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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46)화 (46/120)

46화. 알란 원로의 속셈

“사이클 안정제의 판매권을 맡겼을 때 당황했습니다.”

에일린이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전날에 안정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그러니 앞의 원로 또한 하루아침에 대공비에게 판매권을 준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에일린 본인도 그 마음 잘 안다고 말하려고 할 참이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시니 페로몬 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시겠지요. 형질인에게 페로몬은 단순한 향주머니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건드는 화학물질이지요.”

“아…….”

에일린은 알란 원로의 말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베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부족했다.

‘내가 잘 모르니 가르쳐주겠다는 걸까?’

단순히 그렇게 느낄 뿐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에일린이 말을 아끼고 있으니 알란 원로가 조금 더 설명해 줄 요량으로 말했다.

“안정제를 개발했을 때 대륙이 전부 안정제를 주목했습니다. 지금껏 억제제만으로는 부족한 것을 안정제가 채워줄 것이라 기대했으니까요. 그런데 결과는 보다시피 이렇습니다. 손꼽히는 수급으로 인해 대륙은 여전히 안정제를 원하고 있습니다.”

알란 원로의 긴 설명을 끝까지 들은 에일린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안정제의 생산을 늘려야 한다는 건가요?”

“그리해야 많은 자들이 안정제를 가져갈 수 있지요. 후에 안정제가 우리 대공가에서 나온다는 것까지 밝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우리 대공가를 향한 칭송이 끝없이 오를 것입니다.”

“그런가요.”

에일린이 일견 알란 원로의 말에 흔들린다는 듯 동조했다.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생각에 빠져들고 있으니 알란 원로가 남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지웠다.

“이번에 마마께서 판매권을 받게 되었으니 생산량을 조절하면 어떻겠습니까?”

드디어 알란 원로의 목적이 나왔다. 그는 로버트 원로를 움직이지 않고 직접 에일린을 찾아왔다. 에일린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아예 상세한 계획까지 다 알란이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 마음대로 그렇게 늘려도 될지 모르겠어요.”

“마마의 결정이 대륙의 숨통을 틔워줄 것입니다. 사이클로 고통받는 형질인을 구원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에일린이 생각에 빠진 동안 알란 원로는 여유롭게 대공비의 집무실을 돌아보았다.

‘대공이 지시했다고 하더니…….’

대공의 집무실과 거의 흡사했다. 대공비가 일을 해 봐야 얼마나 한다고 이렇게 버젓한 집무실을 만들어놨는지.

힘없는 백작가에 베타 여인이라는 이유로 알란 원로는 에일린을 무시하고 있었다.

“저는…….”

에일린의 목소리에 알란 원로가 여유롭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그녀의 얼굴에 혼란한 흔적이 가득했다. 한껏 찡그린 미간이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랬다. 에일린은 아예 눈을 감고 길게 숨은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거절하면 매몰찬 사람이 되어버리니 생산량을 올리는 쪽으로 답을 하는 게 맞았다.

“당장 생산량을 늘리고 싶지 않아요.”

에일린의 거절에 알란 원로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거절이 불편한 에일린이 그를 보지 않아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도 사이클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물론 안정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알아요.”

알란 원로의 말은 에일린을 혹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이클로 인한 고통이야 에일린도 겪어봤으니 모를 리가 없다. 알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대공님께서 수량을 정해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에일린이 용기 내어 알란 원로를 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상태로 또박또박 말했다.

“원로의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그러니 대공님이 돌아오시면 여쭤본 후에 결정하고 싶어요.”

에일린은 소신껏 대답했다. 자신이 결정권을 가졌다고 해서 다급히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다. 조금 더 신중하게 결정하는 게 먼 미래를 보면 더 좋을 것을 아니까. 그래서 에일린은 알란 원로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허허 이거 참. 그리 대공 전하의 뜻만 따른다면 대체 마마의 생각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대공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 안 되겠죠. 그래도 중요한 문제이니 더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갑작스럽게 그 수를 늘리라는 건 못 들은 것으로 할게요.”

에일린이 다소 밀리는 듯하면서도 제 의견을 표현하니 알란 원로의 표정이 처음과 같지 않았다. 그는 넌지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대공비 마마는 비밀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이미 예전부터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게 아닙니다. 나는 오래 원로원에 몸을 담고 있으며 많은 결정에 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조금 생각을 바꿔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란 원로는 에일린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대공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네가 뭘 알고 그렇게 제 뜻에 반하는지를 은근히 알 수 있도록 말했다.

이제껏 대공보다 더 오랜 시간을 대공가에 몸을 담아왔던 알란 원로였다. 그러니 이제 막 안정제의 비밀을 안 에일린으로서는 잔말 말고 따라오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게 아니라면…….”

에일린이 다시금 수긍이 아니라 의문형의 말을 꺼냈을 때 알란 원로가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잔주름이 일어난 콧날을 보고 에일린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대공님을 기다려도 되잖아요. 꼭 지금 결정해야 하나요?”

결국 아까와 같은 대답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에일린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공처럼 태연하게 받아치지 않고 에일린은 계속 소심하게 반응해왔지만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알란 원로는 에일린을 설득해봐야 안정제의 생산량을 늘리겠단 대답을 못 듣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시간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단기간에 그것을 늘릴 수 없다면 예약제는 어떻습니까?”

“예약제요?”

에일린이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야 급한 게 아니어도 남들까지 그런 건 아니지요.”

에일린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란 원로는 이미 거절당한 전적이 있으니 에일린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필요한 자에 한해 미리 주문을 받아보자는 거지요.”

알란 원로는 이미 하나를 양보했다. 이제 에일린이 양보할 차례라고 생각하며 그가 이번엔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에일린은 아까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대륙의 모든 형질인이 대상자가 될 텐데, 일이 많이 커질 텐데요?”

알란 원로가 말문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기실 예약이라 하지만 줄을 대서 친분이 있는 자에게 약을 주겠다는 뜻인데 에일린은 그 범위를 대륙으로 넓혔다.

“행정관을 모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해봐도 좋겠어요. 만약 혼란스럽기만 하고 틀이 잡히지 않는다면 과감히 계획을 접는 것도 염두하고요. 어떠세요?”

에일린의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알란 원로에게 향했다.

“생각해 보지요.”

알란 원로가 아예 대꾸할 마음이 사라진 듯 대충 대답했다. 에일린의 실행 가능한 계획을 생각해 보겠다는 포부 어린 말을 흘려들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일어나 보지요.”

“그러네요.”

알란 원로가 일어나자 에일린이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집무실을 나가는 건데도 알란 원로를 배웅했다.

“건방진 것.”

알란 원로가 닫힌 문 너머에 있는 대공비를 노려보았다. 손에 넣고 굴리면 좋겠는데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대공비에게 약을 쓰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다시 손을 대야겠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양을 말이다.

“네가 네 명을 재촉했음을 잊지 말아라.”

***

“후우.”

에일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칼릭스 원로와 다르게 알란 원로는 살갗을 찌르는 듯한 매서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에일린은 마음을 편히 내려놓지 못했다.

“우리 할아버지보다 무서운 분이네.”

특히 눈빛이 너무 살벌해. 에일린은 알란 원로를 직접 본 느낌을 가볍게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페로몬이 중요한 건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지.”

에일린은 아까 알란 원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작은 죄책감에 변명을 했다. 자신도 페로몬을 직접 느끼고 겪어봐서 알았다. 특히나 오메가는 알파의 페로몬에 숨을 못 쉴 정도로 괴로워하기도 하고 반대로 노곤해질 정도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건 아무리 약을 먹어도 느낄 수 없는…….

“어?”

약이라고 하니 떠오른 생각에 에일린이 놀란 소리를 냈다. 곧 에일린이 제 이마를 짚어보고 또 고개를 살짝살짝 돌려봤다. 아프지 않았다.

오늘 로이드 없이 혼자 있었는데 아픈 곳이 없었다. 그런데 로이드가 없는 오늘만 멀쩡한 게 아니었다.

“잊고 있었네.”

언제 머리가 아팠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나날이 이어지면서 완전 잊어버렸다.

언제부터였더라?

‘로이드에게 안정제를 받았던 날?’

아니다. 그때는 약을 먹고 나아졌다는 걸 알았다.

그럼…….

‘가신 회의가 열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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