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또 다른 이름
에일린이 고개를 들자 로이드의 손등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에 온기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에일린이 당황해서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로이드가 내키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무서워할까 봐 말하기 싫었다고.”
에일린이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전생의 기억까지 뒤섞여 자신은 물론 부모님과 에단의 죽음까지 전부 알란 원로가 벌인 일이란 걸 알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까.
“언제든 말해.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돌려보내 줄게.”
로이드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에일린을 다독여줬다. 에일린이 진정될 수 있도록 로이드의 손이 연신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고 어깨를 쓸어줬다.
“물론 우리가 한 약속은 지킬 거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에일린이 눈을 내리깔았다. 돌려보내 준다는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이미 모든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용서하고 싶지 않아.’
알란 원로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자신이 받은 고통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우선 쉬고 싶어요.”
“내가 옆에 있어 줄까?”
“……아니요. 혼자서요.”
로이드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 지금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데 혼자라면 더 불안하게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에일린은 그와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가 생각해 준 건 고맙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의견에 로이드는 한발 물러섰다. 그래도 에일린이 걱정되는 마음에 그는 어린아이에게 하듯 몇 번이나 당부했다.
“중간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와. 알겠지?”
“알겠어요.”
에일린에게 두 번 세 번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가 잡은 손을 놔주었다.
***
에일린이 나가자마자 로이드는 바로 제라미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에일린이 다 알았어.”
로이드가 다짜고짜 내뱉은 본론에도 제라미는 바로 알아들었다.
“원로원의 일 말입니까?”
“그래.”
“신기하군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건 러츠 경에게 들어.”
로이드가 쓸데없는 말은 대충 넘겼다. 제라미는 로이드의 그림자 호위인 러츠 경을 언제 찾아가면 좋을지 생각하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겠지? 에일린에게 그림자 기사를 붙이도록 해.”
보이지 않는 암중 호위를 늘리라는 지시에 제라미가 누구를 붙여줘야 할지 고민했다.
“알겠습니다.”
로이드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나 에일린이 아픈 이유는 알란 원로 때문이었어.”
“원래도 그라고 생각했지 않습니까, 만은 정말 심각하군요. 어떻게 한 겁니까?”
로이드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제라미가 중간에 말을 바꿨다.
“촉진제를 만들어서 쓰고 있었더군.”
에일린과 함께 엿들었던 로이드는 이후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 제라미는 그것을 듣고 한탄을 흘리다가 또 어딘가에선 화가 나는지 콧김을 거세게 뿜어내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대공비에게 촉진제라니. 그런데 촉진제를 만들어서 쓸 줄은 생각 못 했습니다.”
“촉진제 관리를 열심히 하면 뭐해. 정작 드나드는 쥐새끼 하나가 재료만 가져가서 만들었는데…….”
그건 제라미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연구는 재료가 있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알지만 눈앞에 벌어졌으니 더는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당장 그자를 잡아들일까요?”
로이드가 잠깐 고민했다. 그냥 잡아들이기엔 뭔가 아쉬웠다. 이왕이면 받은 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를 이용할 방법을 찾아봐.”
***
창가에 기대앉은 에일린은 펜던트를 매만졌다. 미래에서 왔다는 유일한 증거이자 에단의 유품이었던 목걸이였다.
지금껏 대공가에 와서도 한 번도 빼놓지 않을 정도로 에일린은 펜던트를 아꼈다. 그건 자신이 겪은 일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했다.
에단을 잃고 부모님을 잃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해야만 했던 자신의 운명을 절대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절벽으로 몰아세운 건 패트릭이지만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건 알란 원로였다. 오빠와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가고 뻔뻔하게 로이드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알란 원로는 그때와 똑같은 결정으로 다시 한번 에일린에게서 가족을 앗아가려고 했다.
에일린이 펜던트를 열어 가족의 사진을 보았다. 보고 싶었다. 사진이 아니라 진짜 부모님을 보고 안기고 싶었다. 아까 로이드의 말이 에일린을 흔든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에일린은 사진을 쓰다듬는 것으로 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내가 지켜줄게.”
로이드의 뒤에 숨어서는 절대 가족을 지킬 수 없다. 에일린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려고 펜던트를 꾹 쥐었다.
“하아.”
눈을 감고 가슴에 대었다가 위로 올렸다. 다시 가족의 사진을 보고 싶어 눈을 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펜던트의 사진이 살짝 떴다. 아무래도 사진을 고정하던 접착제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에일린이 사진을 다시 붙일 요량으로 떼어냈다.
“……어?”
사진 뒤편에 무언가가 붙어있었다. 사진이 뜬 건 아무래도 뒤에 있던 이것 때문인가보다. 에일린이 만들어서 줄 때만 해도 이런 게 없었다.
반으로 접힌 종이였다. 그런데 언뜻 그냥 종이와 차이가 있었다. 조금 맨들하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했다. 낯설지 않아 보이는 그 종이를 보던 에일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건…….”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내자 안정제가 든 길쭉한 원통이 나왔다. 그것을 보던 에일린이 원통을 두르듯 붙은 라벨을 눈여겨보다가 다시 펜던트를 들었다. 종이가 눈에 익는 이유가 있었다.
“안정제야.”
그리고 펜던트에 있는 건 안정제에 붙어있던 라벨지였다. 에단이 안정제를 먹은 후 라벨을 떼서 사진 뒤편에 넣은 것 같았다.
에일린이 라벨지를 들었다. 왜 이게 들어있을까. 오빠는 언제 안정제를 먹었던 걸까?
오빠의 히트 사이클이 언제 언제 일어났었지? 에일린이 라벨지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결혼한 첫날 밤이겠지만 이후에 먹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걸 첫날밤에 먹었다면?
그렇다면 누군가 에단에게 안정제를 줬다는 말이 되었다. 그게 누굴지 생각하던 에일린은 반 접힌 라벨을 떼보았다. 끈적거리는 부분 위로 에단의 글씨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고마워. ……이로얀.”
이로얀이라면 에일린이 찾으려다 실패한 과거의 인연이었다. 에단이 대공가에 고용되었다고 했고…….
‘나도 결혼식 날 처음 마주쳤어. 지나가다 마주쳤고 또…… 도움도 받았고. 그런데 진짜 몰라보겠더라.’
에일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이로얀이 있었다. 그를 찾는다고 대공가를 돌아보았고 나중엔 에단의 말을 듣고 기사단 명부까지 살펴봤었다.
하지만 제인도 모르고 기사들 중에도 이로얀은 없었다. 에일린은 마지막 퍼즐을 두고 초조함을 느꼈다.
이로얀을 찾아야지만 이 모든 사건의 앞뒤를 맞출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다면 클로에 아가씨의 호위 기사인 건 위장된 직업인가요?’
‘그것 역시 러츠 경의 할 일이야. 다만 내가 일을 맡기는 건 러츠 경의 다른 이름에게 시키는 거고.’
“설마…….”
에일린이 펜던트를 쥔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혼자 있고 싶다고 선택한 게 제 집무실이라 로이드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일린은 마지막 퍼즐 조각을 어서 맞춰보고 싶었다.
에일린은 노크와 동시에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새 내가 보고 싶었어?”
서류를 보던 로이드가 들어온 사람이 에일린인 걸 알고 말했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심각한 표정에 일어나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에일린은 로이드의 상의를 꼭 잡았다. 마치 그를 놓치면 안 될 것처럼. 로이드가 자신의 옷을 쥔 에일린의 손을 보다가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무서워져서 그래? 내가 옆에 있어 줄까?”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그녀를 안정시키려 한 행동이지만 에일린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
다급하게 달려왔지만, 만약 아니면 어떡하지? 싶은 고민에 망설이던 것도 잠시 곧바로 그에게 물어봤다.
“왜 그러는데…….”
“혹시 러츠 경의 다른 이름이 이로얀인가요?”
로이드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