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에일린이 먹었던 약의 정체
“대공비 마마…….”
“쉿.”
안으로 들어왔던 제인이 어두운 방에 멈칫했다. 종이 울려서 들어온 것인데 아직 안에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자고 있어.”
제인이 조용히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나려고 하니 로이드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어제 식사는 빠짐없이 했나?”
“아침에 간단히 드신 이후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하루 특히나 신경 쓰도록 해.”
“네.”
“식사는 절대 건너뛰지 못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으음.”
둘의 대화 소리에 에일린이 어렴풋이 잠결에서 깨어났다. 이불에 몸을 더 묻은 것도 잠시 에일린이 가물가물한 눈을 비볐다.
“몇 시죠?”
“11시가 넘었어.”
“오래 잤네요.”
에일린이 잠시 더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몸을 비비다가 미련을 버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나 눈은 반쯤만 떠져서 연신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로이드가 다가갔다.
“늦게 잤으니까.”
로이드가 침대에 걸터앉아 에일린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줬다.
“더 자는 건 어때?”
“일어나야 해요.”
에일린이 억지로 눈을 깜박여 잠을 털어냈다. 일찍 일어나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로이드는 에일린이 무리해서 움직이는 걸 보고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그간 에일린이 계속 바쁘게 살았으니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안 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말한다고 에일린이 순순히 따를 거 같지 않았다.
“필요한 건 없어? 먹고 싶은 건?”
에일린은 원래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다가 멈췄다. 그러다 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있어요.”
“뭔데?”
“실험 도구랑 약재요.”
로이드는 바로 어젯밤에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에일린이 오늘 무엇을 하려는지 감이 왔다. 로이드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준비해주지.”
“감사해요.”
“대신.”
에일린이 의아한 듯 로이드를 보았다.
“식사는 제때 챙기도록 해.”
“알겠어요.”
에일린이 배시시 웃었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나도 움직여 볼까.”
로이드가 나가자 에일린도 부지런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에일린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늘도 일하시려고 합니까? 에바 부인에게는 어떻게 말할까요?”
“일은 안 할 거야. 그래도 에바 부인에게도 내일 오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에일린이 집무실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안을 본 에일린이 놀라서 곧바로 제인을 향해 돌아섰다.
“제인, 잠시만.”
에일린이 제인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방에 들어갔다.
“식사는 이 앞에 놔두면 돼.”
에일린이 문을 살짝만 연 채로 제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제인은 식사까지도 밖에 놔두라는 말에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하지만 대공님께서 마마의 식사를 신경 쓰라고 하셨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주면 되잖아. 그럼 신경 쓰는 거 맞지.”
“하지만…….”
제인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어제도 아침만 먹어서 배고플 게 걱정되었다. 그러나 에일린이 손을 들어 제인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해.”
평소엔 보지 못했던 단호한 모습에 제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제인을 내보낸 에일린이 방문을 꼭꼭 잠갔다.
에일린이 문을 등진 채 서서 방을 돌아보았다.
“역시 내가 뭘 할 줄 아는구나.”
실험 도구는 물론 약재까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제 방에 가득 찼다. 전부 로이드의 지시하에 마련된 것이다. 더불어 촉진제를 만드는 약재가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어제의 대화 이후로 자신이 촉진제를 만들어 보려는 걸 로이드가 눈치채고 준비한 것이다.
과거의 일을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촉진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촉진제를 구성하는 성분이 잘못되었다는 건 어제 알았다. 그러나 에일린이 확인해 보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독약. 베타에겐 독약과 다름없다는 촉진제가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알고 싶었다.
“직접 만들어 보고 확인해 봐야겠어.”
에일린이 결연한 눈으로 약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촉진제를 만들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일린이 늘 하던 연구와 다를 바 없었고 약재별 양만 따져서 넣는 게 나와 있으니 그대로 따라만 해도 되었다. 3시간 만에 만들어낸 액체를 눈앞에 들어서 흔들어 본 에일린이 그것을 여러 각도에서 보았다.
“무색무취에 투명한 색이야.”
이건 그냥 물과 다를 바 없었다. 에일린이 그 촉진제를 한쪽에 세워둔 채 방문을 열었다. 제인이 놓고 간 식사가 있었다. 에일린이 트레이 자체를 들고 안으로 들어와 책상에 스튜만 올려놨다. 그리고 놓아뒀던 촉진제를 가져왔다.
스튜에 촉진제를 5방울 떨어뜨린 후 수저로 섞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에일린이 촉진제를 만든 이유는 먹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내가 아팠던 이유가 이걸 먹어서 그런 거라면?”
물론 어디까지나 에일린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에일린은 결연한 눈빛으로 스튜를 보다가 한 수저를 떴다. 베타에겐 독이라고 했기에 아주 소량만 섞긴 했지만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선뜻 먹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먹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에일린이 눈을 딱 감고 스튜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먹고 난 후 미련 없이 일어났다. 다시 시험대로 돌아온 에일린은 이내 무심한 얼굴로 자신만의 촉진제를 만들기 위해 여러 시약을 꺼내 들었다.
물론 주머니에는 형질인이 먹는 두통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에…….”
에일린이 새 도구를 집었다. 대공가에서 연구 중이던 촉진제를 만들어봤으니 이젠 제 것을 만들 차례였다.
촉진제를 만드는 건 하나같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일정 온도로 끓여야 하고 빠르게 식히면 안 된다. 식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가져야 했다.
마지막 사니실린만 넣을 차례가 되었을 때 들고 있던 핀셋의 끝이 흔들렸다. 에일린이 제 반응을 눈치채며 순순히 핀셋을 내려놨다.
“이게 진짜…….”
익숙한 두통에 에일린이 충격을 받은 듯 투명한 색의 촉진제를 보았다. 지금껏 자신이 먹어왔던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더는 참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 때 에일린이 주머니에 넣어뒀던 약을 꺼내 먹었다. 눈을 감고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면서 에일린은 끓어올랐던 속을 몇 번이고 내리눌렀다.
‘그동안 내게 촉진제를 먹였던 거야.’
그동안 먹었던 게 뭔지 알고 나니 허탈하고 나직한 숨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거였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두통이 사라지자 에일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내 핀셋을 든 에일린이 마무리를 위해 제 촉진제를 들었다. 언뜻 보기엔 대공가에서 실험하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무색무취 촉진제에 사니실린이 들어가자 보글보글 거센 거품이 일어났다.
그리고 녹아 들어가는 사니실린이 있던 곳에서부터 붉은색이 점점 퍼져나가더니 액체의 색이 바뀌었다.
에일린은 자신이 만든 촉진제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이런 약을 만들어낸다는 걸 아는 사람은 로이드와 클로에 아가씨야.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어.”
에일린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봤다. 붉은빛의 액체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걸 로이드는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촉진제를 먹였던 걸까?
“확신할 수 없어서 모르겠어.”
일단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 에일린이 잠깐 생각을 하다가 두 개의 촉진제를 들고 일어났다.
“그를 흔들어 보는 게 좋겠어.”
그렇지 않고 관찰하는 정도라면 자신이 원하는 걸 알아내기 힘들 것 같았다.
***
에일린이 간 곳은 로이드의 집무실이었다.
“바빠요?”
“아니.”
로이드가 들어오라는 듯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놨다. 에일린이 뒷짐을 진 채 안으로 들어가니 로이드가 그녀의 웃음을 참는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밀린 게 없어서 할 만해.”
“다 제가 잘해서 그렇다는 거죠?”
“맞아.”
로이드가 제 책상을 보라는 듯 시선을 내렸다. 확실히 쌓인 서류가 높지 않았다.
“앞으로 종종 부탁해.”
“농담이라도 그러지 말아요.”
에일린이 정말 싫다는 듯 몸서리치면서도 로이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실은 이거 때문에 왔어요.”
에일린이 뒷짐 지던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길쭉한 원통에 붉은 액체가 에일린이 움직이는 대로 출렁거렸다.
“이게 뭔데?”
“뭐일 거 같아요?”
로이드가 예상이 가는 듯 에일린이 손에 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촉진제예요.”
로이드의 생각을 들여다본 듯 에일린이 말했다. 그러자 로이드는 촉진제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그런 로이드를 향한 에일린의 눈엔 오묘한 빛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