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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54)화 (54/120)

54화. 단서

조사를 마친 칼릭스가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어쩐 일인지 에일린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녀는 방금까지 보던 종이를 슬그머니 내렸다. 그냥 있기에 보고 내려놓은 것 같지만 움직임이 묘하게 어설펐다.

“덥네요.”

칼릭스의 의아한 시선에 에일린이 자신의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혀보려고 했다. 집무실을 이 잡듯 뒤지려고 바쁘게 다닌 걸 감추기 위한 건데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에일린은 난감한 눈을 굴리다 칼릭스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보았다. 칼릭스가 뒤늦게 제가 왜 왔는지 떠올리고 그대로 가져온 걸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에일린이 선뜻 손을 뻗어 받았다. 그리고는 아예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칼릭스는 에일린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그사이 제법 많은 양을 넘겨본 에일린이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사람은 누구죠? 꽤 주기적으로 드나드네요.”

“별관의 관리를 맡은 자입니다. 사적으로는 해시라는 연구원과 어릴 적부터 친구이기도 합니다.”

에일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살펴보았다.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살핀 에일린이 그 종이 뭉치를 내려놨다.

“전부 재배치할 거예요.”

“전부 말입니까?”

“네. 제가 관리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는 상관없겠죠?”

에일린은 제가 생각해둔 바를 차례로 나열했다.

“우선 실험실을 오갈 때 적는 명부를 준비해주세요. 또한 어떤 이유로 왔는지 적도록 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출입을 통제시키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지금껏 그런 게 없어도 비밀 유지가 되었습니다. 안정제가 우리 대공가에서 나오는 것을 연구원의 모두가 알지요. 그러나 세상은 모르고 있습니다.”

“대공가에서 충분히 비밀을 엄수하는 건 알아요. 그래도 이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에일린이 미소를 띠며 말했지만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내린 첫 번째 지시였다. 칼릭스는 첫날부터 이리 흔들어대는 에일린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대공비 마마. 위험합니다.”

이번엔 다른 연구원이 에일린을 제지했다. 그는 에일린의 손이 닿았는지 확인하더니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맨손으로 만지면 위험합니다. 그러니 꼭 만지시려거든 장갑을 끼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

해시처럼 제지하는 연구원 때문에 에일린이 손을 내렸지만 바라보는 눈에는 미련이 담겨 있었다.

“뭐가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은지. 벌써 몇 번째 만류인지 셀 수가 없어.”

칼릭스와 만나고 난 후 에일린은 이것저것 만져 보려다가 제지당했다. 그건 처음에 봤던 해시일 때도 있었고 그 자리를 지나던 다른 연구원일 때도 있었다.

“그건 당연합니다. 이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은 특히나 조심 또 조심합니다.”

자신을 제이닌이라 밝힌 연구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다가 뒤늦게 슬그머니 에일린의 눈치를 보았다. 대공비에게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은 그녀가 다른 볼일이 떠올랐다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때까지 불퉁해 하던 에일린은 억지로 만든 표정을 지우고 실험 도구를 보았다. 가볍게 스쳐만 봐도 모두 하나같이 정갈하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거기다 위험할 수 있는 건 따로 라벨까지 붙여가며 쓴 게 연구원들의 성격을 드러냈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보던 에일린은 인기척이 들리자 바로 눈에 보이는 약품에 손을 뻗었다.

누군가 또 말리겠지. 그건 연구원만이 아니라 이 건물에 오가는 모두가 보이던 반응이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던 반응이 오지 않았다. 에일린이 뒤늦게 돌아보니 한 남자가 멀뚱히 서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둘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에일린이 제 손을 보는 남자를 보고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건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남자의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게 구는 모습에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내렸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거든. 네가 들어서 보여줘.”

에일린의 요구에 남자, 제크는 성큼 걸어오더니 아무렇지 않게 약품을 쥐었다. 그 모습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제크는 에일린이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들어줬다. 에일린은 약품을 조금 보고는 별 게 없으니 도로 내려놓을 것을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제크가 약품을 내려놓으니 에일린은 다른 것에 흥미를 가졌다. 뚜껑이 닫힌 다른 플라스크를 살살 건드렸다. 물론 이번에도 제크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에일린은 제 손을 향한 시선을 알고도 모른 척 이것저것 만져댔다.

***

“어쩜 이러냐. 그동안 잘만 드나들었는데 아무 문제 없었잖아.”

“난 괜찮아.”

제크가 두 손을 저어가며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해시가 방방 날뛰었다.

“솔직히 네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어. 별관 돌보듯이 해 줬는데 왜 갑자기 출입을 통제한다고 드나들지 말라고 하냐고.”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대공비 마마의 말이 맞잖아. 중요한 연구를 하는 곳이니까.”

그건 해시도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다른 말 하지 않았다.

“일은 어때?”

“좋아.”

제크의 간단한 대답에 해시가 그게 다냐는 듯 바라보았다.

“관리인이 뭐가 좋다고.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건 어때?”

“난 이것도 감사한데? 안정적인 직업이잖아. 잘릴 걱정 없고 실험하다가 폭발할 위험 없고 너도 매번 볼 수 있고.”

제크가 손을 들어 좋은 점을 하나씩 꼽아봤다.

“이제 날 못 보는데 뭐가 좋다고…….”

해시가 웅얼거렸다. 소꿉친구였고 더 훌륭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이리 별관의 관리를 하는 게 못내 마음이 쓰였다.

“네가 날 보러 오면 되지.”

“그래. 내가 간다.”

해시가 제크의 어깨를 치더니 시계를 확인했다.

“으악 늦었다.”

“늦어?”

“어. 오늘 회의한다고 했거든.”

“무슨 회의?”

제크의 질문에 해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비 마마가 오늘 회의를 한다고 하셨어.”

“그분이라면 어제 처음 오시지 않았어? 거기다 기구 다룰 줄도 모른다면서.”

“윗분들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클로에 아가씨같이 특이한 분은 별로 없지. 그래도 이왕 왔으니 뭘 하고 싶은가 봐.”

“그래? 그게 뭐 같은데?”

“아무래도 촉진제에 관한 연구가 중단될 거 같아.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는 그래.”

“아깝겠네. 지금까지 그거 하나에 매달렸잖아.”

“그러니까. 뭐, 확실한 건 아니니까. 나 간다.”

해시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주던 제크는 해시가 보이지 않자 표정을 지웠다. 완벽히 무표정하게 감정을 지우자 부드러운 이미지가 사라지고 공허하게 보이는 남자만 남았다.

“대공비가 기구 다룰 줄 모른다? 그 에일린 클라우디아가?”

그의 나지막한 소리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 조용히 머물렀다 사라졌다.

***

회의실로 들어오던 연구원들은 생각지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 놀라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대공비가 주관하는 회의에 대공이 참석하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대공에게 예를 취했다.

“앉아.”

로이드가 그들에게 앉을 것을 지시하자 순식간에 자리에 사람이 찼다. 그 사이에 낀 해시도 얼떨떨함을 금치 못했다. 대공은 보통 보고만 받아 조금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다 왔나요?”

에일린의 물음에 칼릭스가 면면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부터 말할게요. 이 시간부로 촉진제는 전부 폐기합니다. 연구자료도 마찬가지고요. 더불어 여기 있는 인원은 모두 재배치될 거에요.”

일부는 역시나 하는 눈치였고 또 몇몇은 놀란 눈으로 에일린을 보았다.

“실망하지 마세요. 안정제와 마찬가지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 보면 분명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폐기가 아쉬운 한 연구원이 손을 들어 발언했다. 그는 은연중에 대공이 말려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팔짱을 낀 채 보고만 있었고 에일린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지금껏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고 들었어요. 그렇다고 아까워하기엔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없애는 게 맞아요.”

연구원은 에일린이 뜻을 굽히지 않자 기가 죽은 채로 앉았다.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 연구를 접어버리면 그들은 다른 일을 받거나 내보내질 상황에 처해버렸다.

어쩌면 대공비를 관리자로 보낸 것도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을까? 대공이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어제 오신 분께서 이리 단호한 결정이라뇨.”

해시가 아쉬움에 한마디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결정했으니 다른 의견이 없다면 끝내죠.”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 후 로이드도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동요한 연구원을 훑어본 후 미련 없이 나갔다.

“단호하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의 촉진제가 그것을 대신한다는 이야기는 안 했지.”

“하나씩 하려고요.”

에일린이 로이드를 따라 건물을 나가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도요.”

“에일린.”

로이드가 갑자기 몸을 돌리자 에일린이 그에게 부딪힐 뻔한 걸 가까스로 멈췄다. 에일린이 그의 목울대를 보다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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