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로이드는 대공가에 오자마자 그를 기다리는 행정관에게 둘러싸여 곧바로 집무실로 갔다. 어제 시간이 있다고 여겨 같이 클라우디아가로 간 건데 억지로 시간을 냈던 건 아닌지 싶었다.
에일린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에바 부인을 만나고 혼자 식사를 해결했다. 잠깐 틈이 난 사이 클로에를 찾아가려 했지만 외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래저래 자꾸 어긋나는 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녁엔 비가 내렸다. 밖에서 티타임을 할 수 없었던 에일린은 서재에 갔다. 자기 전까지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카멜리라고 했지?”
제인이 차를 내오자 에일린이 맛을 보기 전에 물어봤다.
“그렇습니다. 마마.”
제인이 찻잎에 뜨거운 물을 타서 잠시 우리는 시간에 창가로 다가갔다. 그사이 에일린은 투명한 주전자의 색이 달라지는 걸 보다가 직접 찻잔을 가져와 따랐다. 요즘 마시기 시작한 이 홍차는 특이한 허브를 블렌딩한 듯 향이 새로웠다. 그래서 종류별로 다른 홍차를 즐기기보다 이 하나를 주로 마셨다.
에일린이 살짝 고개를 숙여 향을 맡았다. 카멜리란 잎에 제시아라는 허브를 섞었다고 했다.
“빗소리가 좋아요. 창문을 열어둘까요?”
“그것도 좋겠다.”
에일린이 차를 음미하며 대답하자 제인이 창문을 열었다.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에 에일린은 잠시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다가 책을 들었다. 제인이 에일린의 주변을 살핀 후 부족한 게 없어 보이자 조용히 서재에서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에일린은 차를 마시며 독서에 빠져들었다.
“잘 시간이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던 에일린을 부른 건 로이드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오랜만에 책을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책을 덮으며 일어서던 에일린이 순간 현기증이 돌아 비틀거렸다. 로이드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며 넘어지려는 걸 잡아줬다.
“고마워요.”
“왜 비틀거려. 아직도 아파?”
“갑자기 일어나서 어지러웠어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에일린이 로이드의 목울대가 직격으로 보이자 그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가까워서 그런지 그의 체향이 확연히 다가왔다.
에일린이 살살 제 콧등을 긁다가 고개를 들었다.
“향수 뿌렸네요?”
“향수?”
로이드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비 냄새라도 맡았나 싶지만 설마 에일린이 그것 하나 구분 못 할까 싶었다.
“네. 향수 냄새가 나서요.”
“내게 좋은 향이라도 나나 봐?”
에일린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로이드의 냄새를 표현할 말을 고민했다.
“딱 대공님 같은 냄새가 나요.”
“그게 뭔데?”
자기 같은 냄새가 뭘지 물어보는 로이드가 에일린이 방금 보던 책의 제목을 훑었다. ‘케이베른의 형질학.’ 언젠가 클로에가 아카데미에 가기 전 모아놨던 책 중 하나일 것이다.
“과일 향이요. 그런데 상큼하다기보단 무겁고 깔끔해요.”
에일린은 더듬더듬 제 생각을 최대한 잘 표현할 수 있을 만한 말을 골랐다. 한 종류가 아닌 여러 종류의 향을 블렌딩한 거 같았다.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지 에일린이 헷갈린 듯 인상을 찡그렸다.
“과일은 과일인데 따지 않은 거라 풀 향이 섞인 거 같아요.”
더는 설명할 표현이 없는지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에일린의 설명에 로이드가 다시 책을 훑었다. 형질학, 페로몬. 제2의 성. 온갖 제목의 향연 속에서 로이드의 머릿속엔 말도 안 되지만 가정 하나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에일린이 그의 페로몬을 맡은 건 아닐까 하는.
“과일…향?”
“그렇긴 한데 더는 표현할 말이 없어요.”
에일린이 헷갈린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냄새라고?”
“네. 냄새.”
로이드가 잠시 에일린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제 페로몬을 맡은 건지 아니면 정말 어디선가 나는 향수를 의미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나 향수 안 뿌렸어.”
“그래요?”
하지만 에일린은 딱히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고 여상히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향수를 안 뿌렸는데 어떻게 냄새가 나.”
로이드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에일린을 유심히 살폈다. 어딘가 달라진 모습을 살피려는 것이다. 그 상태로 로이드가 말했다.
“혹시…….”
“아, 알았어요.”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는 말에 에일린도 생각한 모양이었다. 로이드가 은근히 물어오는 통에 그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에일린이 돌연 반색하며 말했다. 그녀가 그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대공님 머리요.”
“……머리?”
로이드가 제 머리를 매만졌다. 씻고 나와서 온전히 말리지 않은 탓에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얽혀들었다.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난다 했는데, 씻으셨구나. 어제는 클라우디아에서 씻었잖아요. 그때 쓰던 용품이 달라서 그랬나 봐요.”
순간 로이드는 머리를 감을 때 쓰던 용품을 떠올렸다.
그런 걸 썼던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로이드는 에일린의 시선이 제 머리로 향하는 걸 보더니 맥빠진 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럴 리 없지.”
정말 제 페로몬이라도 맡은 줄 알았다. 다소 맥빠지는 대답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에일린이 오메가인지 의심한 자신이 더 황당했다.
***
에일린이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이젠 에일린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일지라도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종이에 적어 비밀공간에 모아왔다.
클라우디아가에 다녀오고서도 두 번이나 머리가 아팠다. 에일린이 제 일지를 적었던 종이를 전부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날짜별 시간별로 어떻게 통증이 일었는지 살펴보고 그 앞에 자신의 일정을 적었다.
“티타임, 식사. 산책.”
그녀의 하루는 유난스러울 게 없었다. 에바 선생과의 수업이나 클로에와 나누는 티타임.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두통이 찾아오는 주기만큼은 불규칙하게 일어났다.
“분명 뭐가 있을 거야.”
아예 아무것도 없이 일어나기엔 원인이 부족했다. 그게 뭘까 고민하던 에일린의 눈이 부지런히 종이를 오갔다. 의사가 심리적인 원인을 말했을 때 그렇구나, 싶었다. 그러나 요즘 에일린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나날을 지냈기에 절대 심리적인 게 아니었다.
“로이드와의 결혼은 이제 부담스럽지 않아. 가족을 못 보는 거 말고는 불안하거나 불행한 나날도 아니고…….”
오히려 오늘은 무엇을 배울지 기대되고 어떤 책을 읽을지 생각하면 기대감으로 충만해졌다. 에일린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계속 종이를 살폈다.
“분명 뭔가 있어. 뭔가가…….”
혼자서 중얼거리던 에일린은 순간 떠오른 가정에 몇 장의 종이를 한 번에 쥐었다.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구겨진 종이를 오가던 에일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불규칙한 게 아니었어. 오히려 정직하게 반응했었네. 내가.”
에일린이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그녀가 두통을 일으킨 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기에 불규칙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앞의 일정을 보면, 홀로 티타임을 하거나 식사를 했었다. 바로 반응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몇 시간이 지나거나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지끈거려서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와 같이 식사한 날엔 아프지 않았어.”
그러니까 로이드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한 날에는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누군가 에일린이 먹는 음식에 약이나 독을 타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에일린이 힘없이 종이를 늘어뜨렸다.
“그게 누구지?”
당장 제가 먹는 음식에 약이든 독을 탔다는 건 알지만 범인을 찾기 힘들었다. 이후로도 에일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
“사라진 약을 전부 조사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로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칼릭스를 돌아보았다.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대공비께서 마신 차부터 식사까지 전부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나온 건 아무것도 없다. 먹는 쪽이 아니라면 다른 원인이 있겠는데 그마저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에일린에게 손을 뻗은 심증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알란 원로의 사람이 대공비를 조사하던 걸 알았으니까요.”
“진짜 심증뿐이네요.”
“그래도 확실합니다. 이제껏 알란 원로가 꾸미던 계략과 동일합니다.”
로이드는 더 묻기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짜증스럽게 서류를 들추고 있으니 칼릭스가 심술을 부렸다.
“전하께서 마마의 옆에 붙어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예전에도 그리하신다고 했고요.”
“지금은 에일린도 의심할 겁니다.”
“차라리 말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텐데요. 혹시 압니까? 대공비 마마께서 더욱 적극적으로 해답을 줄지 말입니다.”
“아직 그녀는 내부 사정을 잘 모릅니다. 차라리 이 일을 완전 뿌리 뽑을 때까지 친정에 보내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칼리스가 답답한 마음에 제 가슴까지 주먹을 올렸다. 대공비에겐 말하지 말라. 그는 대공비를 옆에 두지 않을 거다. 그러면서 알란 원로가 벌이고 있는 계략을 알아내라.
참 이기적인 조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