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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33)화 (33/120)

33화. 어쩌다 보니

에일린이 고맙다는 의미로 에단과 눈을 마주친 후 로이드를 보았다. 어차피 그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꽤 많은 정보를 그에게 주었으니까.

“제가 비밀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던 이유였어요. 그리고 클로에 아가씨가 페로몬과에 갔다고 했을 때 저랑 닮았다고 한 거 기억나죠? 제가 페로몬 쪽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페로몬을 연구하면서 중간에 몇 가지 약을 만들었어요. 따로 기관에 보내 효과까지 검증받았고요.”

로이드가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일린이 만든 몇 가지 약은 상황에 따라 용도가 달랐다. 클로에가 에일린의 능력을 말하다 말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거였다. 앞뒤 상황을 알게 된 로이드는 계속 말하라는 듯 에일린을 보았다.

“저 혼자 공부하고 연구한 게 전부지만 그래도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대공님만 괜찮다면 그 공부를 이어가고 싶어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제 바람을 얹었다.

“당신 마음대로 해. 잊었어? 당신 마음대로 쓰라고 그 공간을 만들어준 거야. 내 허락이 필요한 게 아니지.”

“이제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에일린의 순수한 기쁨에 보고 있던 에단 역시 감정이 전염된 듯 따라 웃었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얼굴에 드리운 편안한 표정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걸 연구하기에 그렇게 몸을 사리는 거야. 그 방은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못 들어가는 곳이라고 했잖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런 거죠. 그러니까…… 누가 제 것을 보고 따라 만들었다가 사고를 칠까 봐?”

이해가 안 된 로이드가 미간을 좁혔다.

이유가 이상했다.

에일린은 제가 말해놓고도 다음을 더 이어가기 싫은 눈치였다. 그렇다고 안 하자니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어 에일린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덧붙였다.

“사이클 안정제가 나온 걸 보고 비슷하게 만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름 자신 있었어요.”

시중에 나온 사이클 안정제의 효능을 알았고 그게 제 오빠에게 꼭 필요한 약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구하고 싶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에일린은 그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연구를 했다.

“케이지라는 상인에게 어렵게 하나를 구했고 그걸 가지고 연구했죠. 제가 베타라 그 약의 효능을 확인할 순 없지만, 배합만 알아낼 수 있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자신감이 넘쳐있을 때였다. 수면제에 이어 진통제까지 만들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관련된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직접 약을 먹고 그 반응을 살폈다.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란 듯이 실패했어요. 오빠의 히트가 오기 전에 먹여봤는데 다른 반응이 나타났거든요.”

“어떤 반응이었지?”

로이드가 에일린의 말을 제법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에일린은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래봐야 피한 곳에 에단이 있었지만.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하겠다는 듯한 에단의 뭉근한 미소에 에일린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예정보다 이르게 히트가 왔어요.”

“맞아. 나 그날 죽는 줄 알았어.”

에단이 그날을 떠올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에일린의 연구에 있어 유일한 피실험자로 그때의 기억을 공유할 자격이 있었다.

“이번에도 말하면 한 천 번쯤 될 거 같은데 다시 말할게. 미안해 오빠.”

에일린은 아직도 에단의 히트를 불렀던 일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괜찮아. 별로 괴롭지도 않았어.”

에단은 에일린을 위로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기에 표정이 밝았다. 에일린도 그걸 알고 금세 미안해하던 표정을 풀었다. 시간이 지나 그때의 일은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나 보다.

“덕분에 잘 자고 일어났잖아.”

“오빠!”

에단의 장난에 에일린이 울컥하는 사이 로이드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재운 거야?”

“네. 다행히 이전까지 연구하던 게 수면제였거든요.”

“지금에서야 말하는데 그거 곰도 재울 수 있을 겁니다.”

“곰까진 못 재워.”

“그건 해 봐야 알지 않을까?”

에일린이 나름 항의를 하다 계속 조용히 있는 로이드가 신경 쓰여 그를 보았다. 생각에 빠진 듯 굴던 그가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저 에일린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내면 아내답게 네가 할 일을 하라는 그런 말이라도 들을 줄 알았나? 하지만 앞에 있는 남자는 패트릭이 아닌 로이드였다.

“배고프지 않아?”

로이드의 물음에 에일린이 뒤늦게 제 상태를 떠올렸다. 머리의 고통이 한결 가셨고 입맛이 없었는데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배고파요.”

“아까부터 기다리던데.”

그제야 접시를 든 채 이쪽을 바라보던 사라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에일린은 집사를 볼 때만큼이나 반가운 마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오시나 기다렸습니다.”

중년의 여인이 테이블 위로 접시를 내려놓자 로이드는 그게 뭔지 바로 알아챘다.

“이게 그 유명한 파이로군.”

에일린은 웃음을 삼키며 로이드의 앞에 살며시 파이 조각을 잘라 내밀었다. 로이드가 심각한 눈으로 파이를 보더니 이내 한 입 먹어보았다. 입이 살짝 움직이는 거 외에는 먹는 소리가 나지 않아 파이를 먹은 줄도 모르겠다.

에일린은 로이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다렸다. 파이를 삼켰는지 로이드가 가볍게 입술을 축이며 대답했다.

“평범한 맛이야.”

다소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로이드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대공가에 상주하는 비일즈 요리사의 음식을 먹으면 이 애플파이는 조금도 특별하게 여길 수 없었다. 에일린이 대신 사라 부인에게 맛있다는 인사를 건네려 할 때였다.

“따뜻하고.”

로이드가 붙인 한마디에 에일린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가 이내 미소로 바뀌었다. 로이드는 제 앞에 놓인 애플파이를 전부 먹었다.

***

“숙부.”

클로에가 칼릭스를 찾아왔다.

“클로에 왔구나.”

“오빠에게 들었어요. 클라우디아가로 간 이유가…….”

“쉿.”

칼릭스가 입가에 검지를 댄 체 주변을 눈짓했다. 클로에는 일부러 숙부의 방으로 찾아온 건데 할 말이 막히니 퍽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자.”

칼릭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클로에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러츠 경까지 클로에에게서 일정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세 사람이 움직인 곳은 인적이 드문 별채였다. 대공가의 많은 별채 중에서 거리도 멀고 관리가 잘 되지 않다 보니 아무도 찾지 않는 건물이었다.

무심코 따라가던 클로에는 눈앞에 드리운 거미줄에 놀라 멈춰 섰다. 그러자 뒤에 있던 러츠 경이 검집으로 그 거미줄을 치워주었다.

“여기 유령 나오는 거 아니죠?”

겉보기에 그래도 엄청 못 쓸만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클로에가 투덜거렸지만 칼릭스의 비웃음만 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칼릭스는 이미 몇 번이나 온 듯 자연스럽게 굴자 클로에가 별채의 비밀을 알았다.

“일부러 버려둔 거였네요.”

“그래. 바깥은 듣는 귀가 많아서 말을 하기 힘들어.”

칼릭스가 혀를 차며 불을 켰다. 은은한 등을 테이블에 놓자 사람이 오지 않는다던 별채의 주변이 제법 깔끔하게 정리된 걸 알았다.

“오빠는 일부러 나간 거죠?”

“그래.”

“원로원 때문에요?”

“정확히 말하면 알란 원로 때문이지. 그가 이번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긴 한데 도통 그게 뭔지 몰랐거든.”

“그래서요?”

클로에는 자신이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안에도 주기적으로 원로원의 움직임을 보고받았다. 겉으로야 평화로운 대공가였다. 전 대공이 사고를 당했지만 우성 알파라는 후계자가 있었고 충분히 능력이 출중했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이었지만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대공가의 힘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강해지도록 만들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밖에서 보는 시선일 뿐 대공가에 속한 이들은 진흙탕 싸움으로 몇 년을 보냈다.

대공가에서 원로원이 가지는 힘이 크다는 걸 알았고 그들이 제 오빠를 이용해 권력을 취하려는 걸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절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클로에가 설마 하는 눈으로 칼릭스 원로를 보았다.

“새언니도 같이 갔잖아요. 아니죠? 새언니를 건드리려는 거 아닌 거죠?”

이제 결혼한 신부인데 벌써 건드렸을라고. 하지만 칼릭스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는 걸 보고 대답을 짐작했다.

“아무래도 대공비를 이용할 생각인 듯하다.”

칼릭스의 선고와도 같은 말에 클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를 흔들 수 없으니까 새언니를 건드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에게 벌써 손을 뻗다니 사악해요.”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시간이 문제일까.”

로이드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나올 자들이었다.

“증거는요?”

“아직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심증만 있는 건 아니야. 이미 몇몇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발견했어. 우선 이것만이라도 대공에게 가서 알려야지.”

“혹시 새언니 머리 아프다는 것도 그것 때문일까요?”

“그것까지는 아직 확실치 않아.”

칼릭스 원로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대공비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파악하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하루빨리 그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이제 새언니까지 위험해지겠어요.”

클로에는 덩치만 커다랗고 안은 썩을 대로 썩은 대공가의 현실에 막막한 감정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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