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반격
알란 원로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옆으로 돌렸다. 점점 배에서 끓어오르는 열기와 함께 제 페로몬이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크가 촉진제를 탄 걸 대공비가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의 빠른 행동력에 감탄할 틈도 없이 알란 원로는 탄식이 나오려는 걸 삼켰다. 대공비를 먹이도록 시킨 걸 자신이 함께 마셨다니.
알란 원로가 차를 바라보고 있자 에일린이 함께 고개를 돌렸다.
“혹시 차가 잘못되었나요?”
에일린이 지금 마신 거라곤 차밖에 없으니 그것을 의심하자 긴장한 알란 원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여기서 차가 문제라고 한다면 일이 커졌다.
그나마 에일린이 베타이기에 페로몬을 못 느끼는 게 다행이었다. 알란 원로가 억지로 차분함을 가장하여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잠시 사레가 들린 것뿐입니다.”
“얼굴이 빨개요.”
“곧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사레가 걸렸다면 더욱 차를 마셔야죠. 여기요.”
에일린이 잔을 살짝 밀어주며 권유하자 알란 원로가 마지못해 들었다. 에일린이 보는 앞에서 그는 억지로 차를 마셔야만 했다. 그럴수록 몸의 열기는 더욱 날뛰었지만.
알란 원로가 차를 마시자 에일린은 언제 걱정했냐는 듯 평온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단순히 사례가 걸린 거라면 계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예.”
자신에게 조언을 얻으러 온 대공비를 돌려보낼 수 없기에 알란 원로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갔다. 에일린의 권유 하에 계속 차를 마시고, 속에서 점점 불이 번지듯 확연히 늘어난 페로몬으로 나중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떠들어댔다.
“……그리하면 되겠지요.”
알란 원로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을 끝냈다. 이젠 눈에 띄게 손이 떨려오고 있으니 대공비가 어서 사라져줬으면 싶었다.
똑같이 차를 마셨다 할지라도 페로몬이 없는 베타에겐 부작용이 일어날 뿐이니 지금 당장 급한 건 알란 원로였다. 그녀가 나가기만 하면 당장 누구든 불러들일 작정이었다.
“역시 원로님을 찾아오길 잘했네요.”
에일린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머리를 싸매고도 안 됐던 게 원로를 찾아오고 시원하게 해결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럼 이제…….”
알란 원로가 그만 가보라고 말할 참이었다.
“알란 원로님.”
문을 두드리며 내뱉는 다급한 음성에 알란 원로가 불안한 듯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뭔가.”
“황궁에서 전서가 날아왔습니다.”
“황궁?”
알란 원로는 누가 보냈을지 의아하면서도 달갑지 않은 듯 미간을 찡그렸다. 대공비만 나가길 기다리고 있는데 일이 꼬여버린 기분이었다.
“급한 일이 생겼나 보네요. 가보세요.”
에일린이 잔을 들며 하는 말에 알란 원로가 슬쩍 눈을 찡그렸다.
“저는 이것만 마저 마시고 일어날게요.”
에일린이 여유롭게 잔을 가리켰다. 그리고 알란 원로 보란 듯이 차를 마셨다.
“그러십시오.”
결국 알란 원로가 먼저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미칠 듯이 솟아나는 페로몬에 괴로웠지만 여기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알란 원로가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보좌관이 막 말을 하려다 에일린을 발견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급히 황궁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
“대체 누가 불렀단 말인가.”
“그게…….”
보좌관이 조용히 내미는 것을 본 알란 원로가 침음을 삼켰다.
“당장 황궁으로 들어갈 준비해.”
“알겠습니다.”
알란 원로가 지글지글 끓고 있는 몸 상태를 느끼며 짜증스러운 듯 굴었다. 제크는 빠르게 일을 진행하고, 대공비는 마침 그것을 가지고 왔고. 게다가 황궁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니. 상황이 전부 좋지 않았다.
알란 원로는 끓어오르는 페로몬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황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이클 안정제를 먹으며 가라앉힐 방법밖엔 없겠다.
알란 원로가 사라지고 난 후 에일린이 미련 없이 차를 내려놨다. 일부러 그 보란 듯이 마셨던 거라 더는 마실 이유가 없었다.
직접 촉진제를 먹어봤으니 다음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에일린이 차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만든 촉진제니까 큰 부작용은 없을 거예요. 다만 조금 세게 들어갔으니까 조심하세요. 가라앉히는 게 쉽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알란 원로가 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방장으로부터 제크가 다녀갔단 보고를 들었고 그가 손댔을지 모를 찻잎은 전부 따로 챙겨놨다. 대신 에일린이 만든 촉진제를 탄 찻잎으로 바꾼 걸 제인이 가져왔다. 전부 로이드의 지시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제인 여기를 정리해줄래?”
제인이 부지런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나서야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을 나온 에일린은 제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었어요.”
에일린이 배시시 웃으며 계획이 성공했다는 걸 넌지시 내비쳤다. 그런데 에일린의 웃음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는 아예 팔짱을 끼고선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이래서 보내기 싫었어.”
에일린은 다짜고짜 툴툴대는 로이드의 말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계획대로 잘 되었는데 왜 심술을 부리는 걸까?
로이드가 에일린의 볼에 묻은 먼지를 떼어주기라도 하듯 쓰다듬었다.
“페로몬이 묻어왔잖아.”
“아.”
그건 촉진제를 썼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에일린은 알란 원로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해서 딱히 감흥이 없었다. 그저 씻어내면 된단 생각에 로이드에게 말했다.
“가서 씻고 올게요.”
“기다려.”
로이드가 에일린의 볼과 귀를 뒤덮듯 손을 올렸다. 그는 그렇게 얼굴을 감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에일린이 어정쩡하니 서 있었다.
“왜 그러는…….”
에일린이 이상한 걸 느끼며 말끝을 흐렸다. 방금까지 풀 향이 가득했던 상쾌한 공기의 밀도가 빽빽해진 기분이었다.
‘혹시.’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그를 보았다. 만약 맞다면 경악할 일이었다. 베타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리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는 건 그의 페로몬이 얼마나 짙은지 알려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가볍게 문지른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내 페로몬으로 채웠으니 안 씻어도 돼.”
알란 원로의 페로몬 위로 덮는 게 아니라 아예 밀어낸 듯 로이드는 그의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나머지는 가면서 이야기하지.”
로이드가 먼저 걸음을 떼었고 뒤늦게 에일린이 따라갔다.
“그가 사이클 안정제를 가져갔더군. 가면서 가라앉힐 요량이야.”
에일린이 제 몸을 감싸고 있을 그의 페로몬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쉽지 않을 거예요. 용량을 늘렸고 또 성분을 조금 바꿨거든요. 사니실린이라는 게 있는데 붉은색으로 바뀌게 해요. 그래서 그걸 대체해서 다른 걸 썼으니 안정제와 부딪힐 거에요.”
말을 하면서도 에일린은 그의 페로몬이 신경 쓰여서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
“크흠. 왜 아직도 가라앉질 않는 거지?”
알란 원로는 알파였다. 그래서 사이클이 왔을 때 제대로 풀지 못하면 두통이 일었는데 지금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괜찮으십니까?”
마차가 멈춘 줄도 모르고 머리를 누르고 있던 알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동안 어떻게든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안정제, 안정제를 더 가져와.”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신호를 보내자 기사가 마차에 연결된 끈을 풀고 말을 끌고 왔다. 대공가에 있을 안정제를 가져오기 위해 그가 빠르게 달려 나갔다. 하지만 알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황궁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의 성미를 생각하면 당장 들어가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알란 원로가 한 번 혀를 차고는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흡.”
알란이 걸어가자 놀란 사람들이 분분히 양옆으로 피했다. 그들은 알란에게서 느껴지는 페로몬에 손수건이나 소매로 제 코를 막았다.
“저 무례한…….”
그중에는 황족도 있었다. 황후의 아들인 1황자인 루시드는 알란이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않은 걸 보고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루시드 황자가 알란의 앞을 가로막고 언성을 높였다.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이오.”
“아, 루시드 전하.”
“대체 그 페로몬은 뭡니까.”
“죄송합니다. 이건 제 의지로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무슨 일입니까. 혹시 사이클이라도 일어난 거라면 이리 돌아다니면 안 되지요. 본인의 주기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루시드 황자의 말이 맞았다. 알파의 러트 사이클은 오메가의 히트를 불러올 수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는 게 암묵적 약속이었다. 하지만 알란도 할 말이 있었다.
“이건 자연스럽게 일어난 사이클이 아니라…….”
촉진제를 이용해 억지로 사이클을 일으켰다고 말하려던 알란은 황자의 경멸 어린 눈빛을 발견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이자를 아무 방으로 안내해라.”
“전하. 그것이 아니라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지금은 쉬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알란, 알란 비하트입니다. 대공가의 원로이며…….”
“그만. 지금은 당신이 누군지 듣는 것보다 그것부터 누르는 게 좋겠습니다. 변명은 나중에 하세요.”
알란이 어떻게든 해명하려고 했지만 루시드 황자가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기사가 알란의 양팔을 잡아 뒤로 끌고 갔다.
“이거 놔! 전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알란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