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조언자이자 보호자이자 보좌관
“그리고 난 촉진제를 먹고 있었고요.”
에일린의 폭탄 발언에 촉진제를 보던 로이드가 충격으로 얼어버렸다.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다시 말해 봐.”
“촉진제를 먹고 있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어. 아직 사람에게 실험할 단계가 아니라 함부로 빼 오지 못해. 매번 관리도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그런데 제가 먹었어요.”
에일린이 무덤덤하게 로이드를 응시했다. 에일린은 자신이 만든 촉진제를 건네줄 때부터 로이드에게 다른 가정을 말하고 싶었다.
“잘 관리한다 해도, 다른 누군가 이렇게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걸요?”
투명한 원통을 내미니 로이드가 쉽게 받아들지 못했다.
“이건 어디서 났지?”
“연구자료 보고 제가 만들었어요.”
“새삼 그 능력이 탐나네.”
로이드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는 에일린에게 제조법을 넘긴 적이 없었는데 알아서 촉진제를 만들어냈다.
“기본적으로 약재의 성질을 알고 그것을 조합할 양만 알 수 있다면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게 아니야.”
로이드도 안정제를 연구해봐서 알았다. 에일린처럼 그 성분과 양을 보고 만든다는 것은 자신과 결이 다른 능력이었다. 약재를 넣는 순서도 중요하지만 단순배합인지 복합배합인지 등 따질 게 많았다. 하지만 에일린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촉진제를 만들어봐서 아는 걸 수도 있어요.”
에일린은 로이드가 손에 쥔 제 촉진제까지 가져와 책상 위에 나란히 두었다. 투명한 액체와 붉은빛을 띠는 액체는 페로몬의 양을 늘려주지만 그 성질이 달랐다. 에일린이 투명한 색의 액체를 가리켰다.
“당신 말대로 이 촉진제는 못 써요. 자칫 베타에게 쓰인다면 큰 사고가 일어날 거에요. 페로몬 대신 베타의 생기를 억지로 끌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로이드가 에일린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던 내용이었다. 아직도 연구 중이고 이것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그는 다른 대안이 없어서 놔두고 있던 것뿐.
“그런데 이것을 누가 저한테 썼잖아요.”
에일린은 로이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은근한 말을 던졌다. 가벼운 도발이었다. 누가 먹였을까. 적어도 대공가의 사람임이 분명하니 로이드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로이드는 잠시 에일린과 눈을 마주치는 듯하더니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반응을 보고 두 가지를 떠올렸다.
범인이 누군지 알거나, 아니면 로이드가 범인이거나.
시간이 흐를수록 에일린은 하나의 감정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초조함. 그녀는 로이드가 아니라고 부정하길 바랐다. 그런데 그는 에일린이 원하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내가 해결할 테니까 기다려.”
로이드가 일어나며 말했다. 에일린이 밖에 나가려는 로이드를 막아서며 팔을 뻗었다.
“기다리라고요? 저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가요? 왜요?”
“나한테 맡기라는 거야.”
“하지만 이건 제가 알아냈어요.”
“누가 뭐래? 잘했어.”
로이드가 외려 에일린을 칭찬하면서도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강하게 나갔다.
“제대로 이유를 말해 주세요. 제가 움직이면 안 될 이유가 뭐죠?”
“위험해.”
“만약 제가 말하지 않았으면요?”
“뭐?”
“제가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잖아요.”
“그래도 당신은 지켰어.”
로이드의 말대로 어느 순간부터 두통이 일지 않았다. 누군가 제 음식에 촉진제를 탔던 걸 멈췄다는 의미였다.
“저는 가만히 못 있어요.”
“에일린.”
“제가 당신에게 이 모든 걸 말한 이유는 가만히 있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에일린은 아직 로이드를 향한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부딪힌 건 그녀만의 이유가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에일린, 이건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권한.”
에일린이 로이드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녀가 로이드에게 얻고자 하는 건 단 하나였다.
“이 연구를 내 마음대로 흔들 수 있는 권한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만든 촉진제 넘겨줄게요.”
에일린이 대답을 듣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로이드의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그리고 로이드가 제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저번에 그랬잖아요. 언젠가 세상에 나왔을 거라고요.”
로이드는 에일린의 생각이 중요한 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곧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여기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짓자 로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낮췄다.
“왜 그런 조건을 거는 거야.”
그는 에일린이 촉진제를 먹은 걸 알면서도 물러나는 게 아니라 더욱 깊이 개입하려는 게 불만이었다.
“더 깊게 들어와 봐야 당신만 다쳐. 그러니 여기서 나한테 맡겨.”
“로이드.”
에일린이 지금껏 강하게 굴던 것과 다르게 돌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변화에 로이드가 슬쩍 고개를 뒤로 뺐다. 무슨 생각이냐는 듯 로이드의 눈빛에 불신이 머물렀다.
“믿을만한 상대에게 이 실험의 통제를 맡겼다면서요. 절 믿으면 그걸 달라는 거예요.”
에일린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로이드에게 권한을 받자마자 대공가의 모든 사람을 용의자로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로이드는 에일린이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걸 알고 한숨 사이로 말을 흘렸다.
“치사하게 나오네.”
“촉진제를 주는 대가인데 이것도 부족하죠.”
에일린이 친절하게 로이드의 손에 펜을 올려줬다. 어서 권한 위임서를 적어달라는 재촉에 로이드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책상을 돌아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위임장이 적힌 한 장의 종이를 꺼내 펜을 갖다 댔다.
그의 유려한 글씨가 채워지는 걸 확인한 에일린이 억지로 지었던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미소와 함께 로이드의 손에서 위임장을 받아들였다.
‘두고 봐.’
전부 밝혀줄 테니까.
로이드의 손을 보느라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
다음 날 아침 대공비가 새로운 권한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다들 어떤 권한을 받았는지 궁금해합니다. 물론 전 알지만요.”
칼릭스가 지그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자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아내를 앉힌 이유를 듣고자 로이드를 찾아왔다.
“아무리 부부 사이가 제일이라지만 숙부인 저로서는 서운함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그럴 수 있습니까?”
“옆에서 잘 도와주세요.”
“그게…… 그게 할 말입니까?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설명 하나 없이요?”
칼릭스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로이드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애초 설명해줘야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렇게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 불편한 침묵에 진 건 칼릭스였다.
“대공님께서 하신 일이니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그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웃기고요.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지요.”
“숙부라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원로가 아닌 숙부란다. 다 받아줄 걸 알고 부린 땡깡에 칼릭스가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숙부라고 부른 김에 쓴소리 조금 하겠습니다. 대공께서도 물론 잘 아시지만…….”
‘아시지만’에 유난히 발음을 세게 줬다.
“이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공비께서 안정제의 판매를 맡았다고 해서 촉진제를 주다니요.”
“잘 압니다.”
“그래요. 클로에에게 들었습니다. 이런 약에 관심이 많다고요. 연구도 해 본 경험이 있다고요. 그러나 이건 다릅니다. 촉진제입니다. 촉진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직접 만들어왔거든요.”
“어떻게 알겠습니까. 직접…… 직접 만들었다고요?”
로이드의 말을 반박하던 칼릭스가 뒤늦게 말의 뜻을 이해한 듯 눈을 부릅떴다.
“만드는 방법까지 알려줬습니까?”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됩니다. 촉진제를 만드는 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 어려운 걸 에일린이 해내더군요.”
로이드가 쉽게 내뱉는 말에도 칼릭스는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만드는 과정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요?”
“약재를 잘 알면 된다던데요?”
“그럴…… 그럴 수가.”
그게 뭐 말만 듣고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인가. 그럴 거였다면 자기들이 거기에 많은 돈을 넣어가며 연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참…….”
할 말이 없었다. 로이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권한을 준 게 이상하지 않았다.
“숙부의 일이 에일린에게 넘어갔다고 놀지 마세요. 촉진제만 만들 줄 알지 다른 건 부족합니다. 그러니 옆에서 제 아내를 잘 도와주세요.”
로이드는 칼릭스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직책을 내렸다.
“고문관으로 넣겠습니다.”
“그거 설마…….”
“에일린의 조언자이자 보호자이자 보좌관 역을 훌륭히 해낼 것을 믿습니다.”
칼릭스는 온갖 형용할 수 없는 욕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