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61)화 (61/120)

61화. 때로는 천천히 가도 괜찮아

알란 원로에게 촉진제를 먹인 일 이후로 에일린은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로이드의 페로몬에 감싸였던 그날의 간지러운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출정식을 앞두고 바쁘게 오가고 있는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이제 곧…….’

에일린의 눈동자에 오묘한 빛이 서렸다.

로이드가 전쟁터로 가게 되면 둘의 형식적이나마 유지되었던 부부 생활이 끊어진다. 로이드가 다시 돌아왔을 땐 에일린이 떠나야 할 차례가 온다. 길고도 짧게 느껴졌던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가며 에일린이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분명 그가 떠나기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그날이 온다고 생각하니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간 저도 모르게 로이드를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그가 떠나기 전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부부의 의무를 해야 할 바로 그날.

***

씻고 방으로 온 에일린은 먼저 도착한 로이드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침대에 앉아 있던 로이드가 고개를 돌려 에일린을 보았다. 그도 씻고 온 건지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언제 왔어요?”

“얼마 안 됐어. 늦었네?”

“아…….”

에일린이 제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씻느라 오래 걸렸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웠다.

순간 로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에일린의 시선 역시 위로 올라가며 마른침을 삼켰다. 곧 일어날 일을 의식하고 있는 나머지 에일린이 제 잠옷의 치마를 부여잡았다.

그가 제게 다가올까. 하지만 괜히 동선을 늘리는 것보다 자기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눈치껏 움직이지 않아서 일어난 건가?

에일린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로이드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는 에일린을 내려다보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에일린이 제 몸을 잡을 듯이 다가오는 손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로이드의 손은 에일린의 옆을 스쳐 갈 뿐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술은?”

로이드가 손을 뻗은 이유가 뒤편에 있던 와인 때문인 걸 안 에일린의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지금 이 자리를 자기만 의식하고 있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에일린이 손등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로이드에게서 옆으로 물러났다.

“안 마실래요.”

긴장을 풀어주려 술이라도 마시면 저번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다. 그래서 에일린은 차라리 긴장하기를 택했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붉어진 눈가를 보더니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와인을 잔에 반쯤만 따라 한입에 들이킨 로이드가 에일린을 향해 몸을 틀었다.

“이리 와.”

로이드가 내뻗은 손을 보던 에일린이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감싸오고 맞잡은 손 사이사이로 공간이 남았다. 작은 힘만 줘도 끊을 수 있는 건 에일린에게 얼마든지 뿌리쳐도 좋다는 신호였다.

에일린은 그의 손안에서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로이드가 작게 웃더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에일린이 그에게 이끌려 뒤따라 침대로 걸어갔다.

‘진정해.’

에일린이 로이드 몰래 제 심장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쿵쾅 뛰는 심장이 나올 것 같았고 얼굴에 열이 오른 듯 뜨거웠다.

로이드가 침대에 앉아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어도 서 있는 자신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가 에일린의 허리로 손을 뻗어 감싸 안자 에일린이 용기를 내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얇은 천 너머 그의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제 어깨에 닿은 온기를 느끼며 로이드가 나름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네.”

로이드가 그녀를 칭찬하는 의미로 허리를 감싼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등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에일린이 천천히 로이드에게 시선을 내렸다.

“도망가지 않을 거니까요.”

“좋은 자세야.”

로이드가 에일린의 위로 올라오며 말했다. 그는 무릎으로 선 채 제 상의를 벗었다. 단단한 남자의 몸이 드러나자 에일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원래도 그의 몸이 단련으로 만들어진 건 알았지만 세밀하게 다듬어진 근육의 결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만져봐도 돼.”

그의 말에 에일린이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쇄골 아래로 손을 넣어 천천히 타고 올라가 어깨에서 멈췄다. 다른 곳까지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선택한 곳이 어깨였다.

“잘했어.”

그것만으로도 대견한지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상체를 숙였다. 막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려던 그의 움직임에 에일린이 질끈 눈을 감았다.

“에일린.”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멈춰선 로이드가 에일린을 불렀다. 그의 숨결이 입술에 닿아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에일린은 한쪽 눈만 떠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다른 눈도 떴다.

“내 어깨에서 손 떼지마.”

로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이해 가지 않았다. 에일린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설명이 빨랐다.

“언제든 못 버티겠다면 날 밀어내도 좋아.”

로이드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에일린에게 기회를 주려는 걸 알자 에일린은 형용할 수 없는 마음에 그의 어깨에 올린 제 손을 보았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이가 아닌 건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지 이젠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은 그의 아내가 되었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와 보낸 시간이 악몽으로 기억되지 말라고.”

“아…….”

로이드가 계속 왜 그랬는지 단 한 순간에 정리되었다. 오히려 에일린 스스로가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지 못해 부끄러워졌다. 나보다 더 내 몸을 아껴주는 로이드의 마음에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괜, 괜찮아요.”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뜻에 로이드가 바로 입술을 내렸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온기가 오가고 숨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 공간이 곧 로이드가 고개를 틀면서 사라졌다. 틈 없이 맞닿은 입술에 에일린이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이젠 그의 익숙한 체향 때문인지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애써 눌러왔던 기억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는 로이드인 건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패트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남자니까 그러니 절대 같은 인물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행위 자체에서 오는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로이드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자 에일린이 미약하게 올라오는 거부감에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움직임에 에일린은 눈을 감고 입술을 열었다. 로이드가 기꺼이 그녀의 입 안으로 침범하자 에일린의 몸이 아까보다 경직되었다.

이다음으로 다가올 것을 생각하니 겨우내 다잡았던 모든 게 다 새하얗게 잊혀졌다. 에일린이 초점이 흐린 눈을 뜨며 미약한 힘으로 로이드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를 완강하게 거부할 순 없지만 제 마음이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나온 반응이었다. 그런데 로이드가 기민하게 에일린의 거부를 읽어내고 멈췄다. 로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에일린에게서 떨어졌다. 방금까지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에일린이 손등으로 제 입을 가렸다.

‘어떡하지.’

결국 거절하고 말았다. 더욱이 로이드는 거절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죄책감이 올라와 에일린은 울고 싶어졌다.

자신이 못나서 로이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가문만 생각해 그에게 청혼해놓고 부부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예상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로이드가 에일린의 옆에 누우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에일린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꼭 끌어안은 로이드가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때로는 천천히 가도 괜찮아.”

로이드는 에일린이 진정할 수 있도록 연신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그의 위로에 에일린은 눈물이 맺힌 채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이 가져야 하잖아요.”

자신이 베타이고 낳은 아이 역시 형질을 띄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었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기에 오늘 꼭 잠자리를 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로이드의 눈썹이 씰룩이더니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왜 웃는지 몰라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로이드가 몇 번 웃음을 털어내고 말했다.

“한 번만에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거야…….”

운이 좋다면?

에일린이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을 그의 품 안으로 숨겼다.

“날 믿고 한 번에 생길 거라 생각한다면 고마운데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는 영역이라서. 차라리 이번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지 물어보는 게 쉬울 거야.”

로이드의 우스갯소리에 에일린도 처음으로 웃음다운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미안하지만 이렇게 안고 대화를 하게 되자 더할 나위 없이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에일린은 말없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지금껏 기다려주고도 이렇게 안아주는 그가 참 미련하고도 고마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