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다 상관없으니까 기죽지만 마
알란 원로는 이 사태가 된 게 모두 자신 때문임을 알았다. 대공비를 처리할 생각으로 일을 벌였는데 로이드가 제 강력한 무기를 휘둘렀다.
그는 대공비를 건들지 못하게 그의 안정제를 넘겼다. 대공비가 죽거나 물러나면 안정제는 도로 그의 손에 들어간다. 그건 원로원이 조금도 이득을 챙길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이제 모두가 대공비에게 일이 생길까 촉을 세우고 지켜볼 것이다.
보는 이가 많아진다면 알란 원로가 아무리 완벽히 뒤처리를 해도 걸린다. 당장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원로들의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나. 그들은 이제 대공비가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라 어떻게든 친해지고 이용해야 할 상대로 여기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권력과 힘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제대로 한 방 먹었군.’
알란 원로가 쓰게 웃었다. 그는 지금껏 대공비에게 개발 중인 촉진제를 먹여왔다. 베타라 촉진제가 맞지 않으니 부작용이 나겠고 후엔 몸의 균형이 틀어져 까딱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알란 원로는 그 촉진제를 쓰는 데 거리낄 게 없었다. 어차피 아이를 갖는다고 했으니 그 약이 도움이 될지 누가 알까.
뭐가 되었든 지금까지 알란 원로는 잃는 게 없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전쟁터로 가기 전, 안정제 공급을 끊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생기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확실히 결혼이 좋긴 하군요.”
로이드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가신들이 대공비를 돌아보기 바빴다.
“내가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다른 안건이 없다면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모두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대공이 왜 회의를 열었냐가 중요할 뿐이니 더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모두가 나간 뒤로 에일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을까요?”
어제 로이드에게 미리 들었을 때도 가벼운 사항이 아니었지만 오늘 가신들의 표정을 보니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더불어 제게 떨어지지 않던 눈길들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싶은 불안감도 들었다.
“어쨌든 제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으니 나중에 다른 말 하지 않기에요. 제가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이 만들어낼지도 몰라요.”
“무섭네.”
로이드가 언뜻 무서운 듯 눈을 떴지만 진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에일린에게 맞춰준 그는 정말 아무래도 괜찮은지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다. 로이드는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마주친 알란 원로의 눈빛만을 떠올렸다. 자신의 경고를 알아들은 알란 원로가 어떻게 나올지 그게 더 중요했다.
이제 에일린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당연하고.
“전하.”
제라미 경이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는 에일린에게 약식으로 예를 취하고는 바로 로이드에게 귓속말로 보고했다. 에일린은 더는 회의실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멀어졌다.
‘그걸 내가 원하는 수만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에일린도 안정제가 아주 적게 시장에 풀리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몰랐다. 워낙 안정제에 대한 건 극비로 취급이 되며 시중에 풀린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전부 로이드가 그렇게 한 거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가던 에일린이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클로에 아가씨.”
“기다렸어요. 지금 시간 괜찮아요?”
“그럼요. 무슨 일 있나요?”
에일린은 다른 일 없다는 것을 빈손을 들어 보여주며 클로에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클로에가 초대장을 흔들었다.
“이게 뭔지 보이죠?”
“초대장이요?”
“네, 새언니가 처음으로 나타날 공식적인 자리가 되겠네요. 이 정도는 되어야 참석할 맛이 나죠.”
제대로 하나를 건졌는지 클로에의 표정이 밝으면서 비장했다. 에일린이 호기심이 들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대뜸 팔이 잡혔다.
“왜요?”
에일린은 제 팔을 잡은 사람을 돌아보기도 전에 질문부터 건넸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사람도 거의 없을뿐더러 아프지 않게 쥐는 로이드 특유의 배려를 이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갔다 와야 해서 미리 말하려고.”
로이드는 다급해 보이는 제라미 경을 보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에일린이 몸의 중심을 잡고 다시 서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로이드는 붙잡은 에일린의 팔을 놓지 않았다.
“출정식에 가져갈 무기에 문제가 생겼어.”
아까 제라미 경이 일부러 그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는데 이렇게 드러내도 될까? 하지만 제라미 경이 보고한 이후 로이드의 행동에 그 어떤 의문도 보이지 않았다.
“모임에 간다는 거지?”
로이드가 클로에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보며 말했다. 에일린이 느릿한 고갯짓으로 답했다. 아직 클로에가 가져온 초대장이 어디에서 온 건지 모르지만 가지 않을까 싶었다.
“어디를 가든 마음대로 휘젓고 다녀.”
“저 대공비잖아요. 조심하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뭐가 어때서. 다 상관없으니까 기죽지만 마.”
로이드는 뭐가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에일린을 보았다.
“고상하게 있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괜찮은데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말해 주니까 저 마음이 편해지네요.”
로이드가 별거 아니라는 듯 에일린의 팔을 놓아주며 스쳐 갔다. 제라미 경이 에일린과 클로에에게 예를 갖추고 로이드를 따라갔다.
“대공님께서 저리 말해 주실 줄 몰랐어요.”
“새언니를 걱정하는 거 같네요.”
클로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옆에서 듣기만 했는데도 로이드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 말했는지 알겠다.
“아무리 그래도 어디 가는지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휘저으라니…….”
“어딘데요?”
에일린이 로이드 때문에 놓쳤던 걸 다시 물었다. 그러면서 클로에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보았다.
“황후 마마께서 보내셨어요.”
황후 마마라고? 놀란 에일린이 초대장에 찍힌 황가의 문양을 보고 놀란 눈을 들었다.
“이 정도라면 누구도 새언니한테 뭐라고 못해요. 감히 황가에서 부르기 전에 모임을 다 거절했다는데 뭐라 하겠어요.”
“그렇긴 한데 생각보다 대단한 곳에서 왔네요.”
“이제 친해져야죠. 새언니는 대공비가 되었잖아요. 귀족가로 치면 우리 대공가를 넘어서는 곳은 없으니까요.”
클로에의 친절한 설명에도 에일린은 격차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동안 이름뿐인 백작 영애로 거의 집에만 머물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황가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
에일린이 두 팔을 벌린 상태로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황후의 초대에 응한단 답신을 보내고부터 에일린의 시간은 전부 클로에와 에바 부인에게 넘어갔다.
“새로 맞추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
에일린이 거울을 통해 뒤쪽에 앉은 클로에에게 말을 걸었다. 모임에 간다고 한 것까진 좋았는데 그게 왜 드레스부터 전부 새로 맞춰야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예쁜 옷을 입고 가는 건 알지만 지금도 에일린은 매일 놀랄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이것 중 하나만 입고 가도 괜찮으련만 클로에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 있는 건 전부 약해요. 언니의 존재감을 강하게 부여하기 위해선 새로 맞출 수밖에 없어요.”
“드레스가 너무 화려하면 제가 초라해지지 않을까요?”
그게 더 안 좋은 건 아닐까 싶어서 한 말인데 클로에는 단호한 고갯짓으로 부정했다.
“그것 역시 재단사의 일이죠. 언니의 예쁜 얼굴을 살려주는 드레스로 맞춰오는 건 그의 역할이니까 조금만 힘들어도 참아요.”
언젠가 로이드가 상인들에게 했던 말을 클로에가 똑같이 하고 있는 걸 보니 남매는 남매인가 보다. 에일린은 포기한 채 마저 치수를 재도록 꼼짝없이 기다렸다.
“다 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재단사의 말에 에일린이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이렇게 오래 치수를 잰 적은 처음이었다.
“아직 끝이 아닌 거죠?”
“당연하죠.”
클로에는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귀엽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 하나에 에일린은 더 물을 생각도 못 한 채 다가갔다.
“허리를 조금 더 세우세요. 걸음걸이 하나에 마마의 우아함이 묻어날 것입니다.”
틈을 놓치지 않는 에바 부인의 조언까지 에일린은 오늘 하루가 길겠단 생각뿐이었다.
“황후 마마께서 부르셨지만 그 자리엔 우리만 갈 게 아니에요. 알다시피 황후 마마와 자주 만나는 부인들이 참석하겠죠.”
클로에가 어떤 부인이 나올지 한 명씩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황비 마마도 나오실 거예요.”
현 황제에게는 황후를 비롯해 3명의 황비가 있었다. 에일린은 얌전히 듣고 있다 처음으로 황비란 부분에서 눈을 빛냈다.
“혹시 황비 마마가 전부 나오실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왜요?”
클로에의 물음에 에일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어머니가 제이나 황비 마마의 시녀였거든요.”
이제 자신 때문에 더는 시녀로 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제이나 황비가 제 옆에 있으라고 하는 통에 이전과 다름없이 황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도 만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에일린의 긍정적인 말에 클로에가 에바 부인과 시선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