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36)화 (36/120)

36화. 로이드의 손

칼릭스가 답답함에 몸부림쳐도 로이드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물고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칼릭스의 뜻을 막았다.

“마마께 말하는 게 가장 빠르고 좋은데 왜 자꾸 답답한 소리만 하십니까.”

로이드도 알고 있었다. 에일린이 지속적으로 두통을 호소하며 그 원인을 궁금해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으니까.

하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도 칼릭스의 입장이라면 에일린에게 말하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그게 가장 좋은 걸 누가 모를까. 하지만 말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 때마다 결혼식 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술에 취했던 에일린이 내보인 본모습.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직 그게 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그녀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말하는 게 이래저래 좋습니다. 우선 원인을 몰라 답답한 것보다 낫겠지요. 그리고 원로원과의 사이는 언젠가 말해야 하니 그 시기를 당긴다고 보면 되지요.”

“…시간이 지나면 다 말할 겁니다.”

“제라미 경에게 듣자니 사이클 안정제에 관한 건 말하겠다고 했다던데요. 그건 되고 이건 안 됩니까?”

대공비에게 좋은 것만 알려주고 아닌 건 숨긴다는 건가.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낸 후에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전하.”

제라미 경이 노크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로이드가 눈으로 묻자 제라미 경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에일린이? 혹시 또 아프다던가? 아니, 내가 확인할 테니 들여보내.”

로이드는 에일린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궁금해 방금까지 보던 종이를 전부 파일 안에 넣고 가렸다. 그리고 칼릭스에게 안 나가고 뭐 하냐는 시선을 보냈다.

“안 갑니까?”

칼릭스는 미소로 때우며 같이 에일린을 기다렸다. 로이드가 다시 칼릭스를 내보내려고 하다가 에일린이 들어오자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바쁘세요?”

“아니. 무슨 일이야? 몸이 안 좋아?”

“그것도 있지만…….”

에일린이 잠깐 망설였다. 급한 일이 있다는 듯 오긴 왔는데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오늘 같이 식사해 주실 수 있나요?”

“안 될 건 없지만…….”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로이드가 당황한 투였다. 그러자 에일린이 민망한 듯 웃었다.

그 옆에서 칼릭스가 로이드에게만 들리게 잇새로 속삭였다.

“억지로 이유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군요.”

***

에일린은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넘겼다. 수프를 조금 먹다가 말랑말랑한 빵을 조금씩 잘라 먹으니 로이드가 그녀의 앞으로 김이 올라오는 스튜를 밀어주었다.

“이게 빵이랑 잘 어울려.”

에일린은 그의 추천에 빵을 조금 잘라 먹으며 스튜를 떠먹었다. 그리고는 몇 번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입에 아직 음식이 있어 말하지 못하지만, 에일린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윽고 입에 있는 걸 전부 삼킨 에일린이 신기한 듯 물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정말 잘 아시네요? 어떤 음식끼리 궁합이 좋은지 다 파악하시나요?”

“그럴 리가.”

로이드는 별거 아닌 걸로도 놀라고 반겨주는 에일린을 보더니 짧게 웃었다. 다시금 빵과 수프를 맛보는 에일린의 눈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에일린의 밝은 모습에 로이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 요리사가 한 말이야.”

“비일즈 요리사 말이죠?”

“그래. 그를 불러서 물어보지. 내가 직접 먹어보며 맞추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이잖아.”

간단하지만 아랫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이제 말해 봐. 나랑 식사하겠다고 한 이유.”

방금까지 만족스럽게 식사를 이어가던 에일린의 입가가 굳어졌다. 로이드의 말에 그녀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콧등을 찡그리며 어색하게 빵을 살펴보던 에일린이 말해왔다.

“대공님이랑 시간을 보내면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아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하는 핑계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로이드는 진지했다. 그가 계속 말하라는 듯 바라보자 에일린이 용기 내어 다음 말을 이어갔다.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대공님이랑 같이 있으면 안 아프니까 종종 이렇게 찾아올 거 같아요. 그래도 될까요?”

로이드가 에일린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에일린이 찾아오기 전까지 칼릭스가 옆에 두는 게 어떻겠냐고 하던 참이었다. 로이드로서는 에일린의 제안이 반가우면 반가웠지 거절할 게 아니었다.

“기다리지. 언제든 찾아와.”

“고마워요.”

“오늘은 뭘 했지?”

“제게 온 초대장을 읽어봤어요.”

“많이 오지 않았어?”

“많이 왔어요. 그렇게 모임이 많을 줄 저도 몰랐어요.”

에일린이 질린 눈으로 말했다. 지금도 에바 부인과 클로에의 손에 초대장이 한 움큼씩 들려오고 또 집사로부터 가져오는 양도 상당했다.

“제국의 귀족에게 초대장을 받는 기분이에요.”

그렇게 귀족이 많은지 몰랐다면서도 에일린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게 다야? 어디 갈지 정하진 않았어?”

“아직이요.”

에일린은 요즘 에바 부인에게 대공비로서 익혀야 할 예법을 배웠다. 이후 클로에가 오면 셋이서 초대장을 보낸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가문이 보냈는지, 그들의 특징은 어떤지.

수다를 가장한 이야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안 그래도 다들 절 기다리고 있을 걸 알지만 조금 신중히 결정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될지 고민도 했는데 클로에 아가씨도 전부 갈 필요가 없다고 해 줘서 마음이 놓였고요.”

에일린은 자신이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면 어떤 말이 돌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었다. 그런데 클로에가 괜찮다고 말해 주면서 한결 부담이 줄었다.

“조금만 더 신중히 골라보고 갈게요.”

“그 역시 마음대로.”

로이드는 무엇이든 에일린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다. 일견 밀어내는 듯 보이지만 에일린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에일린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로이드의 반응에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야.’

혹시나 그가 거절하진 않을까 지레짐작으로 넘기지 않길 잘했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에일린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유는 모르지만 대공과 있으면 머리가 안 아파’

이래저래 만족스러운 식사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에일린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로이드가 부르는 소리에 집사가 안으로 들어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나가더니 곧바로 행정관이 들어왔다.

“급한 서류가 있어 가져왔는데 올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로이드가 손을 내밀자 행정관이 결재서류를 내밀었다. 로이드가 종이를 넘기고 있으니 행정관이 조금 더 빠른 결재를 받기 위해 간략한 설명을 곁들었다.

“대공령의 남단에 있는 체이스 마을이 관리받지 못한 상태로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관리자는?”

“지난달 새벽에 몰래 도망갔다고 합니다. 세금으로 모아둔 돈을 들고요.”

“어디로 도망갔는지 아나?”

“지금 흔적을 찾아 추적 중이라고 합니다.”

로이드가 그 서류의 하단에 제 사인을 남기며 빈 여백에 휘갈기듯 글씨를 써 내려갔다.

“잡으면 내 앞으로 데리고 와.”

“네. 그 마을은 어떻게 할까요?”

“식수와 식량부터 챙겨. 관리할 인원이 부족하다면 마을에서 사람을 뽑고 일 년 동안 생산하는 곡식량도 알아 와. 굶어 죽는 이 없이 곧바로 처리해.”

“알겠습니다.”

로이드가 필요한 것을 몇 가지 더 쓴 종이만 따로 뜯어 행정관에게 넘겼다. 그것을 받아든 행정관이 예를 취하고 나갔다. 마저 마을의 사정을 보려고 서류를 넘기는 로이드는 어느새 식기 대신 와인 잔을 들었다.

이제 식사보다 일에 집중하고자 하는 게 보였다. 에일린은 그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도 돼.”

“조금만 더 앉아 있다 갈래요.”

에일린은 로이드와 함께하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더 있고 싶었다. 그러자 로이드의 시선이 잠시 에일린에게 향했다가 서류로 돌아왔다.

“손잡고 볼까?”

“손을 잡자고요? 하지만 대공님께선 서류를 보셔야 하는데 방해되지 않을까요?”

“오늘도 부부로서 연습해야지. 그리고 앞으로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이름을 부르는 게 좋겠어. 그 역시 연습이 필요하다면 말해.”

로이드의 제안에 에일린이 멈칫한 채로 생각에 빠졌다가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면 닿는 거 자체는 괜찮았다. 아니, 일전에 그가 기습적으로 이마에 입을 맞출 때도 얼떨떨하긴 했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가 장담한 대로 효과가 있는 걸까.

에일린이 주춤거렸지만 순순히 한 손을 내밀자 그 위로 로이드의 손이 올라왔다. 서로의 한 마디가 먼저 닿고 이어서 두 번째 마디에서 온기가 느껴지며 서로의 손을 포개어갔다. 에일린은 그 간지러운 느낌에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러다 손가락 사이를 쓰다듬는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에 다시 긴장했다.

“긴장되면 내 손을 봐.”

로이드의 말에 따라 에일린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손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손을 덮은 그의 커다란 손등에 힘줄이 돋아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이 있어 매끄럽기보단 조금은 우둘투둘하다. 검을 쥐고 펜을 쥐면서 생긴 손마디는 그의 성격을 짐작게 했다. 제게 주어진 일을 꾸준히 해온 성실함이 고스란히 손에 묻어났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패트릭의 손과 많이 달랐다.

패트릭의 손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는 펜을 쥐는 일이 드물었고 검 자체는 더욱 멀리했다. 뭐든 그의 손을 대신할 자가 주변에 깔려 있으니 그가 손을 댈 일이 많지 않았다.

이 사람은 패트릭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에 문득 안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에일린이 손에 힘을 주며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에 서류를 보던 로이드가 다소 놀란 눈을 들어 에일린을 보았다.

처음으로 보인 접촉에 대한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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