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39)화 (39/120)

39화. 가신 회의

가신 회의를 앞두고 대공가에 머무는 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각기

친분이 두터운 이들끼리 모였는데 특히나 원로들은 그들만의 자리가 있는 듯 견고하게 무형의 벽을 세웠다.

회의실에 들어선 칼릭스가 가볍게 안을 훑어보더니 원로원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칼릭스는 자신을 경계하는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척 스쳐 갔다.

본래 칼릭스는 대공 자리를 두고 로이드와 쟁쟁하게 맞서던 후보자였다. 칼릭스를 지지하는 무리는 칼릭스가 우성 알파는 아니나 가문을 노련하게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이드는 칼릭스보다 어리기에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공이 된 건 로이드였다. 그 이유는 로이드를 받치던 원로원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어린 로이드를 이용하고자 칼릭스를 밀어냈다. 그런데 그렇게 로이드를 앉혀놨더니 칼릭스가 원로원에 들어왔다.

모두 그의 꿍꿍이가 뭔지 의심했다. 그러나 칼릭스는 매번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다 영악한 조카를 둔 덕이지.’

칼릭스를 원로원에 넣은 게 로이드였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원로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칼릭스에게 부탁한 것이다. 원치 않게 원로들과 어울려야 하는 칼릭스가 무너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알란 원로가 저기 있군.’

현 원로원에서 중심이 되는 알란 원로가 가장 영향력이 크다. 그리고 알란 원로에게 딱 붙어있는 로버트 원로 역시 나름의 영향을 미쳤다. 물론 알란 원로를 등에 지고 나서는 것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원로는 크게 힘이 있진 않으나 자신들의 자리에서 욕심에 맞게 행동하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욕망덩어리와 같았다.

칼릭스는 속마음과 다르게 원로들과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오늘도 칼릭스는 겉보기에 대공과 대치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간 바쁜 일이 있었습니까?”

칼릭스에게 말을 건 건 로버트 원로였다. 그는 칼릭스가 로이드의 집무실을 드나드는 걸 은근히 돌려 물었다.

“이번에 맡은 연구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대공께서도 심기가 불편한 듯 구는데 난감합니다.”

칼릭스가 답답하다는 듯 제 옷의 목 부근을 당겼다. 숨이라도 쉬어보고자 하는 행동에 로버트 원로가 칼칼한 헛기침을 뱉었다.

“흠. 촉진제가 어디 쉽게 만들어질까요. 그렇다고 그걸 개발해봐야 어디 쓸 데가 있다고. 차라리 안정제나 더 공급을 늘리면 좋으련만.”

“그러게 말입니다. 좋은 건 자기가 쥐고는 숙부에게는 보람 없고 어려운 일만 시키는군요”

칼릭스가 한탄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로버트 원로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거라도 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정제야 대공의 손아귀에 꽉 틀어 잡혀 있으니 촉진제는 우리 대공가의 소유가 되어야지요.”

정확히는 대공가가 아닌 원로원에서 가져가고 싶은 거겠지만.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칼릭스의 말에 알란 원로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칼릭스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로버트 원로가 이젠 알란 원로에게 말을 걸었다.

“대공이 무슨 일로 회의를 열었을까요. 설마 눈치챈 건 아닙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대공비 말입니다.”

“글쎄요. 제가 무엇을 했습니까?”

알란 원로가 지긋한 시선으로 로버트 원로를 보았다. 이 자리에 원로들만 있는 게 아닌데 로버트 원로가 눈치 없게 굴었다. 그의 머리가 모자란 게 아니었다. 다만 그는 알란의 기분에 맞추려는 데 정신이 팔려 주변을 의식 못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맞습니다. 알란 원로께서도 대공비의 형질을 우려하실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지요.”

“역시 칼릭스 원로가 잘 아는군요.”

“감사합니다.”

칼릭스가 눈치껏 알란 원로의 말을 적당히 포장했다. 그러자 알란 원로가 맞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내보이자 로버트 원로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뭐라던가요? 그저 대공비를 위해 좋은 일을 하려던 걸 대공이 알아챈 거냔 말이었습니다.”

로버트 원로가 더욱 알란 원로를 추켜세우며 칼릭스를 보았다. 칼릭스는 무너지려는 표정을 애써 다잡으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이 알란 원로에게 잘 보이려던 게 실패한 것처럼 비쳐 로버트 원로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대공비에게 무슨 짓을 한 게 맞구나.’

정작 칼리스는 다른 생각을 했다. 알란 원로가 자신을 믿으라고 해서 의심했고 심증까지 얻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확실히 들었다. 씁쓸함이 감돌며 칼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대공비가 형질의 아이를 가지는 데 좋은 약초를 들였을 뿐이니 이리 요란 떨 정도는 아니요.”

원로원들만 있을 때와 다르게 알란 원로는 대공비를 위하는 모습만 내비쳤다.

“리하스트 대공 드십니다.”

집사의 호명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문이 열리며 로이드가 들어섰고 곧이어 새로 합류하게 된 대공비, 에일린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빗장뼈 아래를 지나 어깨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네크라인에 차분한 러플로 포인트를 준 우아한 드레스가 단아한 미인인 에일린에게 맞춘 듯 잘 어울렸다.

대공비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기에 가신들이 에일린을 향한 지대한 관심을 내보였다. 생김새로만 보면 조용한 이미지를 가졌는데 그간 티타임을 밖에서 하거나 기사들에게 식사를 마련해주는 등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면 조용한 성격은 아닌 것만 같았다.

“앉으세요.”

에일린에게 쏠렸던 관심을 무심히 잘라버린 로이드가 주도권을 가져왔다.

에일린은 가장 상석에 앉은 로이드의 옆에서 소리 없이 움직여 빈자리에 앉았다. 전부 채워져 있는 와중에 유일하게 빈자리라 어디 앉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랜만이군요. 결혼식에 특히나 많은 도움을 주어서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단 말을 전하겠습니다.”

로이드가 가신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들이 반대했지만 자신은 이 결혼을 성사시켰고 지금은 제 아내를 데리고 나왔다. 로이드의 숨은 뜻을 읽은 가신들이 저마다 표정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그 분위기를 읽은 에일린이 잔잔한 미소만을 지을 뿐 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제가 대공과 결혼한 건 미안하게 되었네요.’

예전 가신 회의 때 에일린은 자신이 대공비가 될 수 있을까 전전긍긍했었던 걸 떠올리며 새삼 달라진 제 신분을 느꼈다.

“그간 대공가에 적응하고자 노력한 당신도 수고했어.”

“별말씀을요.”

에일린은 태연히 감사 인사를 받았다.

“이제 대공비가 된 아내에게 공적인 업무를 맡겨야 할 때가 되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앞으로 내 아내에게 대공가의 살림과 함께 한 가지 더 맡기고자 합니다.”

한 가지를 언급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게 이번 회의의 목적이다. 그게 뭘지 서로 돌아보며 맞춰보려는 그들이 하나둘 에일린과 로이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자기들끼리 예측하는 것보다 대공이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자 로이드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클 안정제의 독점 및 판매권을 주려고 합니다.”

좌중에 커다란 폭탄이 떨어진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제가 들은 게 사실인지 믿지 못할 눈으로 로이드를 보았다. 지금 뭐를 준다고 한 거지?

그중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알란 원로였다. 그는 일찍이 로이드가 만든 약을 욕심냈지만 좀처럼 빼앗지 못했다. 로이드를 대공으로 앉히는 데 큰 힘을 보태고도 안정제를 받지 못해 아쉬웠는데 그것을 지금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내에게 넘긴단다.

로이드는 배신감에 점철되어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알란 원로를 보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에일린에게 손을 뻗었다는 걸 알면서도 지켜보기만 하던 게 미안하고 답답했는데 한순간 막힌 속이 풀린 기분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압니까?”

알란 원로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물었다.

“압니다. 에일린에게 안정제에 대한 걸 말해 두었고 그녀는 앞으로 공급량을 결정하게 되겠지요. 만약 대량으로 공급하고 싶다고 하면 그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지금껏 로이드가 손꼽히게 만들었던 것과 다르게 말이다.

로이드의 말에서 가신들은 빠르게 제 이익을 계산했다. 대공비만 원한다면 공급량을 늘릴 수 있다?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알란 원로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던 걸 대뜸 대공비에게 주려는 이유가 뭔가?

“요즘 제 아내가 종종 두통을 호소했습니다. 이전까진 건강했는데 갑자기 얼굴이 희게 질린 모습을 보니 안쓰럽더군요. 나 하나 보고 결혼했는데 이리 자주 아프니 여간 마음이 쓰이던 게 아니었습니다.”

유감스럽다는 듯 로이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일린이 자신은 괜찮다는 듯 로이드의 손등에 손을 올려 가볍게 토닥였다. 에일린의 위로가 먹혔는지 로이드가 한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의사 말로는 심리적 긴장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마침 내가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안정제를 맡아줄 사람도 필요했고 혹시 압니까? 안정제만이 아니라 다른 약에도 관심을 주고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자신이 아픈 이유를 찾아낼지 말입니다.”

로이드가 사정을 아주 길게 풀어냈다. 그것을 칼릭스가 짧게 정리해보았다.

그러게 날 왜 건드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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