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받은 대로 돌려주기
제크가 본관의 주방에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찻잎이 전부 떨어져서요.”
관리인으로서 떨어진 물품을 조달하는 것 역시 제크의 일이었다.
“이건 대공비 마마께 나가는 용이니 손대지 말고 다른 건 가져가도 돼.”
주방장의 말에 제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찻잎을 덜어가는데 주방장이 바쁘지도 않은지 아예 자리를 잡고 지켜보았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해.”
주방장이 팔짱을 낀 채로 제크에게 괜찮다는 듯 손목을 까딱였다.
“요새 어떠세요?”
제크의 인사에 주방장이 말도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대공 전하께서 대공비 마마께 올라가는 요리는 전부 신경 쓰라고 단단히 당부하셔서 난리 났어.”
“아, 대공비 마마요?”
“그래. 요새 대공비 마마가 자주 아프셨잖아. 그래서인지 얼마나 날카로운지 몰라. 디저트 하나 올라가는 것도 두 번 세 번 확인하라시네. 덕분에 일이 두 배로 늘었지.”
“힘드시겠네요.”
“요리야 담당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은데 다른 건 조금 힘드네. 이럴 때 비일즈 저 사람이 도와주면 좀 좋아?”
주방장의 설명에 제크의 시선이 야채를 다듬고 있는 비일즈 요리사에게 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조 요리사를 두지 않고 자기 혼자 만드는 통에 그의 요리에 촉진제를 섞기 힘들었다. 자신의 요리에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라도 발견하면 온갖 난리를 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크도 그의 요리에는 두 번째 손을 댔다가 그가 전부 폐기하는 바람에 다신 시도할 엄두가 안 났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대공비에게 올라가는 건 요리만 있는 건 아니니까.
“주방장님이 고생하시네요. 비일즈 요리사님이 나서면 더 쉬울 텐데.”
“하긴. 저 요리사한테 배우려고 들어왔으니 격려 한마디만 해도 다들 의욕적으로 움직일걸? 에휴 됐다. 저 인간 비협조적인 게 하루 이틀인가 뭐? 그래도 자기 일만큼은 완벽하니까 한편으론 편하기도 해.”
주방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남자의 말에 제크가 예의상 미소를 선보였다.
“그나저나 제크도 이제 슬슬, 어? 이봐. 그걸 거기 두면 어떡해.”
수습 요리사가 저지른 사고에 주방장이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제크는 잠시 주방장을 보다가 주머니에 넣어뒀던 찻잎을 꺼냈다. 그것은 촉진제에 담가둔 찻잎이었는데 언뜻 보기엔 아침이슬을 머금은 싱그럽게 보였다.
그것을 대공비에게 나갈 용기에 담은 제크는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리를 벗어났다. 제크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주방장이 다시 나타났다.
“그사이 갔나 보네.”
주방장이 제크가 있던 자리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쉬운 듯 굴었다. 물론 진실은 그것과 다르겠지만.
***
“마마, 어디 가십니까?”
막 트레이를 끌고 오던 제인이 밖으로 나온 에일린을 발견하고 물었다.
“응. 만날 사람이 있어서.”
“차를 준비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제인의 물음에 에일린이 트레이를 보았다. 아주 잠깐 에일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트레이를 보더니 곧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같이 가서 마시면 되겠다. 이쪽으로 올래?”
애초에 차를 마시고 움직일 필요가 없지, 중얼거리는 에일린이 오히려 잘됐다고 박수 쳤다.
에일린이 먼저 앞장서니 제인은 어디를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따라갔다. 두 사람은 곧 본관을 나섰다.
“이쪽으로.”
에일린이 한 건물 앞에서 제인에게 손짓했다.
“마마, 여기는…….”
“알란 원로를 만날 거거든.”
에일린이 해맑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들어가자.”
에일린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제인이 뒤따랐다. 넓은 입구와 높은 돔형의 천장에 시선이 빼앗긴 에일린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크다.”
“아무래도 원로님들이 머무는 곳이니까요.”
본관만큼이나 크고 넓은 복도를 걸어가며 에일린이 연신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원래 이렇게 컸어?”
“그건 아니고 증축하면서 점점 커져 갔어요.”
“그랬구나.”
에일린이 주변을 돌아보며 남은 감상을 털어내더니 이내 알란 원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거침없는 움직임에 제인이 궁금한 듯 물어봤다.
“길을 아시나요?”
처음 온 것처럼 둘러보고 놀라는데 반해 길을 아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 신기해서 그랬다.
“오기 전에 미리 알아봤어.”
집무실에서 건물 설계도를 보았으니 길은 알지만 내부의 화려함은 처음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문 앞에 다다른 에일린이 얕은 숨을 내쉬며 건물 설계도를 내밀던 로이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다 좋아. 다 좋은데 꼭 당신이 움직여야 해? 내가 해도 되잖아.’
‘내가 나서야 그나마 이 계획이 먹힐 거에요.’
로이드가 하겠다고 한다면 알란 원로는 의심부터 하겠지.
에일린의 거듭된 주장에 로이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좀처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로이드. 위험하다는 이유로 저를 감싸주기만 한다면 우린 같이 할 수 없어요.’
로이드가 계속 반대한다면 혼자라도 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자 그가 물러났다.
‘조심해.’
로이드가 미련스럽게 내뱉은 한마디를 끝으로 더는 실랑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를 설득하고 온 만큼 괜히 긴장해서 일을 망치면 안 된다. 에일린은 다시 한번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알란 원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에일린이에요.”
문 너머에서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에일린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알란 원로가 반응하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알란 원로가 나왔다. 그는 미처 에일린이 찾아올 줄 몰랐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놀랐습니다.”
“저번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왔어요.”
“들어오시지요.”
알란 원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반쯤 체념한 얼굴로 에일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러자 에일린이 뒤에 따라온 제인에게 손짓했다. 제인이 트레이를 끌고 오고, 에일린은 소파에 앉으며 제인이 앞에 내려놓는 잔을 보았다.
“같이 차를 마시며 대화하면 좋을 거 같아요.”
“그렇군요.”
알란 원로는 개운하지 못한 눈으로 찻잔을 보았다. 딱히 달갑지 않지만 이유 없이 거절하기엔 에일린의 신분이 걸렸다.
제인이 능숙하게 자리를 세팅하는 동안 에일린은 알란 원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젯밤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계획을 짜놓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마께서 하실 말씀이시라면 안정제 말이지요?”
“맞아요. 예약제를 받아들이러 왔어요.”
“그것참 다행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알란 원로가 눈에 띄게 좋아했다.
“원로님의 말대로 한 사람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면 좋은 거잖아요. 저도 계속 마음이 걸려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답니다.”
“마마의 선택이 많은 이에게 단비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에일린이 찻잔을 들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있다고 말한 그녀는 잠시 연둣빛을 띠는 차를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알란 원로는 어서 말하라고 하고 싶은 걸 참으며 그 역시 찻잔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제크에게 지시를 내렸던 게 생각났다.
제크가 어디에 촉진제를 탔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최소 대공비가 올 줄 알았다면 자신이 직접 차를 준비했을 것이다.
이래저래 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란 원로는 찻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음? 찻잎이 잘 우러났는데 별로인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마셔보세요. 제법 향이 그윽하답니다.”
에일린이 빙긋 웃으며 권유했다. 그러면서 보란 듯이 제 찻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알란 원로가 에일린을 보다가 마지못해 잔을 다시 들었다.
‘아무래도 제크에게 언제 촉진제를 탔는지 물어야겠군.’
대공비가 가자마자 물을 생각을 하며 알란 원로가 차를 들이켰다.
“괜찮나요?”
“그렇군요. 향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라고 하셨죠?”
“다른 게 아니라 확실한 기준을 두고 예약을 받으면 좋을 거 같은데 그 기준이 모호해서요.”
에일린이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감한 듯 말했다.
“회의를 해 보았는데 이렇다 할 기준이 안 나와서 조언을 얻을까 해서 찾아왔답니다.”
알란 원로가 신중한 얼굴로 에일린의 물음에 답했다.
“한 지역을 대상으로 조사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자들을 추려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란 원로가 먼저 예약제를 언급했지만 자세한 것까지 미리 생각해둔 게 없었다. 그래서 대충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고 있자니 에일린이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부여하여…… 으음. 순서를 정한 후에…… 음?”
알란 원로는 중간중간 치밀어오르는 열기에 말이 자꾸만 끊겼다.
“괜찮으신가요?”
에일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알란 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하려고 했다.
“차가 뜨거웠던 모양입, 쿨럭.”
목이 타오르는 것만 같은 열기에 알란 원로가 입을 막고 기침을 내뱉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에일린이 손수건을 내어주면서 알란 원로의 새빨개진 얼굴을 살폈다.
왜 그럴까, 에일린의 혼잣말에 알란 원로가 무심코 차를 내려다보았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