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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43)화 (43/120)

43화. 선택한 사람

에일린이 스치듯 황비들을 보았다. 자신을 향한 호감을 보인 제이나 황비, 호기심을 보이는 로지에 황비와 달리 케이트 황비는 냉담한 눈길을 내보였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케이트 황비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클로에에게 모임을 간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에일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황후가 자신을 떠보려 건넨 질문에 에일린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대공비가 되었다고 으스대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눈치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대답을 골랐다.

“저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황후 폐하께서도 절 가까이에 두고 보고 싶으셨던 거죠?”

에일린의 당돌하지만 귀여운 대답에 루사벨라 황후가 당황한 것도 잠시 웃음을 흘렸다.

“맞아요. 대공비가 정말 궁금했어요.”

루사벨라 황후가 순순히 인정했다.

“당신이 나오지 않을수록 자꾸만 소문이 부풀어 오르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루사벨라 황후가 입을 다물었다. 찡그린 미간에 굳게 다문 입술이 더 말해도 될지 싶은 고민에 찬 듯했다. 에일린은 갈등하는 그녀를 위해 선뜻 입을 열었다.

“직접 봐주세요.”

루사벨라 황후가 무슨 뜻인지 에일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에일린은 들은 그대로라며 황후를 향해 곧은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어떤 소문이든 직접 저를 보고 판단하시면 되는걸요.”

에일린의 말에 루사벨라 황후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편안한 미소를 되찾았다. 에일린은 소문이 어떤지 말하지 않아도 될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것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으로 자신감을 내비쳤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허투루 넘기지 못할 정도로 영특했다.

루사벨라 황후의 시선이 제이나 황비와 함께 온 클라우디아 백작 부인을 향했다. 에일린을 보고 있던 그녀가 황후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쳤다.

브리스가 움찔 놀랐다가 이내 차분하게 황후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루사벨라 황후는 그녀의 인사를 받아줬다.

에일린이 마음에 든 것이다.

“앞으로 종종 날 보러와요.”

“알겠습니다.”

에일린이 루사벨라 황후의 말에 담긴 뜻을 읽고 감사의 의미로 눈인사를 건넸다. 적어도 오늘 루사벨라 황후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았다.

“베타라고 하던데 맞나요?”

루사벨라 황후와 에일린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케이트 황비가 질문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케이트 황비와 에일린을 부지런히 오갔다.

에일린은 계속 자신을 불편한 표정으로 보았던 케이트 황비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얌전히 대답했다.

“네.”

“우성 알파라는 귀한 형질에 베타 아내라니요. 그러면 후계가 베타밖에 더 태어날까요.”

케이트 황비가 로지에 황비를 힐끗 보더니 입가를 씰룩였다. 그 표정을 본 로지에 황비가 한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녀 역시 베타였다. 그리고 로지에 황비가 낳은 황자는 아직 형질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케이트 황비는 아예 베타가 될 거라 단언하고 있었다.

현 황제에게는 세 명의 황자가 있었다. 루사벨라 황후가 낳은 첫째 황자는 15살이라 벌써 알파로 발현했고 케이트 황비가 낳은 11살의 둘째 황자와 로지에 황비가 낳은 5살의 셋째 황자는 아직 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케이트 황비는 제 아들이 당연히 알파가 될 거라 확신하고 로지에 황비와 에일린을 한데 싸잡은 것이다. 베타의 몸으로 낳아 봐야 평범한 베타인 것을.

로지에 황비가 반박하고 싶은 얼굴로 찻잔을 꼭 쥐었지만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케이트 황비처럼 능청스럽게 상대를 몰아붙일 재주가 없었다.

자신이 도움이 되면 좋으련만, 로지에 황비가 안타깝다는 듯 에일린을 보았다.

에일린은 케이트 황비의 말을 신중히 받아들였다. 딱히 그녀의 말을 부정할 마음이 들지 않는 듯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곧 태연히 대답했다.

“대공님은 어떤 형질을 타고나든 상관없다고 하셨답니다. 우리를 닮은 아이니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모르겠다면서요.”

물론 로이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 상관없으니까 휘젓고 오라고 했었다. 그래서 에일린은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를 닮은 아이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그리고 대공님을 닮은 아이라면 눈을 못 떼지 않을까요? 누구를 닮든 상관없이 예쁜 아이가 나올 거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로지에 황비 마마?”

로지에 황비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저도 황제 폐하께서 뮤트 황자가 날 닮아 귀엽다는 말을 많이 해요.”

“뮤트 황자님의 이야기는 저도 들은 적 있어요. 특히 눈이 예쁘다면서요?”

“맞아요. 호수처럼 맑고 깊답니다. 대공비도 언제 시간이 나면 뮤트 황자를 보러 오겠어요?”

로지에 황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에일린에게 다음에 만날 것을 말했다. 에일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언제든 불러달라는 의미로 호감을 드러냈다.

한순간에 호기심만 내비치던 로지에 황비의 마음을 샀다. 자신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공연히 미소를 짓는 로지에 황비는 에일린에게 애정을 내보였다.

그 모습을 케이트 황비가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과연 대공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형질이 상관없다고 한 게 사실이냐는 듯 에일린의 말을 걸고 넘어졌다. 에일린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뒤집으려 하는 케이트 황비의 계략에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요.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에일린은 정말 그랬다는 듯 아쉬워하면서도 환한 웃음을 내비쳤다.

‘저 잘하고 있죠?’

속으로 이 자리에 없는 로이드에게 말을 건네면서.

***

로이드가 멀리서 보이는 황궁에 눈을 떼지 못했다.

“걱정되십니까?”

제라미의 물음에 로이드가 제 이마를 검지로 쓸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건 무슨 뜻일까요?”

“에일린이라면 잘할 거 같아서 걱정되지 않아. 그런데 어떻게 잘할지 몰라서 걱정된단 말이야.”

“대공비 마마라면 훌륭히 잘 해내실 겁니다.”

로이드가 에일린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기실 누구와 만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에일린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해낼까 싶어서 그랬다.

“그래, 제법 배포도 크고 상황 파악도 잘하니까.”

지금껏 에일린이 짧게 짧게 보여줬던 모습으로도 충분히 잘 해낼 싹이 보였다.

“무기는?”

“여기 있습니다.”

잠깐 무기를 재정비하는 동안 따로 떨어져 있었던 로이드가 곧장 무기고로 향했다. 커다란 무기고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성큼 안으로 들어선 로이드가 무기고 안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이번 전쟁터에 가져갈 무기였다. 그렇기에 따로 지키는 이도 두었는데 무기의 일부가 사라졌다.

“도둑을 잡는 게 빠를까 아니면 빠진 만큼 채우는 게 빠를까?”

로이드가 팔짱을 낀 채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제라미는 로이드에게 맞춰줄 여유가 없었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보고했다.

“출정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구한다고 해도 전부 채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 도둑을 잡자고?”

“현재로서는 그것이 시간을 줄이는 데 가장 좋아 보입니다.”

“도둑이 누군지도 모르고 뒤에 누가 받쳐주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가장 좋아 보인다라…….”

로이드의 말에 제라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단순히 무기를 가져간 도둑만 잡을 생각이었는데 로이드가 배경이라고 했다.

“설마 이게 개인이 벌인 짓이 아니라는 겁니까?”

“개인이겠지. 다만 어떤 신분을 가진 개인인지 모를 뿐.”

“하지만……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없어진 양이 상당해. 혼자서 움직일 수 없으니 부리는 자가 있었을 거야. 그리고 경비를 전부 따돌리고 무기를 가져갔다 할지라도 숨기는 게 문제가 될 거야. 그걸 생각하면 손을 댈 수 있을까?”

“그건…….”

“아무리 담이 큰 자라 해도 황제의 물건을 함부로 건들지 못하지. 그것을 시행하게 해 줄 누군가가 뒤에 있지 않고서는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말했잖아.”

로이드가 처음부터 고민할 게 없었다는 듯 말끔한 웃음으로 실마리를 줬다.

“역시 무기를 채우시는 쪽으로…….”

“도둑도 잡고 무기도 채워야지.”

“네?”

“둘 다 할 거란 얘기야.”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로이드는 두 가지를 다 잡을 생각이었다. 제라미가 회의적인 생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안 될 겁니다.”

“그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어때? 이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 집에 가지 못한다.”

제라미가 놀란 것도 잠시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의문에 돌아선 로이드를 불렀다.

“대공 전하, 그럼 대공가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걸 왜 묻지? 내 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있지 않나.”

“설마 그 사람이 대공비 마마입니까?”

“잘할 거야.”

내가 선택한 사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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