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단서를 찾기 위한 한 걸음
대공가의 건물 중 하나는 온전히 연구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르기에 같은 지연 내에서도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연구원의 웅성거리는 반응이 제법 강하게 느껴졌다.
“칼릭스 님 기다렸습니다.”
한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연구원이자 제 보좌관을 담당하는 해시였다.
“지금 대공비께서 오셨습니다. 우선 응접실로 안내해드렸는데 왜 오셨답니까? 설마 그 소문 때문은 아니겠지요?”
해시 역시 대공비가 위임장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자신들과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했었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는.
“일단 모두 조용히 시켜. 괜한 말이 나가지 않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칼릭스가 해시에게 주의를 주고 응접실로 향했다. 말간 미소를 보이던 대공비가 촉진제를 만들어왔다는 말이 못 미더웠지만 일단 위임장은 내려왔다.
응접실로 들어가자 에일린이 막 찻잔을 들었다가 칼릭스를 보더니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대공님은 잘 만나고 오셨나요?”
에일린의 인사에 칼릭스가 아주 잠깐 동요했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다 이야기가 시작될 줄 알았는데 이리 만나자마자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이야. 그러나 금세 표정을 다듬고 자리에 앉는 사이 에일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갔다.
“대공께 새로운 직책을 받아오는 길입니다.”
“제 옆에 있으라고 하셨나요?”
“혹시 미리 이야기가 되었습니까?”
“그냥 그럴 거 같았어요.”
에일린이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럴수록 칼릭스는 점점 더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미리 다 알고 온 건지 아니면 혼자서 앞을 내다봤는지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에 칼릭스가 의구심을 지웠다.
“왜 이런 선택을 하셨는지 마마의 생각을 물어봐도 될까요?”
“우선 알고 싶어서요. 안정제의 판매도 그렇고 제가 모르는 게 많단 생각이 들어요.”
칼릭스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정제를 두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모른 채 판매권을 받았다. 그건 누군가 대공비를 설득시킬 수만 있다면 지금의 팽팽한 기 싸움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더욱이 대공과 원로원 사이의 갈등은 더욱 모르고 있을 거고 말이다.
‘차라리 저번에 원로원의 일을 이야기했다면 더 쉬웠을 것을.’
하지만 대공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칼릭스가 답답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대공비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설명해줄 수 있을까.
“우선 연구소를 둘러보시겠습니까?”
“좋아요.”
에일린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먼저 응접실을 나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은근한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칼릭스가 에일린의 옆에 서서 해시에게 손짓했다. 그가 주춤거리며 다가오고 있자니 대공비를 두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연구 전반으로 관리, 책임지실 대공비 마마시다.”
칼릭스의 소개에 연구원의 대부분이 경악스러워했다. 그들은 곤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칼릭스만 힐끔거렸다.
그 모습에 에일린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인지 훤히 들여다보았다. 에일린이 먼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분간 매일 보게 되었네요.”
해시가 어색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대공비에게 예를 갖추긴 하는데 정말 이대로도 괜찮을지 걱정이 한가득했다.
“오늘은 둘러보기만 할 거예요. 괜찮죠?”
“당연히…… 괜찮습니다.”
해시가 하고 싶은 말을 누르고 옆으로 비켜섰다. 에일린이 훤히 드러난 자리로 성큼 걸어갔다.
“칼릭스 님께서 말려보십시오. 저러다 아무거나 건드시면 어떡합니까. 특히나 실험실은 손만 대도 터질 게 많다고요.”
해시가 아까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내며 연신 칼릭스에게 말려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로이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 칼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켜보자.”
칼릭스는 정말 에일린이 촉진제를 만든 게 확실한지 알아볼 수 있으니 지켜볼 생각이었다.
앞장선 에일린은 아무렇게나 가는 것일 텐데도 기가 막히게 실험실 쪽으로 향했다. 우연이겠지, 싶으면서도 칼릭스는 찝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여기가 실험실이네요.”
에일린이 신기하다는 듯 문가에 서서 안을 둘러보았다. 해시가 안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칼릭스의 등을 찔렀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해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일린이 실험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멋있네요.”
실제 에일린은 환기가 잘 되어있는 구조나 언제든 피할 수 있게 마련된 문 등을 보았다. 물론 해시의 눈에는 에일린이 신기해서 보는 거라 여겼다.
에일린이 실험대를 훑어보다가 플라스크에 담긴 액체를 보려 상체를 숙였다.
“이게 촉진제인가요?”
“그렇습니다만 아직 중간단계입니다.”
“신기하다.”
에일린이 플라스크를 보다가 손을 올리자 해시가 나섰다.
“손대지 마십시오.”
그의 다급한 음성에 에일린이 어정쩡하게 손을 멈췄다.
“그렇게 손을 대시면 위험합니다. 실험실에 있는 건 최대한 눈으로만 봐 주십시오.”
“알겠어요.”
에일린이 놀란 표정으로 해시를 보다가 허공에 뜬 손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실험 도구를 돌아보는데 만지지 못하게 해서 불만이라는 감정이 서서히 올라오는 듯 표정이 가라앉았다.
“만지지도 못하니 더 볼 것도 없겠네요.”
에일린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처음의 부드러웠던 표정이 사라지자 해시가 칼릭스를 보았다. 자기는 위험해서 그런 건데 마마의 신경에 거슬린 거 같으니 도와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칼릭스는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질 뿐 해시의 눈빛이 무슨 의민지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구는군.’
자신이 들은 것과 달랐다. 그래서 의아한 와중에 에일린의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여기 남아 있어.”
칼릭스가 해시에게 더 다가오지 못하게 손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해시가 불안한 듯 쳐다보면서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에일린과 칼릭스가 나간 뒤로 해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여기냐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대공비가 다 뒤흔들고 있으니 심란했다. 그때 누군가 열린 문을 두드렸다.
“해시.”
“아, 제크.”
“여기서 뭐 해.”
“따라오지 말라셔서 서 있는 중?”
해시가 제 두 발을 가리켰다. 제크가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장난이야. 그보다 무슨 일이야?”
“어. 다른 게 아니고 잠시 시간 있어?”
제크가 해시에게 나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한편 에일린은 앞으로 자신이 있을 집무실로 들어왔다.
“할 말 있나요?”
에일린이 가볍게 집무실을 훑어보다가 칼릭스를 향해 바로 섰다.
“촉진제를 만드신 것까지는 조금 의심했습니다만 확실히 실험은 해 보셨군요?”
“그래요? 어떤 걸 보고 그렇게 느꼈을지 궁금하네요.”
“실험실에 들어가자마자 환기구와 비상구를 보셨지요?”
“맞아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보려고 했는데 정확하게 알았네요.”
“저야 대공 전하께 들었으니까요. 분명 잘 아실 텐데 왜 그리 행동하셨습니까?”
에일린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어설퍼 보이려고요. 물론 완전히 감출 생각은 없어요. 대공님이나 아가씨도 알고 있잖아요. 연구원들만 당분간 헷갈리게 할 생각이에요.”
“그렇군요.”
칼릭스는 에일린이 가벼운 마음으로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단순히 안정제, 촉진제에 관심이 가서 온 거라면 처음부터 잘 알고 있다는 걸 내비칠 수 있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알려주세요. 머물지 않더라도 잠깐 들르는 사람까지 전부요.”
에일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릭스가 연구원 명단을 꺼내다가 멈췄다.
“전부라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럼 두 시간 후에 다시 만나요.”
전부 알아오는 데 두 시간을 주겠단 소리에 칼릭스는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나왔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그보단 더 차분하고 조심스러웠던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그보단 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움직여야 했다.
칼릭스가 나가자 에일린이 오늘 아침 로이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고문관으로 둘 테니 필요할 땐 언제나 그를 찾도록 해.]
낯설어할 에일린을 위한 칼릭스의 배려였지만 전혀 달갑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안에서 많은 걸 알아봐야 하는 에일린에겐 감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로이드에게 감사 인사는 잊지 않았는데 확실히 혼자 찾아왔을 때와 칼릭스 원로와 함께 있을 때가 달랐다.
혼자 왔을 땐 전부 예를 취하면서도 다른 데를 둘러보지 못하도록 은근한 제지가 있었다. 에일린을 응접실에 두고는 일부러 차를 가져다주고 불편한 건 없는지 물어보지만 다른 질문은 건네오지 않았다.
마치 처음 대공가에 왔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의 에일린은 어디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에일린이 원하는 건 연구원의 통제가 아니라 비밀을 알아낼 단서였다.
두 시간. 칼릭스가 의심하지 않게 정해준 시간. 그것은 지금 에일린이 마음껏 뒤져 볼 수 있는 한정된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