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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38)화 (38/120)

38화. 로이드의 선물

“답이 가까이에 있었네?”

에일린이 난간에 기대 바람을 맞았다. 클로에와의 대화에서 단서를 얻으면서 에일린은 일부러 차를 마셨다. 역시나 혼자 마신 차가 조금씩 에일린의 몸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통증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제가 만든 진통제를 먹으니 고통이 한 번에 가라앉았다.

만약 오늘까지 알아내지 못했다면 에일린은 조금 더 과감한 결단을 내렸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시중을 들던 이를 전부 바꾸는 것으로 말이다. 자신이 먹는 음식에 손을 대는 이가 누군지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제인을 보내고 싶지 않아 조금 결정이 미뤄졌는데 다행이었다.

“제인을 쫓아내지 않아도 되겠어. 더불어 다른 사람도…….”

에일린은 두통을 일으킨 원인을 알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그것도 형질인의 약을 이용해서 부작용을 일으키도록 했다.

하나를 해결하니 꼬리를 물고 다른 의문이 따라왔다.

“누굴까.”

대공가에서 벌어진 일이니 가장 먼저 의심할 사람은 대공이었다. 그에게 모든 책임이 가기 때문에 당연히 우선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에일린이 대공가에서 머물며 느낀 것은, 이곳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본채를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진 별채까지 건물이 많았고 공작가에서 머물지 않더라도 일 때문에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 누군가가 벌인 일이라도 대공가 안에서 벌어졌다는 이유로 대공의 책임이 되었다.

로이드를 보기 전까지 대공가라고 하면 전부 그의 탓으로 돌렸던 에일린은 확실할 때까지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에일린이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후원을 보았다.

그때였다. 혼자서 사색을 즐기던 에일린은 옆에서 들려온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로이드가 양팔로 문을 잡고 있는 걸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왜 여기서 나와?

에일린이 놀란 마음에 뒤로 상체를 빼자 등에 난간이 걸렸다.

더 물러나지 못한 채 로이드를 보고 있으니 그의 뒤편으로 익숙한 공간을 발견했다. 로이드의 집무실이었다.

원래도 집무실이 같은 층에 있긴 했지만 제법 거리가 있었다.

내 개인적인 공간이라며. 이렇게 발코니가 나란히 있는 건 개인 공간이 아니잖아.

다소 불만스러운 상황에도 로이드의 표정이 걸렸다. 미간을 찌푸린 그의 얼굴에 단호한 눈빛이 걸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긴장이 되며 남몰래 입술 안쪽을 잘근 깨물기도 했다.

“저녁은 먹었어?”

평범한 인사였다. 에일린은 어깨에 힘을 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생각이 없어서요.”

“다른 건?”

식사가 아닌 다른 것까지 물어볼 줄이야. 에일린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로이드의 눈을 피했다. 차를 마시긴 했는데 순수한 이유를 가진 게 아니라 말을 아꼈다. 그러자 로이드의 기분이 더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그의 바짝 당긴 턱과 찡그린 얼굴에 에일린이 숨을 삼켰다.

“당신의 시중을 드는 이를 모두 잡아들일까? 감히 당신을 불안하게 했잖아.”

더는 못 참겠다는 반응이었다. 에일린이 긍정의 뜻을 내비치기만 해도 당장 그 일을 해치우겠단 의도가 엿보였다.

‘아, 맙소사.’

로이드의 폭탄 발언과도 같은 말에 에일린이 그의 눈을 직시했다. 지금껏 자신이 아프다고 해도 로이드는 걱정을 하고 챙겨줄지언정 누군가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키울 걸 보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러지 말아요.”

에일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아요.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제가 아픈 걸 수도 있어요.”

에일린은 아까 알아낸 걸 비밀로 하기로 했다. 누군가 수를 쓴 것은 확실하지만, 확실한 게 없는 상황에서 말했다가 엄한 사람이 곤경에 처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지 않다는 에일린의 확고한 의지에 로이드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싶었지만 에일린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거짓이 아님을 말해왔다.

그에 로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못마땅한 마음이지만 더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로이드의 미간이 펴지자 에일린이 다행이라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로이드가 대뜸 내미는 상자를 바라보는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였다.

상자를 내려다보는 에일린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갑작스럽다는 티를 냈지만 로이드는 무심히 말했다.

“선물이야.”

“이게 뭔데요?”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받은 상자에 에일린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로이드를 보았다. 신경은 쥐고 있는 상자에게 쏠려있지만 눈은 로이드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질거리고 있었다.

“사이클 안정제야.”

“사이클 안정제구…… 안정제요?”

에일린이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 했다가 뒤늦게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로이드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사이클 안정제가 제 손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에일린이 상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줘도 되나요? 이거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잖아요. 사이클 안정제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요?”

“나는 상관없어.”

로이드의 말이 이상한지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상관이 없을까?

“없으면 만들어 줄 수도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해.”

“……대공님이 만들었어요?”

“그래.”

에일린이 놀라서 비명이 나올뻔한 걸 입을 막으며 참았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는데 제 앞에 있다니. 벅차오르는 마음 그대로 에일린이 난간을 잡은 채로 몸을 돌렸다. 서성거리던 에일린은 로이드의 말이 진심이라고 받아들이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에일린이 로이드의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진정됐어?”

“네.”

“느낀 점은?”

“오늘부터 대공님을 존경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에일린이 감사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도 에일린은 상기된 얼굴로 종알거렸다.

“처음에 이 약이 나왔을 때만 해도 정말 많이 놀랐어요. 누가 사이클을 안정시킬 약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그걸 연구할 생각을 했지?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다.”

에일린은 처음 안정제가 나왔을 때 느꼈던 걸 전부 털어놓았다.

“그런 마음으로 사이클 안정제를 따라 만들었다가 실패했지만 그래도 시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죠.”

“다행이네.”

에일린의 만면에 퍼진 미소에 로이드가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좋아할 걸 알았지만 이건 예상 이상이었다.

“그렇게 좋아?”

“네. 정말 좋아요.”

에일린이 그걸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신기한 듯 뚫어지게 보면서도 혹시나 놓칠까 상자째 들었다. 잠깐 들었다 놓고 또 상자를 돌려가면서 보고 있는 게 정말 좋아하는 티가 났다.

이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소를 보이는 에일린의 얼굴에서 행복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에일린의 반짝이는 눈동자나 발그레한 뺨 위로 내려앉은 로이드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자신이 준 선물에 기뻐하는 에일린의 얼굴이 예뻐 보였다.

계속 에일린이 좋아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로이드는 이제 제 본론을 꺼낼 때라는 걸 알았다. 에일린이 좋아할 만한 걸 주었으니 이제 그녀에게 하나의 부탁을 해야 할 차례였다.

“내일 가신 회의가 열릴 거야.”

“가신 회의요?”

에일린의 되물음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뭐든 다 들어줄게요.”

에일린은 안정제만 도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면 다 상관없었다. 슬쩍 상자를 품에 안고 있으니 로이드가 짧은 웃음을 흘리다가 표정을 굳혔다.

“사이클 안정제의 판매권을 맡기려고 해.”

에일린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의 눈을 보았다. 진지한 말투에 에일린이 제가 들고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고 다시 로이드를 보았다.

침묵에 빠져든 에일린의 얼굴이 점점 희게 질려가더니 이내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

에일린이 책상 위로 상자를 내려놓으며 그게 잘 보이도록 눈높이를 맞췄다. 안정제를 보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에일린의 입가에 행복이 걸렸다.

사이클 안정제는 길쭉한 원통에 들어있는 액체였다. 흡수력을 높이도록 액체로 만들어졌지만, 대신 보관이 쉽지 않았다. 안정제가 들어있는 통도 특수 제작한 것이었다.

“이걸 만든 사람이 대공님이었다니…….”

그래서 클로에 아가씨가 말해 보라고 했구나, 싶었다. 이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말해 볼걸.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아서 좋았다.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잔뜩 부푼 마음으로 중얼거리던 에일린이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사이클 안정제를 만든 사람은 대공. 오빠가 대공과 결혼했을 때 히트 사이클이 왔고, 그날 대공은 전쟁터로 떠났고 오빠는 괴로워하다 기사를 끌어들였다.”

하나씩 제가 아는 것을 나열하던 에일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맞는 퍼즐 조각을 두고 어떻게든 맞춰보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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