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에일린에게 닥친 위험
“아무래도 다른 방에서 자야겠죠?”
에일린이 제 방을 들어와 침대를 보자마자 로이드를 돌아봤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침대가 더 커질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막상 눈으로 보니 착잡했다. 대공가에 있는 침대는 에일린과 로이드 두 사람이 눕기엔 과하게 컸다. 그래서 같이 누워서 잔다고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는데 이 침대는 달랐다.
“침대가 작아요.”
“붙어서 자면 되겠네. 뭐가 문제야.”
“불편하실 거예요.”
“누워보면 알겠지.”
씻고 바로 온 로이드가 은은한 체향을 풍기며 에일린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바른 향유인지 향긋한 냄새가 에일린의 긴장감을 더 끌어올렸다. 에일린이 두 손을 맞잡으며 최대한 진정해보려고 하지만 이미 좁은 방은 로이드의 향으로 가득 찼다.
로이드가 먼저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자리했다. 벽과 바깥쪽의 위치를 가늠하더니 바깥쪽에 누운 로이드는 남은 공간을 눈으로 살폈다. 그리고는 제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 자리를 넓힌 로이드가 에일린을 보며 빈자리를 두드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 수 있겠는데.”
“아니요. 절대 충분하지 않아요.”
에일린은 제게 주어진 좁은 공간과 뒤로 물러날 데 없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로이드의 몸을 보더니 크게 머리를 내저었다.
저기로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 위험한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럼 계속 서 있게? 거기서 밤샐 거야?”
“……가요.”
엉거주춤 침대에 무릎을 올린 에일린이 이내 눈을 감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로이드를 타고 넘어가야 했지만, 사과보단 눕는 게 먼저였다.
에일린은 어색하게 눈동자를 돌렸다. 왼쪽 어깨는 벽에 닿아 시원한데 오른쪽 어깨엔 온기가 닿는다. 그 온도 차 때문인지 더욱 제 오른편에 누운 남자에게 신경이 쏠렸다. 이대로라면 잠도 못 이루고 밤새울 거 같은데.
“그렇게 움직이면 잠을 못 자잖아.”
“미안해요.”
에일린이 얼음이 된 듯 약간씩 움직이던 걸 멈췄다. 그러나 열 개의 손가락 한마디씩 엇갈려가며 매만지고 있으니 그 미세한 반응에 로이드가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잠이 안 와?”
“……자야죠.”
에일린이 손마저 꼭 잡고 배에 올린 후 눈을 감았다. 자신이 계속 신경 쓰이게 하면 로이드가 못 잘 것 같았다. 그러면 내일 그가 피곤해질 게 분명하니 에일린은 움직이고 싶은 걸 꼭 참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일이면 좋겠다.’
아예 이 순간을 건너뛰도록. 그러나 어딘가 불편한 기분에 에일린은 결국 한쪽 눈만 살짝 떴다. 로이드가 자지 않는 걸 확인한 에일린은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움직일게요.”
로이드의 대답을 듣기 전에 에일린이 옆으로 누웠다. 로이드를 등진 게 아니라 마주 본 쪽이었다. 그 상태로 등을 벽에 붙이니 로이드와 하나도 닿지 않게 누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잘 수 있겠다.
크게 움직인 보람이 느껴지게 에일린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고른 숨소리에 로이드가 감았던 눈을 떴다. 커튼을 쳐놨음에도 달빛이 은은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딱히 불을 켜지 않아도 사위가 훤히 보였다.
로이드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받치더니 에일린을 보았다. 계속 불편한 티를 내더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잠들었다. 피곤했던지 깊게 잠이 들어 로이드가 보는 시선도 느끼지 못했다. 몸을 웅크리고 잠든 에일린의 긴 속눈썹이 눈 아래 그림자를 만들었다. 문득 예쁘단 생각이 들어 만져보고 싶었다. 로이드가 에일린의 얼굴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 손등 위로 그림자가 졌다.
“전하.”
창밖에 있을 누군가의 나지막한 부름에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온 로이드가 후원으로 나가자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그가 예를 취하면서 달빛 아래 파란 머리칼이 일부 드러났다 사라졌다.
“칼릭스 원로가 뭐라던가?”
“물증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에일린에게 손을 댄 게 맞네.”
로이드가 담담하게 보고를 받았다. 원로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걸 알았으니 그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내일 아침에 가지.”
“알겠습니다.”
러츠 경이 사라지자 로이드는 태연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 아무도 없는 공간 속에서 집사가 나왔다. 그는 방금 대화를 나눈 두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
에일린이 작게 기지개를 켜며 바깥을 확인했다. 창밖에 막 떠오르는 해를 보며 얼추 시간을 가늠해봤다. 오랜 시간 자지 않은 거 같은데 꿈을 꾸지 않았더니 몸이 개운했다.
옆자리를 확인하니 로이드는 없었다. 먼저 대공가로 돌아간 건 아닌가 싶지만 따로 메모 등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도 아프지 않고…….”
어제 아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을 중얼거리던 에일린의 목소리가 끊겼다. 에일린은 제 이마를 짚어보고 관자놀이 쪽을 눌러봤다. 전혀 아프지 않다.
“여기서 잠들어서 그런 걸까?”
좁고 누추해도 마음이 편한 장소라서?
그렇게 단순하게 여기기엔 어딘가 꺼림칙했다.
“아무리 환경이 달라졌다지만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반응이 오는 게 이상하잖아.”
에일린도 그간 자신이 만든 약을 조금씩 먹어봐서 알았다. 단순히 몸이 아프다면 낫는데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그러나 어떤 병도 이렇게 맺고 끊음이 확실한 건 없었다. 약을 먹었다면 모를까.
“앉아서 자?”
문가에 기댄 로이드의 목소리에 에일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말끔한 그의 모습을 본 에일린이 제 이불을 옆으로 밀어냈다.
“몸은 어때?”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어딘가 불편한 데도 없고?”
“잠을 잘 잤나 봐요. 개운하고 좋아요.”
“그거 다행이네. 앞으로 아프면 종종 와서 자던가.”
“그래도 돼요?”
“단, 나와 같이.”
에일린이 대답을 피했다.
“다시 오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나랑 같이 오는 게 싫은 거야?”
“대공님 바쁘시잖아요.”
그가 바쁜 걸 아는데 자기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올 수 있을까.
“그 정도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어.”
“알았어요.”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가까이 다가온 로이드가 에일린의 턱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에일린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로이드가 태연히 중얼거렸다.
“못 믿는 눈친데?”
“이제 돌아가야 하지 않아요?”
에일린이 가볍게 말을 돌렸다. 로이드에게 바쁘지 않냐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자 그는 아닌 척 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앞까지 배웅 나온 에단이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로이드가 인사하고 오라며 에단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에일린은 마차를 앞에 두고 에단을 돌아보았다.
“밥이라도 먹고 가지.”
“대공님께서 많이 바빠.”
“그래. 어제 온 것만으로도 바쁘신 와중에 충분히 시간을 내주신 거지.”
“아마도?”
에일린도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제 갑자기 오게 된 게 오히려 선물처럼 느껴졌고 오빠가 무사한 모습을 봤으니 다른 건 버틸 만했다.
에일린이 몸을 돌리자 에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에일린. 정말 아무 일 없는 거 맞지?”
“응?”
에일린이 의아한 듯 돌아보니 에단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곧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집에 와. 알겠지?”
“그럴 일이 있다면 꼭 올게.”
에단의 걱정에 에일린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길어져 에일린이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려다 뒤늦게 생각난 게 있어 에단을 돌아보았다.
“참, 혹시 이로얀 오빠 기억나?”
“이로얀? 누구였더라.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어릴 때 같이 놀았던 골목대장 오빠 있잖아.”
“아. 기억난다.”
에일린이 반색하며 바로 질문했다.
“그 오빠 다른 이름이 뭐였는지 알아?”
“다른 이름이 있어?”
“아니, 혹시나 해서…….”
“그런데 갑자기 이로얀은 왜?”
“비슷한 사람을 본 거 같아서?”
실은 누구를 보든 그 사람이 이로얀일지 모르지만 에일린이 대충 둘러댔다. 이로얀을 얼마나 기억할까 싶어서 물었지만 힌트가 될만한 건 없었다.
‘그 사람을 찾는 건 그만둬야 할까.’
어차피 찾아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일 사람이었다. 그저 과거의 일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욕심을 부린 건데 찾을 방법이 사라진다면 굳이 매달릴 필요까진 없었다.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에일린이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와주던 에단이 그녀를 불렀다.
“이로얀 말이야. 기사가 되어 있지 않을까?”
“기사?”
“응. 언젠가 나보고 뭐가 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었거든? 내가 생각 중이라고 하니까 자기는 갈 길이 정해져 있다고 했었어. 기사가 돼야 한다고 했었지 아마?”
에단의 말을 들은 에일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라탔다. 로이드의 신호에 맞춰 마차가 출발하는 동안 에일린은 에단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로얀이 기사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