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진실의 이면
벌컥, 문이 열리는 것과 함께 제크가 옷장 안을 샅샅이 훑었다. 옷 사이사이 손을 넣어 확인한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예민했나 보군.”
“그럼 이후의 계획은 이대로 실행하시겠습니까?”
“으음. 우선 계획대로 촉진제를 만들어내도록 해. 그것은 대공비를 노릴 수단으로 쓰이도록 하고 진짜는 케이지에게 연락해서 받아오도록.”
“알겠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시 뒤집어쓸 자가 있나?”
“해시라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덮을 것입니다.”
“미리 작업해둬야겠군.”
“준비하겠습니다.”
두 남자의 대화는 고스란히 에일린에게도 들려왔다. 이제껏 해시를 이용했다는 걸 알자 화가 났다. 제크도 알란 원로도 전부 다른 이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에일린은 쿵쾅 뛰는 심장을 가다듬지 못했다.
‘여긴 어딜까.’
에일린은 생각지도 못한 공간으로 끌려 들어간 것보다 자신을 숨겨준 사람이 로이드라는 게 더 놀랐다. 로이드가 제 입가에 손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에일린이 눈을 깜박이니 로이드가 입을 막았던 손을 천천히 뗐다.
그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에일린은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었다. 에일린은 긴장감에 고이는 침을 연신 삼키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밀통로라도 되는 듯 로이드의 뒤로 길이 나 있었다.
“이쪽으로 와.”
에일린의 숨소리만큼이나 억눌린 소리로 속삭인 로이드가 뒤쪽을 가리켰다. 로이드가 먼저 앞장서자 에일린은 잠시 고민을 하다 그를 따라갔다. 여기서는 그를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통로의 끝에 도달한 듯 앞이 막히자 에일린이 당황해서 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 시선에 로이드는 기다리라며 벽을 두드렸다.
뒤가 뚫려있는 듯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벽이 움직였다.
“눈 감아.”
벽이 열리는 소리와 겹쳐 그의 말을 놓쳐버렸다. 에일린이 다시 말해달라는 듯 보았지만 로이드의 커다란 손이 에일린의 눈을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아 에일린이 당황한 것도 잠시 반대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빛에 적응할 정도로 시간이 흐르자 로이드가 손을 내렸다.
“눈 감으라고 했잖아.”
그는 왜 에일린의 눈을 가렸는지 말해 주며 뒤돌았다. 에일린은 그의 퉁명한 말투에도 반응할 새 없이 앞에 뚫린 공간을 보았다.
“이쪽입니다.”
한 남자가 로이드를 향해 예를 취하며 말했다. 그의 얼굴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곧 클로에의 호위 기사라는 걸 눈치챘다.
“왜 러츠 경이 여기에…… 그럼 클로에 아가씨도 있나요?”
“아가씨께선 주무시고 계십니다.”
러츠 경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등을 내보였다. 에일린은 처음 보는 방에 통로가 연결된 건 물론 러츠 경이 나와 있어서 더 상황이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얌전히 따라 가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낯설었던 길이 점점 눈에 익은 곳으로 바뀌더니 저택의 뒤편으로 돌아 나온 에일린이 새삼 주변을 돌아보았다. 귀족의 저택엔 비밀통로가 있다더니 자신이 직접 그것을 경험했다.
“내 집무실로 가는 게 좋겠지?”
로이드가 에일린을 보고 물었다. 밤이 늦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두 사람이 나눌 대화가 더 중요했다. 에일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드가 러츠 경에게 말했다.
“제라미를 부르고 경은 나를 따라와.”
“알겠습니다.”
***
익숙한 공간에 들어서자 에일린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복잡한 속을 정리하고 있자니 로이드가 에일린의 앞에 차를 내려놨다. 진정 효과를 주는 잎이 둥둥 떠 있었다.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자신의 오빠를 죽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범인이 따로 있었다.
“미안해요.”
“에일린?”
“당신을 오해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에일린이 두 손을 모으며 지금껏 그를 원망했던 모든 마음을 지웠다. 그리고 그에게 사죄했다. 그제야 로이드가 이제껏 보인 행동이 다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생각한 사람과 다르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로이드는 원래부터 에단을 죽일 사람이 아니었다.
점점 가라앉아가는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손이 차잖아.”
“그, 런가요.”
에일린이 어색하게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로이드가 잡고 놔주질 않았다.
“따뜻해지면 놔줄게.”
에일린은 뜨거운 그의 손에 안정감을 느꼈다. 아까도 이 손으로 자신을 구해 주었다. 그러다 문득 문이 열리고 보였던 기사가 러츠 경이었던 게 떠올렸다.
“왜 러츠 경이 있었죠?”
로이드는 에일린의 손을 힘주어 누르면서 차를 마시라고 눈짓했다. 그러면서 에일린의 물음에 차근히 답해 줬다.
“러츠 경이 움직여야 할 일이니까. 그는 신분을 감췄어. 내 대외적인 일을 처리하는 건 제라미 경이지만 숨겨진 일은 러츠 경이 담당하거든.”
“그렇다면 클로에 아가씨의 호위 기사인 건 위장된 직업인가요?”
“그것 역시 러츠 경의 할 일이야. 다만 내가 일을 맡기는 건 러츠 경의 다른 이름에게 시키는 거고.”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에게 그런 수하가 있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던 로이드가 마지못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건 안 물어봐?”
“……물어봐도 되나요?”
“이미 다 들어버렸는데 어떻게 숨기겠어.”
로이드가 정말 싫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에일린에게 대공가의 치부를 말해 줘야 하는 것 때문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해야 하지만 에일린은 그가 말해 주길 기다렸다. 이미 알란 원로가 모든 일을 지시했다는 걸 알아냈지만 로이드와 얽힌 이해관계 역시 알고 싶었다.
“보다시피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에일린이 움찔했다.
“내가 우성 알파가 아니었다면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대공 자리에 세우려 했겠지. 알란 원로는 욕심이 많은 자야. 대공가 자체는 높은 곳에 있길 바라고 그 안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지. 그래서 내가 대공이 되도록 한 거야.”
우성 알파가 이끄는 가문이라는 건 그 자체로도 무시 못 할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알란 원로는 칼릭스가 아닌 로이드를 택했다.
“특히나 내 나이가 어렸으니 날 이용하기 쉽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보란 듯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제멋대로 행동한 거야. 결혼을 요구하기에 당신을 데려왔고 당신이 아픈 걸 보고 안정제를 맡겨서 그가 손을 대지 못하게 했지.”
로이드는 그 나름대로 치밀하게 생각하고 움직였다.
“당신을 이용한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어.”
“그래서 더욱 마음대로 휘저으라고 하신 거고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자신에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라고 했던 말은 전부 미안함에서 나온 거였다. 로이드가 비슷하다는 듯 인정했다.
“당신을 아내로 맞은 건 형질의 이유도 있어. 베타니까. 당신이 베타를 낳아준다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아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지. 알파, 우성 알파가 아니면 안 된다는 낡은 생각을 보란 듯이 밀어버리려고.”
“만약 에단 오빠와 결혼했다면요?”
“이런 가정은 미안하지만 당신의 오빠와 결혼했다면…… 전쟁터로 갔을 거야. 아이를 만들 마음이 없거든.”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둘 사이에서 나올 아이가 형질을 띌 가능성은 매우 컸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로이드는 형질을 따지는 게 싫었다.
“알란 원로도 당신의 생각을 알았겠네요.”
“맞아. 그러니 손을 뻗었겠지.”
“그게…… 제 목숨이었고요.”
에일린은 아까 알란 원로가 한 말을 되짚어 올라갔다. 자신을 죽이고 오메가를 들일 생각. 만약 오메가를 들였다면 어떻게든 첫날밤에 로이드를 끌어들였을 거라는 무서운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에일린이 토기가 올라와 제 입을 막았다. 두려움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헛구역질만 나왔다.
에일린이 제 입을 막은 그대로 중얼거렸다.
“만약 오늘 그들의 계획을 듣지 못했다면…….”
“그만.”
로이드가 에일린의 턱을 들어 자신과 눈을 마주치도록 했다.
“당신을 지켜 주는 건 나야. 그러니 그 이상은 그만 생각해.”
에일린은 로이드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도 불안한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아무리 마음을 진정시켜보려 해도 알란 원로의 계획이 뇌리에 남았다.
에일린의 떨리는 눈동자를 본 로이드가 안타까운 감정을 내보였다. 결국 에일린에게 또 하나의 공포가 심어진 걸 안 탓이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