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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42)화 (42/120)

42화. 스쳐버린 악연

“네. 얼마나 야무진지 몰라요. 우리 집 막내인데도 항상 장녀처럼 오빠를 걱정하고 책을 보고 연구하던 아이였어요.”

“그래요?”

“가끔 엉뚱할 때도 있어요. 한번은 제 오빠가 사이클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더니 그렇게 세상이 떠나가라 울더랍니다.”

“어머나, 마음도 여려라.”

그때가 떠오르는지 브리스가 행복한 추억에 젖어 들었다.

“오빠가 왜 아프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오메가가 되어 한 번씩 이렇게 아플 거라고 해주니 자신이 낫게 해 준다더군요.”

“그래서요?”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든 여자들의 물음에 브리스가 장난스럽게 말을 끌었다. 그러다 자기가 못 참겠는지 결국 말해 줬다.

“다음 날부터 오메가에 관한 책을 읽었어요. 그리고 약을 만들기 시작했네요.”

“그렇게 시작된 거였구나.”

에일린이 만든 약을 몇 번 먹은 경험이 있던 한 부인이 신기하다는 듯 손뼉 쳤다.

“네. 약을 만들었지요. 정작 오빠의 사이클을 가라앉히진 못했지만요.”

그렇게 노력했는데 다른 것만 만들어냈다는 브리스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제이나 황비가 아까부터 잡았던 브리스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번에 만나면 대공비로 부르겠네요. 한 번쯤 꼭 보고 싶었는데 브리스의 딸이 아니라 대공가의 안주인이라니 정말 신기해요.”

“저도 신기하답니다.”

에단이 대공비가 되는 상상은 줄곧 해왔지만 에일린이 대공비가 된 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브리스도 이번 연회에 같이 가요. 가서 직접 대공비를 보면 마음이 놓이겠죠.”

“제가 그래도 될까요?”

“나와 함께 가는데 뭐가 문제일까요. 그건 신경 쓰지 말아요.”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린 브리스는 그날 에일린이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길 바랐다.

***

황후의 주도 아래 작은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황궁으로 들어오는 마차 속에서 대공가의 문양을 박은 마차를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은 오늘 연회에 대공비가 참석한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호기심이 상당했다.

안에 타고 있는 이가 그 대공 부인이라지? 베타라던데 어떻게 우성 알파와 결혼했을까. 클라우디아가와 정략결혼이라던데 어쩜 그리 조용히 있었는지 모른다 등등 다양한 말을 쏟아내었다.

우성 알파를 탐냈던 오메가 여인들은 에일린이 베타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은근히 대공가와 연을 맺어보고자 했던 귀족들은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클라우디아가와의 결혼을 꽁꽁 비밀로 숨겨놓다가 결혼한다는 말과 함께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격한 관심을 드러내는데 에일린은 창문도 꼭꼭 닫아놓은 마차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긴장되지 않아요?”

에일린이 책에 집중하는 걸 보다 못한 클로에가 말을 걸었다. 이제 곧 연회에 참석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가 궁금했다.

“긴장되죠.”

에일린이 책에서 눈을 떼며 당연히 긴장된다고 했다. 책갈피를 꽂고 책을 덮는 행동엔 여유로움이 묻어나면서 말이다.

“이제 새언니한테는 보통의 반응을 기대 안 할래요.”

“저 정말 긴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책 읽으면서 가라앉히려고 한 거예요.”

“그래요?”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해지잖아요.”

처음엔 온갖 상념이 찾아와 집중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한번 빠져들면 책만큼 시간 잘 가는 게 없었다. 클로에가 반색해서 에일린의 책을 매만졌다.

“그건 그래요. 이거 제가 직접 서점가서 사 온 책이에요.”

“역시 아가씨가 골랐구나. 정말 재밌어요.”

“그렇죠?”

클로에는 금세 에일린과 책에 관한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던 와중에 마차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러츠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습니다.”

클로에와 에일린이 눈을 마주쳤다.

“이제 시작이네요.”

에일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비로서 맞이하는 공식적인 외출이었다.

마차가 열리자 먼저 클로에가 내렸다. 그리고 에일린 역시 제 호위 기사인 제프 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들자 순식간에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에일린은 의연히 클로에의 옆에 섰다.

조금 걱정하고 있던 클로에가 에일린의 태연한 얼굴을 보고 즐거운 기색을 드러냈다. 자신의 새언니는 역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여기며 클로에가 앞을 바라보았다.

“들어갈까요?”

에일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옮겼다.

‘황궁은 여전하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황궁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제 덩치가 작아서 그런지 외성까지만 왔는데도 담이 정말 높았고 전부 커다랗게만 보였다.

지붕을 보겠다고 고개를 젖혔었는데 지금도 황궁은 컸다. 그때는 몰랐던 무겁게 깔린 공기마저 느껴지니 절로 긴장이 솟아올랐다.

너른 복도를 걸어가고 있으니 새삼 많은 이들을 스쳐 갔다. 황성에서 일하는 자들도 있을 거고 자신처럼 손님으로 온 이도 많을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 그들은 한 번씩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아 에일린은 생경한 기분이 휩싸였다. 정말 대공비가 되었구나.

“이쪽입니다.”

안내를 맡은 시종의 뒤를 따라 방향을 돌면서 에일린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니에요.”

언뜻 낯익은 얼굴을 본 것 같았는데 너무 순식간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떠올린 에일린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착각했나 보다.’

패트릭을 봤다고 생각했다니. 첫 외출에 전남편을 마주하는 것만큼 끔찍한 건 없었다.

‘여기에서 패트릭을 볼 리가 없지.’

그도 황궁을 드나들긴 하지만 자신의 신경을 건드는 이가 많다며 오는 걸 꺼리던 남자였다. 에일린은 패트릭이 황궁에 가는 걸 싫어했다는 것을 떠올린 후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에 생각을 흘려보냈다.

에일린이 조금 늦춰진 속도를 올리며 클로에를 따라갔다.

바람이 한 차례 불고 난 후 에일린과 클로에가 있던 자리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붉은 머리칼을 전부 넘겨 시원한 이마 아래로 남자의 유독 치켜뜬 눈매가 돋보였다. 만만치 않은 성격이 느껴지는 외모지만 전체적으로 준수한 외양이라 지나가던 영애가 얼굴을 붉히며 그를 보았다.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영애와 눈이 마주쳤으나 예의상의 미소도 짓지 않았다. 그녀가 보내는 눈빛마저 귀찮다는 듯 넘기자 영애가 기분 나쁜 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패트릭이 혀를 차며 제 오른편에 선 자에게 물었다.

“누구지?”

패트릭의 물음에 그의 부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방금 지나간 영애를 말하는 게 아님을 눈치로 알았다. 원래 가던 방향을 꺾어 왔던 건 스치듯 보았던 두 여자 때문이었다.

“리하스트 대공가의 여인들입니다.”

“대공비?”

“그렇습니다. 대공비와 대공의 동생이었습니다.”

패트릭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하스트 대공이라면 검은 머리의 우성 알파지 않나,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본 두 여자 중 한 사람이 검은 머리칼을 가졌다.

그렇다면 다른 갈색 머리칼의 여자가 대공비라는 건데…….

“베타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두 여자 모두 베타였으니 상관의 질문에 누구를 뜻하는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아쉽네.”

패트릭이 입맛을 다셨다. 스치듯 봤지만 한 여자가 유독 제 마음에 들었다. 물론 모자란 감은 있지만 그 정도면 하룻밤을 보내기 좋을 듯한데 이미 다른 남자의 부인이란다.

“가자.”

미련을 가진 것도 잠시 패트릭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

“레디쉬 제국을 비추는 황후 폐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에일린 리하스트입니다.”

“어서 오세요.”

에일린의 인사에 루사벨라 황후가 인자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루사벨라 황후는 공작가에서 고귀하게 자라 전 황제로부터 부름을 받아 들어온 여인이었다. 지금은 15살의 아들을 둔 그녀는 시간의 흐름만큼 점잖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에일린은 황후가 가리킨 자리를 보더니 이내 기꺼이 가서 앉았다. 그곳은 상석에 앉은 황후와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클로에가 에일린의 옆에 앉자 뒤늦게 들어온 황비들이 자리를 보더니 반대편으로 가서 앉았다. 제이나, 케이트 그리고 로지에 황비가 황궁에 들어온 순서처럼 나란히 앉았다.

에일린이 황비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황비가 제각각 그녀의 인사를 받았고 이후 몇몇의 귀족 부인이 더 참석하며 연회가 시작되었다.

“대공비.”

인사를 나누는 동안 가만히 보고 있던 루사벨라 황후가 에일린을 불렀다.

“당신을 그 자리에 앉힌 이유가 뭔지 아나요?”

그녀의 물음에 에일린이 제 자리를 보았다. 기실 상석은 황후와 황비 순으로 앉는 게 옳았으나 자신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냐는 황후의 물음에 에일린이 슬쩍 클로에를 보았다.

‘오빠가 했던 말 기억하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던 거요.’

클로에가 에일린에게 다 괜찮다는 듯 힘을 주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대공비가 되었으니 그만한 자격을 갖췄다고 해도 좋고 어떤 말이든 에일린이 원하는 대로 말해도 좋았다.

에일린은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작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으신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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