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단 당신이…….”
로이드가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 흐렸다. 그 뒷말이 궁금한 에일린이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로이드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몸을 돌렸다.
“당신에게 힘을 주려고 온 거니까 괜한 말할 필요 없어. 저녁에 보지.”
로이드가 에일린을 일견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에일린이 로이드의 뒷모습을 보았다. 알려줄 생각이 없는지 그가 보좌관들에게 둘러싸여 완전히 사라진 후 에일린은 도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복도를 빙 돌아 아까 나갔던 회의실로 돌아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그들의 격양된 대화가 오갔다.
“대공님께서 직관하시는 자리였잖아. 그건 곧 대공비 마마의 말대로 이뤄진다는 거야.”
“칼릭스 님도 말해 보십시오.”
지금껏 이럴 순 없다는 듯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러다 칼릭스 원로에게 화살이 넘어간 찰나 에일린이 온 것이다.
“그야 대공비께서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게 가장 좋겠지.”
“하지만 저희가 여기에 쏟은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많은데…….”
“해시. 시간과 노력보다 중요한 건 결과다. 이건 우리가 결정할 게 아니야. 그만들 떠들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칼릭스가 맥을 끊어버리자 그들로서도 더 할 말이 없는지 하나둘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에일린은 들은 적 없는 듯 구석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집무실로 돌아왔다.
‘다들 연구를 접는 걸 아쉬워했어.’
그건 그들이 이 연구 자체에 애정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미련이 남는다는 걸 좋은 의미로 해석한 에일린이 서랍을 열었다.
칼릭스가 조사해 온 인물보고서와 에일린이 집무실을 뒤져서 나온 것이었다. 지금껏 여기에서 면접을 봐온 자료였다. 면접자의 인적 사항은 물론 어떤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들었는지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에일린은 이미 몇 번이나 봐 온 듯 익숙하게 종이를 넘겼다. 한 이름이 적힌 페이지에서 멈췄다.
“제크.”
단순히 별관 관리인으로 알았던 이가 면접지에 올라와 있었다. 그건 그가 연구원으로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지원했다는 의미였다.
에일린이 이것저것을 만질 당시 제크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일린의 지시에 아무렇지 않게 약품을 들었다. 그건 다 약품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특히나 면접지에 적인 대답을 보면 약재를 잘 알고 그것을 쓰는 것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의심스러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에일린이 그의 가족관계를 보았다.
“케이지의 아들이었어.”
케이지는 에일린이 지난 과거에서 촉진제를 넘겼던 상인이었다.
***
오랜만에 들른 제크는 명부를 작성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 제크. 무슨 일이야?”
“심부름. 그런데 뭐 하는 거야?”
“처분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어.”
제크가 해시의 품에 있는 상자를 보았다. 촉진제를 만드는 약품과 기구였다. 그것을 본 제크가 해시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할게.”
하지만 해시는 그를 피하려는 듯 상체를 물리며 상자를 더욱 품에 끌어안았다.
“이건 내 일이니 내가 할 거야. 특히나 베타는 이거 만지면 안 되잖아.”
해시가 제크를 걱정하는 말과 함께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덕분에 해시를 잡을 틈도 없이 놓쳐버린 제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럼 이거라도. 어차피 이렇게 하나 드는 건 상관없잖아.”
“어?”
제크가 해시의 상자에서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살살 흔들며 말하니 해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못 말린다.”
“도와주려고 그러지. 가자.”
해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크가 그의 옆에서 약품을 든 채 따라갔다. 둘이 사라진 자리에 에일린이 나타났다. 그녀는 제크가 들었던 약품을 보고 눈을 빛냈다.
‘촉진제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
역시 그는 해시를 만나러 가볍게 드나드는 자가 아니었다.
‘저 남자가 관리한다는 별관으로 가 보자.’
무엇을 발견할지 모르지만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에일린은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도록 최대한 기척을 죽여서 움직였다.
***
별관으로 들어선 에일린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관리가 잘 되어 있지만 온기가 배어있지 않았다. 묘하게 차가운 공기 속에서 에일린은 혹시나 누구와 만날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 에일린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왜 아무도 없지?’
에일린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어느 한 방에서만 흘러나오는 온기에 멈춰 섰다. 누군가 생활하고 있는 듯 그곳에서만 다른 공기가 흘러 다녔다. 에일린은 조심스럽게 안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에일린이 조금 더 대답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 별관은 어떻게 쓰이는 거지?”
에일린이 의아한 투로 중얼거리다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 느껴지지 않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 것이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에일린은 급한 대로 옷장에 숨어 들어갔다.
에일린이 숨소리를 죽인 채 옷장의 문 틈새로 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의 주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에일린이 소리 없이 기함했다. 알란 원로였다.
“오셨습니까.”
뒤이어 나타난 제크가 알란 원로에게 예를 취했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한 알란 원로는 제크의 인사를 코웃음과 함께 무시했다.
“어떻게 되었지?”
“촉진제는 전부 폐기된다고 합니다.”
“기어이 일을 쳤군.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나? 지금껏 알아서 만들어 사용해왔지 않나.”
“재료 수급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또한 실험실의 출입 자체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건방진 계집 같으니. 다 헤집어놓으려 작정했군.”
제크는 뒷짐 진 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보고할 건 다 했으니 알란 원로를 기다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계집이 아니라 오메가가 왔다면 일이 쉬웠을 텐데.”
“만약 에단 공자가 왔다면 억지로 사이클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래. 하루빨리 후계자를 낳는 게 중요하니 그렇게 했을 테지. 쯧. 베타 계집을 데려올 줄이야. 일이 전부 꼬이는 느낌이야.”
알란 원로가 신경질적으로 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저는 무엇을 할까요?”
제크의 물음에 알란 원로가 혀를 찼다.
“남은 촉진제가 하나도 없느냐?”
“그렇습니다만 하나 정도 다시 만들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들어라.”
“그 말씀은…….”
“이번엔 약을 조절하지 말고 죽이도록 해.”
“대공비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건 적당한 자들 몇몇에게 뒤집어씌우면 되겠지.”
에일린이 크게 뛰는 심장을 누르며 숨을 죽였다. 알란 원로는 자신을 죽이려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기사 몇이랑 붙었다고 하면 되겠어. 소문을 낼 자를 추리고 빠르게 일을 진행해.”
“알겠습니다.”
에일린은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다잡았다. 과거 에단을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자 막혔던 속이 뚫린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분노가 치솟았다.
다른 이의 목숨을 함부로 대하는 알란 원로의 잔인함에 치가 떨려왔다.
“촉진제가 사라졌으니 이를 어쩐다.”
“저…… 원로님.”
“뭐지?”
알란 원로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제크가 말을 끌었다가 대답했다.
“아버지의 고객 중 약을 만들 줄 아는 자가 있습니다.”
“누구지?”
“대공비였습니다.”
에일린이 케이지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봤듯이 제크 역시 자신을 알고 있었다.
“약을 만들 줄 안다고?”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대공가에 들어오기 전에 저희 아버지를 불렀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무슨 약이라고 하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형질에 관한 것입니다.”
“웃기는군. 베타 주제에 형질인의 약을 만들어내다니 말이야.”
연구원 중엔 베타가 많은 걸 모르는지 알란 원로는 에일린을 깎아내렸다.
“그런데 아버지 말로는 촉진제인 거 같다고 합니다.”
“뭐?”
제크의 말에 알란 원로가 놀란 소리를 냈다.
“예전에 원로님께 부탁해서 받았던 안정제 실은 아버지가 요구했습니다. 약을 만드는 사람에게 실험을 위해 내주었는데 그게 대공비였고 연구 결과는 안정제가 아닌 촉진제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촉진제가 엄한 곳에서 만들어졌군. 가져와야겠어.”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그게 확실한지도 모릅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설령 다른 약이라 해도 가져오는 게 좋지 않나.”
“만약 그 와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다. 정 꺼림칙하다면 가문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안 그래도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어.”
순간 충격을 받은 에일린이 휘청거렸다. 그러자 옷이 밀리며 옷걸이가 끌리는 소리가 나버렸다. 둘의 대화가 끊기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에일린이 옷에서 떨어지고도 둘은 대화를 잇지 않았다.
‘들켰어.’
그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에일린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제크였다. 옷장에서 더 벗어날 곳이 없었다.
에일린이 눈을 꼭 감았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미 그들의 대화를 다 들었으니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이건 단순히 대공비라고 해서 넘어갈 게 아니었다.
그때 아무것도 없었던 검은 공간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와 에일린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에일린의 몸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