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로이드의 빈자리
“다녀오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린 에일린이 한결 편안한 눈으로 대공가를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적응이 된 건지. 황궁에 몇 시간 있다가 왔더니 새삼 저택이 반가웠다.
에일린이 집사에게 가벼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
“대공님은요?”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오래 걸리나 보네요.”
“해서 마마께 말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에일린이 저택을 바라보던 시선을 집사에게로 돌렸다. 로이드가 늦게 온다는 거 말고도 제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전하께서 당분간 들어오지 못하니 대공가를 잘 부탁한다고요.”
모임에 잘 갔다 왔다고 여기던 차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잘못 들은 건 아니었다. 에일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새언니가 오빠를 대신해 업무를 봐야겠네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에일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클로에를 보았다. 자신을 도와주려고 오늘 같이 연회에도 가주고 도움도 많이 줬는데 혹시 이번에도? 싶은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오빠가 하던 일은 대외적으로 볼 수 있는 서류가 아니라서요.”
안타깝게 됐네요, 클로에의 뒷말이 바람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리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가는 클로에를 향해 에일린이 닿지 못할 손을 뻗었다.
***
에일린은 멍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부지런히 오가는 하녀들에 비해 저 혼자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하녀들은 누구도 에일린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에일린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고 얼굴에 붓을 올렸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 정신마저 없는 에일린을 대신해 제인이 그녀의 입에 직접 스튜를 넣어 주었다.
“이러기야?”
에일린이 너무한다는 듯 제인을 올려다보았다. 이걸 다 먹고 나면 집무실로 가야 하니 늑장 부린 건데 먹여줄 줄이야. 제인은 웃으며 마저 스튜를 떴다. 그리고 에일린의 입가에 대며 말했다.
“이제 대공님이 안 계실 땐 마마께서 맡으셔야 해요. 처음이라 부담스러우시겠지만 조금씩 적응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인이 그녀를 살살 달래자 에일린은 숟가락을 가져와 마저 떠먹었다.
“클로에 아가씨는?”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나가신다고 했어요.”
“바쁜 일이 뭔데?”
“날이 너무 좋아서 호수를 보러 가신다고…….”
제인의 말끝이 흐려졌고 에일린의 얼굴은 더욱 가라앉았다. 클로에가 일부러 나간 걸 안 에일린은 졸지에 울상을 지었다.
‘너무해.’
대공비가 되었다 해도 그가 맡은 업무를 자신이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아니, 조금 더 적응하면 좋았겠지만 에일린은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됐다.
그런데 이리 떡하니 맡는다고 할 수 있을지 우려스러웠다.
그런 에일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인을 필두로 대공비를 집무실로 넣는 데 성공하며 행정관이 각자 맡은 서류를 들고 기다렸다.
“대공가의 인장입니다.”
중한 물건은 집사가 직접 가져왔다.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완전히 업무에 돌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젠 진짜 어쩔 수 없어.’
더는 도망칠 수도 기다릴 수도 없었다. 에일린은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결연하게 말했다.
“급한 서류부터 처리합니다. 중요한데 아직 시간이 있다면 과감히 뒤로 미뤄두세요. 더불어 일차적으로 결재받았던 서류에 한해서는 이전에 대공님께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말해 줘야 합니다.”
언제 불안했냐는 듯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행정관들이 놀란 것도 잠시 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앞에 있던 행정관은 제 서류가 정말 급한 것인지 볼 필요도 없이 에일린에게 내밀었다.
“대공령 남단에 있는 체이스 마을입니다.”
“기억나요. 식사할 때 왔었죠?”
“……그렇습니다.”
“도망간 관리는 잡았나요? 식수와 식량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다른 문제가 있나요?”
행정관이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체이스 마을이라는 걸 듣자마자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꺼낼 줄 몰랐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 사무적으로 체이스 마을에 대한 상황을 보고했다.
“식량은 챙겨줬지만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당장 청결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어떤 병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관리할 인원을 보내긴 했지만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 필요합니다.”
“전반적인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이상으로 계속적인 도움을 준다면 다른 영지와의 형평성에 문제가 됩니다.”
에일린은 행정관이 내민 서류를 들춰보며 인구수와 생활 상태를 살펴보았다. 관리가 도망간 건 안타깝지만 딱히 그전에도 제대로 영지를 이끌지 못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렇다고 도와주기엔 다른 영지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른다고 하니 가져온 것이다.
‘완전 심각하네.’
급한 서류로 분류하기 충분했다.
“아이들은 거의 헐벗고 돌아다니고 있고 곡식을 재배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니 당장 생활하는 데는 무리입니다.”
에일린이 잠시 고민하다 인구수에 초점을 맞췄다. 남녀의 비율이 비등하고 특히나 성인의 비율이 꽤 높았다.
“일감을 주죠.”
“일 말입니까?”
“네, 천을 비롯해 옷감을 주세요. 그리고 옷을 만들도록 지시하세요. 열 벌당 한 벌을 가져갈 수 있는 조건을 내걸어 그들에게 옷을 나눠주세요. 그리고 옷값을 치러주세요.”
행정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당장은 눈에 띄는 결과가 나올 일이 더 떠오르지 않네요. 일차적으로 이것부터 시행하고 다른 건 조사해오겠어요?”
“알겠습니다. 아래에 결재만 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에일린이 밑의 하단에 어색하게 인장을 찍은 후 조심스럽게 제 이름을 적었다. 행정관이 의아한 듯 보고 있으니 에일린이 서류를 넘겼다.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있다면 누가 처리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내 이름을 적었어요.”
에일린의 설명에 행정관이 새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의 불안하던 대공비는 사라지고 작은 것 하나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대공비만 남았다.
“다음은 뭐죠?”
에일린의 부름에 뒤에 서 있던 행정관이 앞으로 나오며 서류를 내밀었다.
“퀘스크 상단과의 교역내역서입니다. 오늘까지 답을 주기로 한 상태라 가져왔습니다.”
에일린은 퀘스크 상단이 어떤지 교역물품은 무엇인지 꼼꼼하게 물어봤다. 하나하나 살피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지만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
점심도 거르고 꼬박 일에 매달렸던 에일린이 풀려난 건 8시간 만이었다. 전부 물러나고 혼자 남게 되자 에일린은 그대로 책상에 엎어졌다. 목에 걸어둔 펜던트가 흘러나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였다.
에일린이 오른손을 들어 펜던트를 쓰다듬었다. 일에 집중하느라 온 신경을 다 쏟았더니 손가락에 힘이 없어 겉에만 살살 매만지는 게 고작이었다.
“지친다.”
이런 일을 매일 로이드가 하고 있다니 정말 존경스러운 남자였다.
“아니면 이걸 알려주려고 일부러 시켰나?”
에일린이 엉뚱한 생각을 하다 실없이 웃었다. 이미 사이클 안정제를 만들었단 이유만으로 존경하기 충분한 상대인데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리가.
에일린이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저번에 로이드가 준 사이클 안정제였다. 모임도 끝나고 오늘 업무까지 마무리했으니 사이클 안정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상자를 열어 안의 안정제를 꺼낸 에일린이 눈앞에 들이밀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혼자서 만든 걸까?”
형질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억제제와 이 사이클 안정제였다. 에일린 역시 오메가로 살아왔기에 알았다. 베타일 때와 다른 페로몬의 영향을.
억제제가 그녀의 요동치는 페로몬을 잠재워주고 다른 이의 페로몬에 휩쓸리지 않게 도와준다면 안정제는 말 그대로 폭주하는 페로몬을 없애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억제제와 다르게 사이클 안정제는 희소했다.
“왜 그렇게 조금씩 내놓았을까?”
희소성으로 인해 값을 올리려고? 처음에 안정제가 나왔을 땐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공가에서 이것에 의지해 가계를 기댈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로이드가 어떤 생각으로 생산을 조금만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에게 물어보면 좋겠는데 언제 올지 모르니 조금 답답했다. 그래서인지 로이드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당분간 이대로 생산량을 유지하고 난 따로 연구해보는 게 좋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에일린이 안정제의 뚜껑을 따려고 손을 대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에일린이 안정제를 든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제인입니다.”
“들어와.”
일이 끝난 걸 알고 왔나 싶은 생각을 하며 에일린이 안정제를 내려놨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제인이 바깥을 눈짓했다.
“지금 밖에 마마를 뵙고자 온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지?”
“알란 원로입니다.”
“원로?”
원로원에서 자신을 보러 온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 에일린이 가볍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시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칼릭스 원로도 만났었으니 알란 원로라고 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들어오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