 더 좋아. 내가 생각날 거잖아.”

언제나와 같은 장난인가 싶지만 로이드의 표정엔 한 점 웃음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생각하길 원했다.

“생각 많이 날 거예요.”

“그래.”

로이드가 대답하고 다시금 침묵이 감돌 때 에일린이 미래에 대한 언급을 아주 조심스럽게 꺼냈다.

“우리가 부부로 보는 마지막 시간이겠죠?”

일 년간의 계약 결혼.

지금은 고작 결혼하고 한 달이었다. 그가 전쟁터에 있는 동안 11개월이란 시간이 흐를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가진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아쉬움이 남아버렸다.

로이드 역시 그럴 거란 대답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다른 말을 해왔다.

“내가 빨리 끝내길 기도해.”

“전쟁을 빨리 끝내도록요?”

그가 꺼낸 의외의 발상에 에일린이 놀랐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자신은 전쟁이 얼마나 오랜 시간 계속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이드에겐 그것에 대해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빨리 끝내고 오라고 기도할게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흉내를 내고 있자니 로이드가 에일린의 두 손을 한 번에 잡아버렸다.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

에일린 역시 그에게 가진 오해를 빨리 거두지 못한 게 못내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로이드에게 손을 내어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만났으면…… 그래서 당신이 나로 인해 다른 순간순간을 겪게 된다면…….”

로이드는 에일린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뱉더니 그나마도 끝을 흐렸다. 그는 에일린을 잡던 손을 놓고 투구를 썼다. 마지막 인사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채 로이드가 출발 신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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